[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숙신’고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숙신’고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08-‘숙신’고’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2.11.0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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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 표지. 2010 글모아 출판.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조선’과 뗄 수 없는 말이 ‘숙신’입니다. 그러니 숙신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갈 수 없어 한마디 합니다.

중국의 옛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동쪽 오랑캐(夷)’ 이름은 ‘숙신(肅愼[sùshèn])’입니다. ‘조선’보다 더 일찍 등장한 말인데 그 뒤 ‘조선’으로 대체되었고, 숙신은 ‘주신(珠申) 직신(稷愼), 식신(息愼)’ 같은 비슷한 소리가 나는 말로도 적었습니다. 아마도 동이(夷)를 대표하는 지배 세력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과 숙신은 같은 말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을 모르게 되면서 소리만으로 표기되어 전하다 보니, 한자도 여러 가지로 적힌 것으로 보입니다. ‘숙신’은 후대로 오면서 말갈(靺鞨) 물길(勿吉) 여진(女眞) 같은 말로 대체되어 만주 지역에 사는 어느 한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독립하고, ‘조선’의 본뜻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중국에서 동이를 가리키는 이 모든 말이 어떤 무리를 가리키는 동의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즉 어떤 종족의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베낀 말이라는 거죠.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들의 연관을 명쾌하게 입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777년에 청 건륭 황제의 지시로 중국의 이름난 학자들이 모인 한림원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흠정 만주원류고』입니다. ‘흠정’은 왕실에서 직접 관여했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는 만주 관련 자료를 모두 모아서 청나라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확립한 책입니다. 이 책을 충북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라서 이 글을 씁니다. 물론 저는 한문을 제대로 읽을 실력이 없어서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읽다 보니 쉬운 말로 어려운 학문의 아성을 허물어준 훌륭한 번역이어서 이참에 꼭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주성 씨, 고맙습니다. 참고로, ‘고맙다’는 ‘고마+ᄋᆞᆸ다’의 짜임인데, ‘고마’는 우리말에서 신을 뜻합니다. ‘고맙다’는 ‘나는 당신을 신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 책 속에 ‘숙신’의 어원을 파헤쳐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다음 문장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대금국지』 금나라의 본명은 주리진(珠里眞)이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옛 이름인 만주(滿珠)에 소속된 것을 주신(珠申)이라 불렀는데, 주리진(珠里眞)과 발음이 비슷하다. 다만 약간의 완급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은 모두 숙신의 발음이 변한 것이다.> 그 뒤에 잘못 전해져서 여진(女眞) 또는 여진(慮眞)으로 불렸으며, 숙신 씨의 후예로서 발해의 별족이다.(269쪽) 

 『금사 본기』 수국 원년(1115) 정월 임신일 초하루에 여러 신하들이 존호를 올리고 이날 황제에 즉위하였다. 황상은 “요나라는 강철로서 나라 이름을 지었으니, 그 단단함을 딴 것이다. 강철이 비록 단단하나 끝내는 변하여 녹슬고 만다. 오직 금(金)이 변하지도 녹슬지도 않는다. 금은 흰색이고 완안부는 흰색을 숭상한다. 이에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으로 한다.”라고 하였다.(277쪽) 

꺾쇠괄호(< >) 안의 주석은 이 책을 쓴 청나라의 한림원 대학자들이 붙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조선, 주신, 숙신, 식신, 직신, 여진’ 같은 말들이 모두 ‘주리진’의 음차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진족이 서양 쪽에 ‘주르친’으로 소개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동양과 서양 간에 서로 일치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리진’의 뜻이 무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최초로 제가 이 말뜻을 파헤쳐보려고 합니다. 하하하.

‘주리진’이 한자 기록이니, 우선 원래의 음이 어떤 것인가 알아보겠습니다. 리(里)는 향찰표기의 특성상 리을(ㄹ)을 적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음성기호로 ‘주리진’을 적어보자면 ‘jurjin’이나 ‘churchin’으로 적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眞)’의 뜻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낯익은 말들이 있죠. ‘진번(眞蕃), 진국(辰國), 진한(辰韓), 진한(秦韓)’ 같은 말들에서 ‘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황금을 뜻하는 말 ‘금(金)’의 만주어 발음입니다. 실제로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대풍청운』, 『황제의 여인』)를 보면 김 씨가 많이 등장하는데 모두 ‘친’이라고 부릅니다. 국제음성 기호로는 ‘čin’이라고 적습니다. 가야의 지배층이 쓴 드라비다어에서도 황금을 ‘č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주리진’의 ‘진’은 황금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족 명에 황금을 붙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드러내어 그 말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 자부심이 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의 뜻은 ‘하늘의 뜻을 받은 황금 겨레’입니다. ‘알타이’는 황금산(金山)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고대 부족들은 누구나 이런 의식과 관념을 갖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주리진’의 ‘주리’입니다. ‘진’을 제한하는 꾸밈말일 텐데,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몽골어, 터키어, 퉁구스어를 뒤져봐도 여기에 딱 알맞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 역사서에 나오는 말들이 걸맞습니다. ‘졸본, 살수, 홀승골’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에도 이런 자취가 있습니다. ‘독수리, 솔개, 소리개, 수라상’ 같은 낱말이 그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지명에는 ‘솔티’라는 말이 많습니다. 민간어원설에서는 소나무가 많아서 솔티라고 한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솔티’의 ‘솔’은 높다는 뜻입니다. 솔티는 높은 재를 뜻하죠. ‘수리티, 수리산, 수리봉, 수릿재, 소릿재’ 같은 지명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런 말에서 우리는 ‘높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말의 어근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ᄉᆞᆯ, ᄌᆞᆯ, ᄒᆞᆯ’이 그것입니다. ‘ᄒᆞᆯ’요? ‘할아버지, 할머니’에 있습니다. ‘할티’라는 지명도 많죠. 솔티=할티.

고구려는 졸본부여에서 나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졸’은 높다는 뜻이 분명하죠. 그러니 주몽이 ‘고(高)’를 성으로 삼았겠죠. 몽골어로 고구려를 ‘solho’라고 부른 것을 보면 더욱 심증이 갑니다. 따라서 ‘주르친’의 ‘주르’는 ‘ᄌᆞᆯ’과 같은 게 분명합니다. ‘높다, 위대하다, 빛나다’ 같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따라서 ‘주르친’은 위대한 황금 겨레를 뜻하는 말입니다.

‘čin’은 황금이라고 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금’이라고 한 것은 왕실의 성인 김 씨에서 따온 것입니다. 금 황제는 완안부의 추장 아골타(阿骨打)인데,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금사』에 적었습니다. 그 조상의 이름은 함보(函普)이고, 고려사에는 금행(今幸, 金幸)이라는 이름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문장의 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 따친)으로 한 까닭이 <금은 흰색이고 완안부는 흰색을 숭상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금의 빛깔은 하양이 아니라 노랑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거꾸러뜨린 요나라의 상징 쇠(철)가 흰색이죠. 이런 논리라면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 아니라 ‘백금(白金)’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골타는 ‘흰’과 ‘한’을 혼동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라를 떠나온 지 오래돼서 신라 말을 혼동한 것입니다. 자신의 성이 김 씨이니 나라 이름을 ‘금’이라고 했고, 거기다가 크다는 뜻의 ‘한’을 꾸밈말로 했는데, 이것을 흰색과 혼동한 겁니다.

이 혼동은 만주어와 우리 말이 뒤섞이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완안 씨가 쓴 퉁구스어로 하양(白)은 ‘saru’입니다. ‘한 금(大金)’을 ‘흰 금’으로 알아듣고, ‘흰(saru) 금(čin)’이라고 한 것이죠. 결국 ‘saru-čin’이 ‘주르친’으로 바뀌는 음운변화를 겪은 것입니다. 그 반대라고 해도 되겠죠. 이런 말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빛나는 하늘의 뜻을 받아 지상에 위대한 왕조를 세운 황금 겨레’입니다. 이 주르친이 한자로 ‘주신, 직신, 식신, 숙신’으로 기록된 것이고, ‘조선’도 그런 소리 베낌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습니다. 알타이 제어에서는 황금과 쇠를 구분합니다. ‘쇠’를 만주어로는 ‘sele’, 몽골어로는 ‘temur’, 터키어로는 ‘Demir’라고 합니다. 황금을 만주어로는 ‘asin’, 몽골어로는 ‘alta’, 터키어로는 ‘altın’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죠. 그런데 우리는 ‘쇠(철)’라고 하고 ‘황금’이라고 하여 색깔로 구분합니다. 황금의 ‘금’은 ‘쇠 금’자입니다. 우리에게 ‘쇠=황금’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황금과 쇠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 둘이 등가를 이루는 값어치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황금을 따로 나타내는 말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친(čin)’이라는 말이 그것인데, 이것이 우리말에서는 ‘김’으로 자리 잡습니다. 꾸밈 꼴 니은(n)이 이름씨 꼴 미음(m)으로 변한 것이죠.

참고로 몽골어로 ‘쇠’는 ‘temur’인데, 그러면 몽골 사람들의 이름 중에 ‘티무르(帖木兒)’가 왜 많은지 알겠죠? 우리말로 치면 ‘철수’나 ‘강쇠, 쇠돌이, 쇠똥이’ 같은 이름입니다. 동네마다 한두 명씩 있죠.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도 바얀테무르(伯顏帖木兒)였습니다. 몽골어로 ‘바얀’은 풍부하다는 뜻이니, 공민왕은 젊어서 몸집이 뚱뚱하지 않았을까요? 뚱보 철수, 또는 뚱보 쇠돌! 하하하.

칭기즈칸의 원래 이름 ‘테무친(temur-čin)’도 마찬가지겠죠? 쇠(temur)처럼 단단하고 황금(čin)처럼 귀하다는 뜻이 들었죠. 한자로 ‘철목진(鐵木眞)’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뜻을 감안하여 소리를 베끼는 한자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오를 때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 ‘주르킨’ 씨족이었다는데, 여진족이었을 것입니다. 주르킨=주르친.

백과사전에 소개된 칭기즈칸의 어원도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다들 신통치 않습니다. 몽골 사람들조차도 ‘칭기즈’를 ‘위대하다’는 그림씨(형용사)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칭(황금)+기즈(지방 국가)+칸(임금)’의 짜임일 겁니다. ‘기즈’는 북부 초원지대 여러 겨레의 말에서 제국을 구성하는 지역별 나라를 뜻합니다. ‘구스(헝가리어), 주스(카자흐스탄어), 우즈(우즈베키스탄어), 울루스(몽골어)’가 모두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말들입니다. 몽골은 자신에게 협조한 부족들을 몽골족으로 받아들여 구성원을 확대하며 세계로 뻗어가죠. 그렇게 받아들인 새 나라(지역)가 ‘기스’이고 ‘울루스’입니다. 칭기즈칸은 ‘하늘의 뜻을 받은 황금 겨레 연합국가의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몽골의 시조로 거론되는 분이 ‘부르테 치노’인데, 뜻이 ‘잿빛 푸른 늑대(蒼狼)’랍니다. 세상에! 짐승의 자식이 어디 있을까요? 동물 토템으로 보기에도 유치한 수준의 발상입니다. 몽골어로 늑대는 ‘치노’겠지만, 실제로는 늑대나 이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에 다른 뜻을 지닌 말의 와전일 겁니다. 제 글을 읽으신 분은 한눈에 답이 보이시죠? 치노(chino, china)는 ‘친(金, čin)’의 2음절 표기일 뿐입니다. 황금 겨레를 뜻하는 말입니다. 칭기즈칸의 조상이니, 황금 겨레가 맞죠. ‘부르테’의 뜻은 분명하지 않지만, 제가 아는 몽골어의 낱말 중에서 찾아보면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몽골어로 ‘첫째’를 ‘burdege’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부르테 치노(burdege-chino)는 우리말로 ‘첫째 친(金)’이 되겠죠. ‘황금 겨레의 시조’라는 뜻입니다. 이게 아니라면 몽골어 중에서 부르테에 좀 더 가까운 말을 여러분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연구 방향은 정해졌으니, 답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테무친의 ‘친’은 자기 조상 부르테 치노의 ‘치노’를 따서 붙인 이름이 분명합니다. 부르테 치노는 ‘첫 번째 친(金)’이고, 테무친은 ‘쇠돌이 친’의 뜻이죠. 이런 이름 붙이기는 낯선 게 아닙니다. 교황 요한 23세, 바오로 3세도 이런 발상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아마도 위대한 자손 칭기즈칸이 나왔으니, 그의 첫 번째 조상(burdege-chino)이라는 뜻으로 후대에 붙인 이름의 소리값이 와전되어 ‘잿빛 푸른 늑대’라는 동물 토템으로 이야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하하하. 왜 이 복잡한 얘기를 하느냐면, 기록할 때의 혼란상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퉁구스어로 쇠는 ‘sele’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쇠’는 ‘ᄉᆡ’와 같고 똑같은 소리가 우리말에서는 동쪽을 뜻합니다. ‘높새’바람의 ‘새’가 바로 동쪽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한자에서 찾아 쓸 때 ‘조(朝)’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르친’을 옮겨적을 때 ‘주르’의 발음에 뜻을 덧보태어 ‘朝’로 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朝에는 소리와 뜻이 동시에 작동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朝를 ‘조’라고 읽지만, 옛날에는 ‘됴’라고 읽었습니다. 『훈몽자회』나 『천자문』에 그렇게 나옵니다. ‘됴>조’의 변화는 구개음화라고 설명합니다. 알타이 제어의 공통점입니다. 발음을 편하게 하려다가 나타나는 현상이죠. 동학혁명 기념탑이 있는 고개를 ‘우금’이라고 하는데 뒤에 ‘치’도 붙고 ‘티’도 붙습니다. ‘우금티, 우금치’. 굳이 따지자면 ‘우금티’가 ‘우금치’보다 더 오래된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금티>우금치. 이런 현상으로 보면 우리는 훨씬 더 쉽게 朝와 ‘주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주어로 ‘높다(高)’는 ‘den’이고, ‘동쪽’은 ‘delgi’입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동쪽을 높은 자리로 쳤습니다. 해가 뜨기 때문이죠. 미래의 왕이 될 세자가 동궁(東宮)에 사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만주어에서 ‘높다’와 ‘동쪽’의 어원이 서로 비슷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르친’의 더 오랜 꼴은 ‘두르친’임을 알 수 있죠. ‘두르’는 ‘delgi’이나 ‘den’의 어근 ‘del’과 닮았습니다. 제가 앞서 ‘조선’의 朝에 소리와 뜻이 동시에 들었다는 말을 한 것이 이 뜻입니다.

대금(大金, [dàijīn])은 ‘따친’으로 들리게 소리 납니다. 여진족이 처음 나라를 ‘대금’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대청’으로 바꾸는데, 金(jīn)과 淸(qīng)의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한자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소리가 납니다. 大는 발음기호 상으로는 [dà]나 [dài]인데, ‘다’가 아니라 ‘따’로 들립니다. 큰형님을 뜻하는 말 따꺼(大哥)를 보면 알 수 있죠. 조(朝)의 발음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됴’였다는 것을 알면 ‘주르친’도 알타이어 문법의 큰 특징인 구개음화를 겪은 말이고, 구개음화를 입기 전의 발음이 ‘두르친, 듀르친’이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두르’가 ‘대’나 ‘됴’로도 적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금(大金)이 곧 대청(大淸)이고, 또한 주신(珠申)이자 숙신(肅愼)이며, 이들은 모두 ‘주르친(珠里眞)’의 음차 표기입니다.

‘주르킨’과 ‘주르친’에서 보듯이 키읔과 치읓은 서로 넘나듭니다. 여기서 ‘킨’이 ‘신’으로 넘어가는 것은 ‘친’과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chin>khin>sin>xin’으로 가면 이것을 鮮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주르친’이 ‘조선(朝鮮)’으로 충분히 적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미친 듯이 하다 보면 회의감이 밀려듭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조선과 숙신이 동의어임을 밝혀야 하나? 이런 회의감은 언어가 처음 생길 당시와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새로 부여하는 의미가 점차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숙신이 주르친임은 분명하지만, 조선이 주르친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면 잠시 망설이게 되는 심리는, 우리에게 ‘조선’의 의미가 단순히 그것에만 그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조선’ 어원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그런 심증입니다. 겨레가 분화됨에 따라서 말에 부여되는 의미도 점차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나 여러 책에서 그렇다고 얘기하니 이렇게 눈에 보이는 어원의 양상을 일단 정리해봅니다.

조선과 숙신이 같고, 금나라는 고려에서 온 사람이 건국했습니다. 그렇다면 금나라는 우리나라의 역사일까요? 중국의 역사일까요? 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이런 사건은 우리와 관련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고 말한다면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서 지워야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역사를 새로 써야 합니다. 발해는 요나라에게 망했고, 금나라는 발해를 무너뜨린 요나라를 원수로 삼아서 정벌하고 그곳에 새로이 선 나라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우리 역사가 아니라고 답하기에는 너무나 아쉽고 찜찜합니다. 한국 역사학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답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맘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만주원류고』를 읽다가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만주원류고』는 말 그대로 만주 지역의 역사 지리와 풍속을 다룬 책입니다. 하나 질문드리죠. 한반도는 만주인가요? 만주가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만주원류고』에 ‘삼한’ 항목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샅샅이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과 만주에 있었다는 듯이 서술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의 사건을 다룬 기사에 중국 내륙의 지명(산동, 산서, 하북)도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만주원류고』를 지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삼한이 중국과 요동 만주 지역에 있었습니다. 헐!

남들은 삼한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데, 우리는 주구장창 한반도 안에 구겨 넣으려고 낑낑거렸습니다. 한반도라는 여행 가방 하나에 꽁꽁 우겨넣은 역사를 이참에 한 번 꺼내어 만인이 보는 옷장에 진열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진열된 옷을 하나씩 골라 입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만주 요동 황하 유역으로 고대사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역사의 여행 가방을 여는 첫 일정은 『만주원류고』를 읽는 일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설렙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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