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4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4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13-단군과 기자4’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2.12.0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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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표지, 황소자리(2005년).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중국의 옛 나라 이름이 기자조선으로부터 왔다는 말을 들으면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께서 발끈하여 역사 기록과 유물을 들어서 저를 반박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준비한 그 유물의 숫자 못지않게, 저에게도 수레에 한가득 실을 만큼 많은 어원이 있으니 말입니다. 갑자기 누구의 말이 떠오르네요. 
“신에게는 배가 아직 12척 남아있사옵니다!” 
“사말(射末)에게는 말의 뿌리가 한 트럭이나 있습니다요! ”

북경 근처의 모든 지명이 저에게는 그런 증거물입니다.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씩 풀어봐야죠? 만리장성 바깥 요동의 북쪽에 있는 군 이름 중에 우북평(右北平)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사 기록을 접할 때 아주 자주 만나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보아도 이 ‘우(右)’는 뜬금없습니다. 우북평이 있으려면 그 왼쪽에 북평이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좌북평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북평도 없고 좌북평도 없는데, 우북평이 있습니다. 만약에 북경의 원래 이름인 북평과 관련이 있는 말이라면 우북평이 아니라 위치상 북북평이나 좌북평, 또는 상북평 동북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합당한 이름을 다 놔두고 ‘우’가 붙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민해야 합니다. 이 右는 오른쪽을 나타내려는 말이 아니로구나! 다른 그 어떤 말을 오른쪽이라고 착각하여 잘못 번역한 말이구나!

우리말에 ‘올’이 있습니다. ‘올벼, 올해’ 같은 낱말에 보입니다. 이때의 ‘올’은 이제 막 나타난, 그래서 아직 덜 성숙한 것, 또는 새로운 것을 나타내는 접두어입니다. 이 말이 지명에 붙는다면 원래의 지명이 아니라 옮겨온 지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미국의 ‘뉴욕’이 영국의 요크(York) 앞에 새롭다는 뜻의 뉴(New)를 붙여서 만든 이름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북평은, ‘북평’ 앞에 ‘우’가 붙은 것이고, 이것은 우리말 ‘올벼’의 ‘올’이 붙은 것입니다. ‘올은 북평’의 뜻이죠.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원래 우북평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북평, 즉 지금의 북경에 살았던 겁니다. 그들이 중국(周, 燕)에게 쫓겨 만리장성 밖의 그 황량한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중심지를 ‘박달, 배달’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북평이라고 불러야 했고, 원래 살다가 이민족에게 빼앗긴 그 박달과 구별하려고 앞에다가 접두어를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막 새로 이사 와서 자리를 겨우 잡은 도읍, 즉 ‘올은(新, 早) 박달(北平)’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올’을 오른쪽의 ‘오른’으로 잘못 알고 右로 번역한 것이 우북평(右北平)입니다.

저는 이 우북평이란 지명을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낍니다. 그 넓고 비옥한 북경 땅에 평화롭게 살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야심만만한 중국 놈들의 공격으로 쫓겨나서 저 황량한 북부의 산악지대로 도망쳐 겨우 목숨 부지할 터를 잡았을 것이니, 죽은 가족을 장사지낼 틈도 없이 허겁지겁 3,000리 피난길을 남부여대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한국 전쟁 중의 1.4후퇴가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그사이에 벌어진 고통스러운 민족의 대이동을 떠올리면 후손으로서 정말 피가 거꾸로 돌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역사를 말하는 곳이니 냉정을 되찾아야죠. 쩝! 『당서』 「배구전」에서 ‘고려’를 ‘고죽(孤竹)’이라고도 했다는데, 그렇게 말한 까닭을 알고 가야 할 듯합니다. 대나무나 갈대를 몽골어로는 ‘qusulu’라고 하는데, 우리말에서도 ‘갈대’를 보면 ‘갈’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죠. ‘겨릅대(麻)’의 ‘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孤竹은 ‘kokulu’라고 읽으면 되죠. ‘고구려’를 적은 한자 말입니다. ‘孤’는 소리를 적고 ‘竹’은 뜻을 적은, 향찰식 표기의 본보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의 역사서들은 고죽국의 위치를 한결같이 발해만 북안, 그러니까 만리장성 밖의 난하 근처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독사방여기요』에 보면 영평부 노룡현 조에서 고죽국의 위치를 성부(城府) 밖 15리(6km)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난하와 영평부는 서로 거리가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은나라의 충신 백이 숙제가 고죽국의 왕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이 숙제의 무덤이 있는 곳이 원래의 고죽국일 것입니다. 2구나 되는 시체를 딴 곳에서 떠메고 와서 연고도 없는 땅에 묻고 갈 리 없을 테니 말입니다. 백이 숙제의 무덤은 산서성 영제시에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고죽국의 위치를 만리장성 밖 난하 유역으로 퍼 옮기면서도 정작 백이 숙제의 무덤은 미처 이장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완전범죄가 될 뻔한 사건이 백이 숙제의 무덤으로 뽀록(!) 났습니다. 하하하.

따라서 고죽국은 처음 산서성 영제시에 있다가, 북경 근처의 영평부로 옮겼고, 또다시 만리장성 밖의 난하 언저리로 옮겨간 것입니다. 고죽국이 ‘고구려’의 한문 표기라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의 역사서들이 지목하는 고죽국은 난하 시절의 고구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뒤로 고구려는 다시 만주(안춘호수, 엄체수)로 옮겨갔다가 압록강으로 갔다가 대동강으로 옮겨가죠.

기자조선의 지배층은 몽골어를 썼으므로, 난하 근처까지는 기자족 이동의 자취를 볼 수 있고, 그 뒤로는 고구려 이동의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겨레가 이름을 바꾸어 이동한 경로를 이렇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경과 우북평에서 보이는 지명 이동은 이런 과정의 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일목요연하게 읽힙니다.

北伐山戎, 制泠支, 斬孤竹, 而九夷始聽, 海濱諸侯莫不來服.-『관자(管子)』
(제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영지(泠支)를 제압하고 고죽(의 우두머리)를 베자 구이가 비로소 (말을) 들었다. 바닷가 여러 제후국이 와서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孔鼂云: 不令支, 皆東北夷.-『일주서(逸周書)』
공조가 말하였다. 불령지(不令支)는 모두 동북쪽의 이(夷)이다.
朝鮮建國孤竹爲君.-『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 (모용은 비문)
조선이 나라를 세우고 고죽(孤竹)을 임금(君)으로 삼았다.

고죽이 고구려라는 사실을 알면 문장의 뜻이 또렷해집니다. 영지(泠支)와 불령지(不令支)는 같은 말일 겁니다. 이것은 ‘부리야트’를 적은 말입니다. 즉 불령지(不令支)의 발음은, [pǐwəlieŋȶǐe(상고음)>bùlíngzhī(현대음)]이고, ‘영지’는 이를 짧게 줄인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부리야트’의 앞 글자 ‘부’는 발음이 약했던 모양입니다. 악센트가 뒤에 있어서 가끔 묵음으로 처리되는 낱말이죠. 그래서 ‘부’가 생략된 채 ‘리야트’라고 발음된 모양입니다. ‘리야트’가 ‘영지’, ‘부리야트’가 ‘불령지’입니다. 이 불령지가 『삼국지』 위지 예전에서는 불내예(不耐濊)로 나옵니다. ‘不耐’가 바로 부리야트입니다. 여기서는 ‘야트’가 생략되었죠. 아니면 ‘야트’를 濊로 적었ᅌᅳᆯ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濊는 구다라입니다. 그럴 경우 ‘불내예’는 ‘부리야트의 구다라’를 뜻하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말을 살펴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부여의 한자 표기는 ‘夫餘, 扶餘’입니다. 夫의 상고음은 [pǐwa]이고, 扶의 상고음은 [bǐwa]입니다. 서양사람들은 p와 b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餘는 음운학 책마다 조금 다른데, [ʎǐa], [riaɣ], [di̯o], [djaɡ], [rag]로 다양합니다. 특히 [riaɣ]을 보면 ‘부여’는 부리야트를 적은 것이 또렷합니다.

백이숙제의 무덤은 청나라 때 만든 「대청광여도」에도 나오는데, 위치가 수양산 옆입니다. 그곳의 지명이 영지(泠支)입니다. 오늘날에는 산서성 영제시(永濟市)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보십시오. 제 글을 제대로 읽어온 분이라면 한 눈에도 ‘永濟’가 기자를 가리키는 말로 보일 것입니다. 永濟(융지)는 泠支와 똑같은 소리가 나는 말로 바꾼 것입니다. 소리를 보면 ‘부리야트’를 적은 것이기도 하거니와, 뜻을 보면 永이나 濟나 모두 ‘기, 키, 치(箕)’를 적은 것이고, 나아가 ‘箕子[kǐətsǐə]’와 ‘永濟[kitsiei]’는 발음이 똑같습니다. 永은 ‘길 영’ 자이니, 어근은 ‘긷, 깃, 깆(kit)’입니다. 훗날 무슨 생각으로 지명을 이렇게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는 원래의 땅이 지닌 뜻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이름 짓는 심뽀가 참 고약합니다. ‘불내예(不耐濊)’를 뜻으로 옮기면 ‘참을성이 없는 더러운 놈들’을 뜻하니 말입니다. 중국인들에게 참을성이 없다는 것은, 불같이 일어나서 자신들을 괴롭힌 놈들이라는 뜻이 들어있으니, 이들은 정말 성질이 불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만주까지 쫓겨가서도 끝내 오뚝이처럼 일어나 고구려라는 대제국을 세운 것이겠죠. 고구려는 정말 ‘엄지 척!’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고죽을 임금으로 삼았다는 말은, 고리족이 나라를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제나라 환공이 발해만 북안에 있던 부리야트를 제압하고 그 무리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고리족의 임금을 베자 9이가 말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때만 해도 구이(九夷)가 고리족의 세력 아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앞의 기록들이 매끈하게 연결되고 전혀 무리 없이 이해됩니다. 
北伐山戎, 制泠支, 斬孤竹, 而九夷始聽, 海濱諸侯莫不來服.-『관자(管子)』
(제환공이) 북쪽으로 (조)선(山戎)을 쳐서 부리야트(泠支)를 제압하고 (우두머리인) 고구리(孤竹)를 베자 구이가 비로소 (말을) 들었다. 바닷가 여러 제후국이 와서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산융을 놓고 선비라느니 흉노라느니 말이 많은데, 위의 기록을 보면 ‘산융=조선=부리야트’입니다. 고구려를 우두머리로 한 동이족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몽골어를 썼고, 그들 밑에 다양한 언어를 쓴 사람들이 깃들어 산 것입니다. 이들을 통틀어서 ‘조선>서언>언’이라고 한 것인데, 나중에 이들의 일부가 중국으로 편입되면서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와 제나라로 자리 잡는 것이죠. 산융의 상고음 ‘山[ʃean>shān]’을 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36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동이족의 위대한 통치자 ‘서언왕’은 이들 무리의 지도자이고, 그것이 전설로 남아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의 탁월한 안목을 새삼 또 느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모용은의 비문이 재미있습니다. 조선이 나라를 세웠는데, 고죽을 임금으로 삼았다니요? 그러니까 조선은 여러 종족이 합쳐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고, 그중에서 고죽이라는 부족을 왕족으로 추대했다는 말입니다. 흉노에서도 부여 고구려에서도 왕을 배출하는 부족과 왕비를 배출하는 부족이 따로 있다는 것이 이것을 뜻합니다. 여러 부족 중에서 고리족이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고, 아마도 이것은 부리야트 ‘기징가’ 부족이거나, 고구려 주몽의 계루부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기징가 부족의 왕은 ‘기자’이니, 이로 본다면 기원전 1,122년의 기자조선 출범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몽의 계루부를 말하는 것이라면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건국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모용 씨는 5호 16국 시대의 인물이니, 어느 쪽을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가까운 고구려 주몽의 경우를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연재를 통해서 제가 모든 말들의 뜻을 또렷하게 밝혀드렸습니다. 고죽(孤竹)=고구리, 산융(山戎)=고죽=고구리, 영지(令支)=불령지=부리야트, 예맥(濊貊)=구다라 발구진, 조선(朝鮮)=주르친=삼한. 이렇게 놓고 읽으면 난마처럼 얽힌 동이 관련 나라 이름과 종족 이름이 깔끔히 이해됩니다. 여기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 고리족, 곧 고구려죠.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책 『고려도경』(1,124년)에 고구려의 역사를 800년으로 적었는데, 고구려가 주몽부터 700년 가까이 존속했으니, 건국 전의 100여 년 역사를 고죽국의 이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서기 전의 기원전 100년 무렵은 한나라 무제의 흉노 정벌과 조선 원정으로 동북아시아 일대가 요동을 치던 때였습니다. 그때의 변화와 자취가 이렇게 언어에 남아있는 것이고, 지명에 고구려의 이동 자취가 또렷이 드러납니다. 

1973년에 중국 천진시 무청현(武淸縣)에서 기원전(B.C.) 165년의 비석이 하나 발견됩니다. 이름이 중산국선우황비(中山國鮮虞瑝碑)입니다. 중산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요? 몽골어로 가운데를 ‘kogoro’라고 하고, 산을 ‘agula’라고 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kogura’가 되고 이것을 중산(中山)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뜻입니다. 그 비문에 ‘기자의 조상은 은나라에서 나왔다.(箕先祖出于殷)’라고 나옵니다. 이 비문에 의하면 기자의 후손이 중산국, 즉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보면 고죽국이 산서성 영제시를 떠나 북경 근처에 다다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선우황비는 이 무렵의 유적일 것입니다. 이 이동과정에서 중국 측 옛 자료에 ‘고죽국, 중산국, 구려국, 고리국’으로 기록된 고구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선우는 무엇일까요? 이미 흉노를 논할 때 많이 보았습니다. 왕을 뜻하는 흉노족의 말이죠. 單于=鮮虞=淳維. 이 말은 고대 터키어로 폐하를 뜻하는 말 ‘jenap’을 적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황(瑝)은 사람 이름일 겁니다. 몽골족이 세운 고구려에서 왕 노릇을 한 ‘황’이라는 사람의 비석입니다. ‘선우’라고 한 것을 보니 아직도 흉노 세력이 망하지 않고 득세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기원전(B.C.) 165년의 일이니, 어쩌면 이 시기의 고구려는 흉노의 영향 아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흉노 정벌과 함께 고죽국이 천진 근처를 벗어나 만리장성 바깥의 난하 유역까지 짧은 기간 내에 쫓겨갔을 것 같습니다. 영평부 밖 15리에 있었다는 고죽국은 천진의 고구려(중산국)가 난하 유역으로 옮겨가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임시 근거지였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흉노의 편제를 이용하여 표현한 이름이겠죠. 백제 개로왕의 아들이 송나라로부터 받은 작위 이름 ‘정로장군 좌현왕’처럼 말이죠.

그러면 고구려 이동의 시기까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죠.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먹고 죽었을 때만 해도 고구려는 산서성 영제시의 수양산에 있었고(B.C.1,100년 무렵), 선우황비가 쓰였던 시절에는 천진시 근처에 있었습니다.(B.C.165년 무렵) 이보다 더 늦은 시기 어느 때에 오늘날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난하 유역으로 옮겨왔던 것이죠. B.C.109년에 한 무제가 조선 정벌을 단행하니, 이 무렵이면 고구려(예맥)가 난하 쯤에 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논의된 자료만 갖고도 이 시기는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니, 관심 있는 분들께서 한 번 해보십시오. 저는 역사에 문외한이라서 그런 걸 추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기자의 존재가 또렷해집니다. 즉, 기후(箕候)의 후손이 지금의 천진시에 ‘중산국’을 세웠고, 서한 시대에 지금의 산동성에 ‘기후국’이 있었으며, 요녕성 대릉하 유역에서 ‘기후국’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기가 발굴됩니다. 이런 자취를 보면 기자조선은 동이족의 범위와 엇비슷하게 겹치고, 한족의 세력에 밀려 그들에게 동화되거나, 그도 아니면 끝없이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이 계속 이동한 것과도 같습니다. ‘기자’는 동이족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이고, 그들이 살던 도읍이나 강에는 ‘기, 키, 치’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전국 7웅 중에서 제나라, 연나라, 한나라의 영역이 이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유물로 역사를 입증하려고 하면 꼭 반대 이론이 나옵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죠. 기자의 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며 갑론을박하다가 한세월이 갑니다. 이런 논쟁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언어를 빼놓고서 하는 논쟁이기에, 언어를 전공한 저로서는 아쉽기 짝이 없는 구경거리죠. 언어만으로 역사 유물의 성격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유물 하나 놓고 갑론을박하는 ‘오늘날의 언어’보다는, 오래된 ‘옛 언어’가 훨씬 더 강력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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