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10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10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19-단군과 기자10’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1.1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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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일부.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고려사 일부.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단군과 연관된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에 ‘진단(震檀)’이 있습니다. 1934년에 결성된 역사학회 이름이 ‘진단학회’였는데 바로 이 ‘진단’입니다. 이것은 동방의 단군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박달(檀)이 불교의식에 쓰이는 향목이어서 범어로 ‘caņḍana’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진단(震檀)이라고도 적고 신단(神檀)이라고도 적습니다. 따라서 ‘神檀’이나 ‘檀’은 모두 ‘박달’을 적은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저에게 활을 배운 사람 중에 산스크리트어 전문가가 있어서 이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안필섭 접장의 설명을 들으니 번역상의 문제가 약간 나타나네요. 그에 대한 보충 설명을 덧붙입니다. 즉, caṇḍana와 박달나무는 조금 다른 것이랍니다. caṇḍana는 영어로 sandalwood인데 단향과 식물이고,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 식물로 서로 성질이 다릅니다. 박달나무는 인도에 없는 나무이고, 샌달우드는 동북아시아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아마도 명칭의 발음이 비슷하여 같은 한자인 檀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단수(神壇樹)’라고 할 때 뒤에 붙은 수(樹)는 나무의 뜻이 아니라 마을이나 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몽골어로 ‘마을’은 ‘küi’이고, 일본어로 ‘성(城)’은 ‘kï’이고, 터키어로 ‘마을(村)’은 ‘köv’이며, 백제어로 마을이나 성은 ‘kü’입니다. 따라서 ‘樹’는 나무가 아니라 마을을 뜻하는 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단수’나 ‘단수’는 모두 ‘박달성’ 또는 ‘박달촌’을 적은 말입니다.

다음으로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말인 ‘평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옛날에는 ‘평양(平壤)’에 대한 한자 기록이 여럿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평양을 ‘백악(白岳)’이라고 했습니다. ‘白岳’은 ‘밝달’의 번역어죠. 평양은 ‘박달’이었다는 말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평양을 ‘양주(楊州), 류경(柳京)’이라고도 했습니다. 楊과 柳는 모두 ‘버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박달’과 발음이 거의 같죠. 그래서 우리를 ‘배달민족’이라고 합니다. ‘배달, 버들, 박달’ 모두 같은 말입니다. 같은 지리지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白烏縣元高句麗郁烏縣今平昌縣 : 北原京本高句麗平原郡”
여기서 보면 ‘白(pak)=北(pək)=平’이 짝을 이루었습니다. 만주어로 ‘平’은 ‘balha’여서 나머지와 거의 같은 소리를 내기에 이렇게 대조시킨 것입니다. ‘평양’의 ‘평’은 ‘박’이고, ‘양’은 ‘달’입니다. 알타이어(만주, 몽골, 터키)에서 ‘달’은 모두 너른 들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양’이 ‘박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퉁구스의 말이 지배층에서 밀려남에 따라 나중에는 몽골어로 대체됩니다. 평양은 ‘박달’인데, 이것을 대체한 몽골어가 바로 낙랑(樂浪)입니다. 몽골어로 ‘즐거움, 기쁨’은 ‘baxadal’인데, 이것을 뜻으로 번역하여 ‘樂浪’이라고 한 것입니다. 樂은 ‘즐거울 락’ 자죠. 浪은 끝소리(ㄹ) 첨가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신라에서도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원래 경주의 계림은 ‘樂浪’이었습니다. 박 씨 왕조가 석탈해와 김알지 연합 세력에게 밀리면서 ‘서라벌, 사로’로 바뀐 것입니다. 몽골족들은 ‘樂浪’이라고 쓰고, ‘박달’이라고 읽은 것입니다. 경주가 박혁거세의 본거지인데 거기서 몽골족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연재의 맨 앞에서 본 ‘금성(金城)’에서도 볼 수 있죠. 경주에 살던 사람들은 한 부족이 아니라 여러 혈통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왕검(王儉)’은 통치자를 뜻하는 말인데, 만주어로 ‘임, 임자’는 ‘niŋgu’이고, ‘왕, 신’은 ‘kum’이어서,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왕험성(王險城)’은 왕의 도시를 뜻하는 말입니다. 만주어로 서울(도읍)을 ‘gemun’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앞부분 ‘gem’이 ‘險’으로 적힌 것입니다. 물론 ‘un’은 생략되었죠. 향찰표기서는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왕험성은 님(王)이 사는 도읍(gemun), 즉 수도를 뜻합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격문(格們)이라고 적었죠.

왕험성이 있는 도읍의 이름은 아사달(阿斯達)입니다. 만주어로 궁궐이나 누각을 ‘asari’라고 합니다. ‘아사달’은 왕궁이 있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금미달’도 아사달과 똑같죠. 금미달의 ‘금미’는 ‘gemun’의 표기로 봐도 되고, 신을 뜻하는 우리말 ‘ᄀᆞᆷ’의 표기로 봐도 됩니다. 아사달은 왕궁이 있는 도시라는 뜻이고, 금미달은 왕이 사는 도시를 말합니다. 범어로 박달나무는 ‘caņḍana’인데, 여기에 도시를 뜻하는 ‘gemun’이 붙어서 장당경(藏唐京)이 됩니다. 진단(震檀)이라는 범어에서 보듯이 『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이 중이니, 충분히 범어로 적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퉁구스어를 쓰던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서 단군(박달가간, 댱ᄀᆞᆫ)을 왕으로 모시고 ‘아사달, 금미달, 장당경’으로 표기되는 왕성에서 살면서 조상신으로 환인을 섬기는데, 그들의 수도인 박달(평양)은 이들의 이동에 따라 몇 차례 옮겨갑니다. 그것이 단군신화에 나타난 여러 이름씨의 상황입니다. 단군조선의 주인공들은 퉁구스어를 썼음이 드러납니다.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의 지배층은 서로 다른 말을 쓰는 겨레였고, 원래 다민족 연맹체의 초기 단계 국가였던 고조선은, 석기시대에 처음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중국 동북부에서 발굴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원의 문명보다 훨씬 더 시대를 앞서는 거대한 석기시대 왕릉은 단군조선이 남긴 자취입니다. 그러던 중에 청동기를 갖춘 북방의 몽골족인 부리야트 기자족이 밀려들면서 그들 청동기의 세력에게 석기시대에 머물던 단군족이 밀려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자동래설’이 암시해주는 고조선 사회의 대격동입니다.

오늘날에도 만주 쪽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그 유명한 산해관(山海關)입니다. 중국 지도는 전체를 보면 닭처럼 닮았는데, 이 산해관은 닭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안에서 열어주기 전에는 어떤 세력도 강제로 열 수 없습니다. 그만큼 험합니다. 수레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의 너비가 골짜기를 따라서 길게 이어집니다. 청나라가 중국으로 들어갈 때도 스스로 열지 못하고 부패한 정부 관료를 뇌물로 움직여서 산해관 수문장을 역적으로 만들어 스스로 문을 열도록 하는 방법을 써서 장성을 넘어갔습니다. 그만큼 성도 길목도 공고합니다.

이곳을 여는 민족이 중국 중원의 주인이 됩니다. 이 산해관의 바깥에 중원보다 더 큰 거대한 문명이 있었고, 그 문명의 자취는 1980년대 들어서 하나씩 발굴되는 중입니다. 물론 중국 측에서 발굴하면서도 일체 입을 닫고 있죠. 이들의 존재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서 막으려 했던 어떤 세력이고, 그들이 북방의 흉노족이 아니었다면 오직 고조선밖에 없습니다. 현재는 홍산(紅山) 문화유적이라고 하여 아직도 발굴 중입니다.

조금 빗나가는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 산해관이 바로 위만조선의 위치를 입증해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기』에 보면 “진번의 주위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황제를 뵙고자 하면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위만조선을 정벌하는 주요 명분이 되죠. 요동태수가 대신한 황제로부터 위만조선이 이런 지적을 받은 것 자체가 위만조선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중국의 동북쪽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중에서 가장 험한 곳은 산해관(山海關)입니다. 이곳은 일개 중대가 지키기만 해도 백만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곳입니다. 지형이 험해서 대문만 닫아걸면 개미 새끼 한 마리 통과할 수 없습니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이곳에서 시작한 이유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입만 열면 말하는 그 유명한 갈석산은, 이곳 산해관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만약에 위만조선이 대릉하나 요동에 있었다면, 다른 겨레들이 중국 황제에게 알현을 가는데 꼭 위만에게 허락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위만이 길을 막고 통행세를 요구하면 다른 먼 길로 돌아가면 됩니다. 목포 가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도 있고, 경부 호남 고속도로도 있으며, 남해안 고속도로도 있고, 국도도 있고, 뱃길도 있습니다. 이 많은 길을 위만이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입니까?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곳은 산해관뿐입니다. 위만이 바로 그곳과 맞닿은 조선 쪽 변경을 차지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역사학계가 하도 강한 주장을 하시니 일단 그 말씀대로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조선을 단군이 다스리던 것이었는데, 청동기시대의 개막으로 새로운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북방 유목민족 중 바이칼호숫가의 몽골족 일파가 왕성 아사달로 쳐들어가 퉁구스어를 쓰던 단군 세력을 끌어내리면서 세대교체를 이루어 기자조선의 시대를 열었고(B.C. 1,122년), 이후 기자조선의 기치 아래 여러 세력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다가, 한나라의 잦은 공격으로 망할 위기에 처한 기자조선을 위만이 다시 한번 찬탈하여 위만조선이 열립니다. 위만에게 밀린 기자조선 세력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을 세우죠. 나중에는 위만도 무제의 공격으로 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삼국시대가 개막됩니다. 이것이 어원을 통해서 훑어본 동북아시아의 고대사 상황입니다.

이처럼 한 왕조 안의 왕실 세력 교체 현상은 앞서도 몇 차례 알아본 적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벌써 익숙합니다. 부여가 고구려로 재편되는 과정에서도 겪었고, 백제가 비류 백제에서 온조 백제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한 번 구경했습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기에 기록에는 아주 간단하게 등장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정치 세력의 암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상은 석기시대의 왕조가 청동기시대의 왕조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한 것인데,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찍어눌러서 뺏는 것이라면 나라 이름 자체가 바뀌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그대로 두고 앞의 말만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불가항력에 의한 결과이지만, 양측이 어떤 합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합니다. 그 시대의 합의는 대개 혼인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혼인으로 왕권을 교체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과정이 단군신화 속에도 나타납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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