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8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8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17-단군과 기자8’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1.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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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신화 표지(삼중당).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우리는 국사 시간에 청동기시대에 관해서 배운 게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북방 시베리아를 거쳐서 들어왔다는 것이죠. ‘스키토 시베리언’이라는 상세한 낱말까지 저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졌습니다. 제 기억에 아로새겨진 이 말은 아마도 스키타이족 일파가 시베리아를 거쳐서 한반도로 들여왔다는 말일 겁니다. 그리고 청동검과 청동거울 같은 것이 마치 복사한 듯이 똑같은 모양으로 시베리아와 한반도에 걸쳐 발견된다는 사진 설명도 정확히 기억합니다.

청동기와 철기의 특징은 다른 문화와 달리 굉장히 빨리 전 세계로 퍼져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건의 쓰임이 절실하다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말 때문입니다. 말은 여러 가축 중에서 가장 늦게 길든 짐승으로 북방 초원지대에서 기원전 3,000년 전쯤에야 사육하는 데 성공합니다.(『알타이 신화』) 사람이 말을 길들임으로써 오늘날과 견줄 만한 이동 속도를 확보합니다. 발에 날개가 달린 것이죠.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는 신발에 날개가 달렸는데, 말의 속도감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하반신이 말인 켄타우루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무렵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청동기가 출현했고, 이것이 동쪽으로 번지면서 말과 같은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간 것입니다.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뿌리면서 말이죠. 한반도에는 기원전 10세기, 만주 지역은 기원전 15세기, 만리장성과 요하 서쪽 지역은 기원전 20세기 경이면 청동기가 보급되었던 것으로 유물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 청동기가 중동에서 동양으로 건너오는 길목은 단 하나 비단길입니다. 나중에 비단을 교역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 이전에도 힌두쿠시산맥으로 가로막힌 두 문명권이 교류할 수 있는 통로라고는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뿐이었습니다. 이곳은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 개척한 곳이고, 천산북로 북쪽의 초원지대를 거쳐서, 청동기는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남쪽으로 흘러가는 길목이 바로 요하와 만주 지역입니다.(우리는 이렇게 배웠는데, 요즘은 이 학설이 수정되었겠지요? 그 동안 고고학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을 테니.)

한반도 청동기 문명의 자취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고인돌, 비파형 동검, 돌무덤입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이 두루 나타나는 지역은 옛날의 동이족 강역으로,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 너머입니다. 만리장성 밖의 가장 큰 내가 요하(遼河)이기에 대충 ‘요하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요하 문명의 뿌리는 홍산(紅山) 문화임이 최근 들어 점차 드러나는 중입니다.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으로 자부한 황한 문명은 3,000년 전인데, 요하 지역의 홍산 문명은 10,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갑니다. 만리장성의 안팎이 서로 다른 문명인데, 시기의 앞뒤로 따지면 중국으로서는 고약해지죠.

이름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요(遼)는 ‘멀다’는 뜻입니다. 요하는 ‘먼 곳에 있는 냇물’이라는 뜻이죠. 누가 붙였을까요? 당연히 중국인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왜 멀다고 했을까요?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물줄기이기 때문입니다. 요하가 자기네 땅이라면 결코 멀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과는 다른 족속들이 사는 먼 곳의 강물이기에 ‘멀고 먼 내(遼河)’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북방 초원지대를 건너온 청동기는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요하 서쪽 지역에 이르고, 1,500년 무렵에는 만주 지역으로 두루 퍼지며,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전역에 이릅니다. 사실, 이런 시대 추정은 주먹구구식입니다. 발견되는 유물을 서로 비교하여 연대를 비정하는 방식인데,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죠. 기원전 1,500~1,000년 무렵에 거의 동시다발로 퍼졌다고 보는 게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게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아사달에서 나라를 엽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개천절 기원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석기시대였습니다. 이 지역의 청동기가 가장 빠른 시기라고 해도 기원전 2,000년 전이니, 그 전에 세워진 단군조선은 석기시대에 선 나라죠. 아마도 석기시대에 나라를 세웠다가 청동기를 받아들이면서 지배권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자’에 관해서 말하는 중입니다. 먼 길을 돌아서 제 자리에 왔습니다. 은나라의 3대 현인 중 한 사람인 기자가 망해버린 자기네 나라를 피하여 조선으로 왔다는 해는 B.C. 1,122년입니다. 이 시기를 청동기 전래 시기인 B.C. 1,500~1,000년과 견주어보면 무언가 뒤통수를 퉁(!) 하고 치지 않나요? 저는 쇠몽둥이로 한 대 맞은 느낌입니다. 아직도 모르겠다고요?

‘기자동래설’은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사실을, 훗날에 만들어진 왕조 사회의 관념인 책봉 관계로 덧씌운 왜곡이라는 말입니다. 1,500년 전 소용돌이치는 동북아시아 정세의 재편과정에서 기자라는 사람이 몇 명을 거느리고서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거기 살던 사람들이 “옛다, 네가 왕 해라!”면서 양보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입니다. 실제로는 모세의 출애굽처럼 벌어진 은나라 세력의 대규모 이탈을 주 무왕이 제후로 책봉하였다는 식의 봉건주의 관념으로 덮어씌운 것이 기자동래설이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후대로 오면서 우리 역사에서는 사대주의가 자리 잡은 뒤에 민족의 열등감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수작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북경 근처와 대릉하, 그리고 요동 기후국이 실제 은나라의 자취라 해도, 나중에 부리야트의 일파인 ‘기지’와 소리가 비슷하여 그들을 은나라의 후손과 같은 말로 계속 이어 불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나라는 동이족이었기 때문에 무왕의 정변을 피해 이동한 일군의 정치세력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망했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주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부족이 새 왕조의 통치를 받아들였겠지만, 그들이 싫어서 떠나는 부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아닌 경우는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 것인데, 그게 바로 백이 숙제의 고사죠. 백이 숙제는 훗날의 ‘충성’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인공이 굶어 죽은 신화로 자리 잡았지만, 실제로 고죽국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수양산→영평부(와 천진)→난하→대릉하→요하→송화강→압록강→대동강. 따라서 고죽국은 실제 백이 숙제의 설화와 달리 주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곳 땅을 떠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떠난 세력 중의 또 하나가 바로 ‘기자’ 세력입니다. 이들의 행동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기자동래설로 굳은 것입니다. 도망간 쪽이나 그들을 포용하지 못한 쪽이나 모두에게 그럴 듯한 명분을 준 것이 바로 기자동래설이죠. 후대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순진하게 믿고 자랑삼아 말한 것이고요.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평양에다가 기자 묘까지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죠. 유학자들은 은나라 사람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겠지만, 실제로 그 제삿밥을 받아먹은 사람은 부리야트의 왕족인 기징가(고죽)였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고죽국 세력과 기자 세력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이 문제일 텐데,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언어의 특징으로 보면 같은 세력인데, 고죽이 훨씬 더 작은 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나라가 싫어서 떠난 세력 중에서 서로 협력과 경쟁을 되풀이하는 관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영지(泠支:부리야트)를 제압하고 고죽(고구려의 우두머리)을 베자 온 오랑캐(九夷)가 비로소 (말을) 들었다.”라는 옛 기록을 보면 이런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이 어느 쪽이라고 해도 역사 전체의 흐름은 큰 변화가 없습니다. 사정이 어떻든 그 기자동래설에 서린 뜻은 바로 왕조 교체의 비밀과 시기입니다.

조선은 원래 단군조선이었습니다. 그랬다가 기자조선으로 바뀌었죠. 이 교체기가 기자동래설로 정리된 시기인 B.C. 1,122년이라는 말입니다. 기자동래설이 후대에 만들어진 관념이지만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으로 바뀐 것은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기자동래설에서 왕조가 바뀐 시대는 알 수 있지만, 왕조 교체의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말의 뿌리를 캐는 작업을 통해서 그것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앞서 잠시 보았듯이 단군조선은 석기시대에 성립한 왕조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청동기시대가 개막됩니다. 청동기는 외래품입니다. 그것을 가져온 세력들이 돌로 무기와 연장을 만들어 쓰던 허약한 세력 밑으로 들어갈 리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열쇠입니다. 청동기를 가져온 세력이 새로운 왕이 된 것이고, 그전의 왕은 자리를 내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자동래설이 알려주는 암시입니다. 이 기자는 은나라의 기자가 아니라, 부리야트의 한 일파인 ‘기지(kiʒi)족’이죠. 당연히 부리야트를 구성하는 몽골족들은 이들과 한 세력이 되어 조선의 단군 세력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뒤 스스로 권좌에 올랐을 것입니다.

기자 세력이 몽골어를 썼다면, 한참 뒤에 한 무제의 공격을 받고 동쪽으로 달아난 흉노족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터키어를 쓰던 세력들이 몽골어를 쓰는 세력 밑으로 숨은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어를 쓰는 세력이 바로 기자조선입니다. 초원지대의 터키어를 쓰는 겨레와 몽골어를 쓰는 겨레는 서로 같은 운명체로 생각했던 것이고, 그런 바탕에는 대중국 항전이라는 커다란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흉노와 조선의 공동 적은 한나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흉노와 조선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죠. 『한서』의 “동쪽 조선을 정벌하여 현(도)와 낙랑을 일으키니 이로써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東伐朝鮮 起玄樂浪 以斷匈奴之左臂)”를 보면 분명합니다.

터키어를 쓰던 흉노족들이 중국의 연이은 파상공격으로 초원의 근거지를 잃게 되자, 같은 공동운명체 국가가 다스리는 조선의 세력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입니다. 초원지대의 겨레들에게는 어떤 언어를 쓰든 중국과는 문화도 삶의 방식도 뿌리도 다른 그들만의 공통성과 호환성이 있었던 것이죠. 이에 따라 흉노라는 큰 나라를 이루었던 터키어 쓰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예봉을 피해 몽골어를 쓰는 ‘조선’의 지배층 밑으로 스며들어 살기를 꾀한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우리 역사에서 난제였던 백제의 문제, 즉 요동경략설이라는 어거지 해석도 쉽게 풀립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영명 6년(488) 12월, 북위가 병력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졌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와 진평의 서쪽 두 현을 차지했다.”라고 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이 백제를 요동 경략설로 설명해왔습니다. 즉 한반도 안의 백제가 국력을 키워서 요동 반도로 진출하여 빼앗은 영토라는 식이죠. 그리고 그 이상의 설명도 없이 요동 경략설은 흐지부지 끝납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왕좌를 빼앗은 세력이 부리야트의 일파인 기지족임을 받아들인다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습니다. 바이칼호숫가의 초원지대에 살던 기지족이 어떤 연유로(청동기 전파과정으로 판단됨.) 기원전 1,200년경에 단군조선이 있던 만리장성과 요하 서쪽의 사이(난하 유역)로 이동했고, 중국의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인 단군조선의 혼란을 틈타 왕위를 넘겨받음으로써 기자조선을 열었고, 이후 세력을 장성 밖으로 확장하는 중국에 다시 밀려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자조선도 나중에는 난하(灤河)나 대릉하, 요하 언저리로 밀려났다가 점차 더 동쪽으로 옮기는데, 그 밑에 있던 고리족 일파가 고구려 세력을 따라 송화강과 압록강 근처로 와서 고구려를 세웠고, 이들 중 일부(구다라)가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와 한강에서 백제를 세웁니다.

만약에 은나라 기자동래설을 이용하면 고조선의 도읍 이동 문제는 훨씬 더 쉽게 해결됩니다. 지금 천진시의 중산국, 산동성의 기후국, 요녕성의 기후명 청동기가 기자의 이동을 보여줄 만한 고고학 자료입니다. 이런 이동 과정은 아사달, 금미달(신시), 장당경으로 이어지는 고조선의 도읍과 비슷합니다. 중국 측이든 한국 측이든 기자동래설에 무게를 실으려는 모든 시도는 덩달아 고조선 전체의 상황을 입증하게 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어쨌거나 기자동래설은 그것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고조선의 실체를 더욱 드러내는 증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양해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역사 지식은 1970년대에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이 청동기 전래과정은 그때의 기억이고, 그 후의 연구를 통해 바뀐 내용을 바탕으로 저를 질타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바이칼에 있는 부리야트족이 서쪽으로 와서 중국의 경계선에 살았다고 제가 방금 설명했는데, 그 반대로 봐도 된다는 말입니다.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쫓겨서 나중에 바이칼 근처로 와서 정착했다고 봐도 된다는 거죠.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역사학도가 아닌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언어가 알려주는 방향을 따라서 설명할 뿐입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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