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11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11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20-단군과 기자11’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1.26 14: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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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궁도회가 작성한 1941년 활쏘기 대회 신청자 명단의 일부. 함경북도 선수로 참가한 웅호정(雄豪亭) 소속의 윤시섭(尹時燮) 접장 주소가 간도성(間島省) 도문가(圖門街)로 적혀있다.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신화는 시간을 압축한 문학 표현 방법입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땅에 내려와서 곰과 호랑이를 만나죠. 이들에게 쑥과 마늘을 주어서 시험합니다. 결과는 곰의 승리. 그래서 곰과 결혼합니다. 이것은 조선이 ‘하늘’을 숭배하는 겨레이지만, 그 밑에서는 부족마다 토테미즘을 믿었다는 얘기이고, 천신족인 환웅이 토테미즘 신앙을 지닌 두 부족 중에서 곰 토템을 믿는 부족을 선택했다는 얘기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단군은 퉁구스어를 쓰는 부족이었습니다. 기자는 몽골어를 썼죠. 기자조선의 지배층은 몽골어를 썼으므로, 곰과 호랑이 토템을 지닌 부족은 둘 다 몽골어를 썼을 것입니다. 몽골어를 썼지만 토템은 다른 겨레, 이 겨레를 찾으면 단군의 왕위를 차지한 겨레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동이전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먼저 호랑이를 신으로 모신 부족은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하는 예(濊)입니다. 곰을 신으로 떠받드는 부족은 고구려입니다. 동맹이라는 행사를 할 때 수신(隧神)을 모셔오죠. 이 수신이 조상신이자 곰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퉁구스어를 쓰던 단군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청동기 부족 중에서 예족과 고리족을 두고 고민하다가 고리족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고구려가 됩니다. 고리족 안에도 ‘기지’족이 있는데, 이들이 실제 단군의 왕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 기자를 중심으로 대중국 항전을 이어갈 내부 정비를 마친 것이죠. 그리고 이제부터 중국과 조선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한판 운명의 대결을 벌입니다. 이것이 단군신화의 혼인 이야기가 알려주는 고급 정보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문학도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죠. 그래서 저는 문학을 좋아합니다. 하하하.

동양의 역사 서술에서 원래 지금의 임금에 대한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천자’일 뿐입니다. 지금의 임금이 죽고 나면 비로소 그 임금의 한 삶을 평가하여 다음 대에서 이름을 붙이고 ‘존호’를 올립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의 모든 임금이, 그들 자신은 살아생전에 듣지도 못하던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의 한 복판에서 가장 자주 말밥에 오르는 인물이 바로 한나라 무제(武帝)입니다. 무(武)는 무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무제’란 무기를 든 황제라는 뜻이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렀기에 이런 이름이 다 붙었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히 보아온 바 그대로입니다. 무제는 북방의 흉노족을 쳐서 중국의 후환거리를 없앴습니다. 살아생전에 평생토록 전쟁만 하다 죽은 황제입니다. 그래서 무제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동양의 역사에서는 왕조마다 이렇게 전쟁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잡은 임금에게 예외 없이 ‘무’라는 존호를 올렸습니다. 중국의 각 왕조에 붙은 ‘무제’라는 이름의 황제를 잘 살펴보면 모두 그에 걸맞은 행적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제가 북방의 흉노족을 친 것은, 십분 이해가 갑니다. 매년 어마어마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 하고, 심지어 사람까지도 뽑아서 보내야 하니, 불구대천의 원수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도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고, 왕소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국의 백성들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흉노족을 친다고 하니, 백성들이 모두 일어나 황제를 찬양할 일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전쟁은 돈이 드는 일입니다. 흉노족과 한판 싸움에서 국고가 바닥나서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왕망에게 나라가 망합니다. 흉노를 친 명장 곽거병은, 나라 이름까지 신(新)으로 바꾼 왕망에게 역적으로 몰려 온 가문이 몰살당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죠. 얼마 안 되어 왕망이 망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광무제의 후한 시대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국고가 바닥난 상태에서 다시 한번 조선과 한판 전쟁을 추진하는 무제의 이 무리수는 언뜻 이해가 잘 안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흉노를 치고 말면 끝날 텐데, 뒤이어 조선을 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무제에게는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흉노의 황제인 선우와 좌현왕은 유럽 쪽으로 도망가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했지만, 동쪽으로 간 우현왕과 이를 따르는 흉노족들은 자신과 목적이 같은 공동운명체 기자조선의 밑으로 흘러든 것입니다. 만약에 무제가 흉노 정벌을 여기서 멈추면 기자조선의 밑으로 흘러들었던 흉노족들은 금세 초원지대로 돌아와서 중국의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무제가 보건대, 흉노의 근거지를 소탕하여 일단 중국의 안녕을 얻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은 것입니다. 잠시 후에 오히려 그 불씨는 그 전보다 훨씬 더 드센 기세로 초원 가득 타오를 것입니다. 그 불꽃이 마지막으로 겨눌 곳은 중국입니다. 한 번 칼을 뽑아든 무제로서는 이를 두고 볼 수가 없죠. 그래서 결국 삶의 막바지에 한 번 더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조선 정벌입니다. 조선 내부의 반란과 분열로 조선은 결국 망하고 맙니다.

망할 무렵의 위만조선에서 쓰던 벼슬 이름이 보입니다. 니계상(尼谿相)과 조선상(朝鮮相)입니다. 조선상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상’은 ‘재상’의 뜻이니, 조선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를 말합니다. 위만조선이 기자조선을 접수한 왕조이니, 새 왕조에 소속된 사람(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을 총괄하는 벼슬을 둔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니계상은 조선이 아닌 다른 겨레들을 통솔하는 벼슬아치였ᅌᅳᆯ 것입니다. 이 니계라는 이름은 『사기』 공자세가에도 나옵니다. 공자가 35살 때 제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니계(尼谿)의 전(田)’에 봉하려고 했는데, 안영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썼습니다. 니계(尼谿)는 고조선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尼는 중을 뜻하는데, 터키어로 ‘sör’입니다. ‘계’는 ‘ge’의 향찰식 기록입니다. 합하면 ‘sörge’. ‘고려’는 몽골어로 ‘solgo’이고, 만주어로는 ‘solho’입니다. 이로 볼 때 니계상은 몽골족(기자조선의 유민)과 퉁구스족(단군조선의 유민)을 총괄하던 벼슬입니다. 예상대로 위만의 손자 우거는 니계상의 반란으로 죽습니다. 그 전의 기자조선을 따르던 세력들이 위만조선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이죠. 이 때문에 이어진 내분으로 위만조선이 망합니다. 공자 세가에 나오는 니계도 마찬가지로 북방 민족이 중국으로 흘러든 자취입니다.

신라 문무왕비에 신라 왕실의 연원을 밝힌 구절이 있습니다. ‘秺侯祭天之胤’이 그것입니다. 투후 김일제(金日磾)의 후예라는 뜻인데,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아들이었습니다. 무제의 흉노 정벌 때 곽거병에게 붙잡혀온 14살짜리 어린 포로였는데, 무제가 아낀 인물로 나중에는 자신의 사후까지 부탁할 정도로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비석의 내용은 신라 왕실의 김 씨가 터키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해온 사실과 일치합니다.

김일제에 대한 자료를 찾느라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역시 인터넷에서도 이런 기록을 놓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더군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혹은 한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비칠 수 있습니다만, 신라 김 씨와 김일제의 연관성은 매우 짙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금석문인 비석에 적힌 글이고, 문무왕이 제 혈통의 뿌리를 밝힌 글입니다. 편집 가능한 역사서와는 다른, 당사자의 말입니다. 당사자의 말이 틀릴 수도 있지만, 2,000년 전의 사료가 현저히 부족한 오늘날에 이런 금석문 자료는 종이에 쓰인 글씨보다 더 값지고 사실에 가깝습니다.

후기 신라로 접어들면 터키계 왕족들이 실제로 권력을 잡고 왕위에 오르는데, 신라 전기의 왕족은 퉁구스계였기 때문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때 권력을 잡은 왕들의 조상이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와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 무제의 흉노 정벌로 흉노 중에서 적지 않은 피붙이들이 고조선의 날개 밑으로 흘러들었고 그런 여파로 선우 휴도왕을 따르던 사람들이 경주까지 흘러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라 김 씨의 휴도왕 연관설은 매우 사실에 가깝다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신라 초기의 지명이나 인명의 변동을 살펴보면 터키어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따로 한 번 다루어보겠습니다.

무제는 애써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 후의 만리장성 밖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무제는 헛일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만주에서는 고구려가 일어나고, 백제는 고조선의 옛 땅 요서 지역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건재하고, 만주와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는 바람에, 옛 조선의 땅에 세웠던 한사군도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무너지고 맙니다. 오히려 한사군은 고구려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를 여는 촉매제로 작용합니다. 무제의 바람과는 반대로 된 것이죠. 그리고 그 후에 초원지대와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흉노와 조선의 후예들에게 중국 중원은 끝없이 짓밟히고 맙니다. 고대 유럽과 동북아시아에 거대한 물결을 일으킨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의 시대는 이렇게 끝납니다.

아쉬운 이야기도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겨레의 영혼이 서린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영산으로 섬긴 겨레는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은 대대로 만주에 살았고, 그래서 그들도 백두산을 우리처럼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시조 신화도 백두산 천지에서 비롯합니다. 청나라가 중국을 점령한 뒤로는 만주족들이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만주는 텅 비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나둘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가서 농사짓는 바람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출입금지령을 내려서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정신을 상징하는 영산을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백두산을 우리의 땅으로 생각하는 일이 확립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입니다. 고려 때 잃어버린 땅을 세종이 북쪽으로 확장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경계가 또렷하지 않았던 백두산의 국경을 확정 지으려고 청나라와 협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두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바람에 그것도 무위로 끝났습니다. 그 경계선은 1960년대 주은래의 주도로 북한과 협상 끝에 그어졌고, 국경선이 백두산 천지를 가로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정권의 출발점으로 삼은 북조선이 백두산에 집착을 보인 것은 이런 협상에서 확실한 점유 조건이 되어 국경 협상의 측면으로 보자면 우리 겨레로서는 어쩌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조차도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분개하지만, 사실은 그 정도로 끝난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백두산을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이후 백두산은 우리 강역 밖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여진족을 비롯한 북쪽의 겨레들이 그들의 영산으로 삼았죠. 그래서 백두산을 가리키는 ‘백산(白山)’이라는 이름도 만주족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박달이란 뜻의 백산은 만주족에게 ‘못이 있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즉 만주어로 ‘저수지’는 ‘fakū>pakū’이고, ‘tar(達)’은 만주어로 산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주인이 버리면 그 주인이 쓰던 이름도 버립니다. 백두산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오랜 세월 백두산에 소홀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조선 전역에서 모여든 활량들의 활쏘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일제 패망 전에 마지막으로 열린 대회로, 어렵게 접한 70년 전의 자료(조선궁도회 잡서류철)를 꼼꼼히 살펴보는 도중에 저는 울컥(!) 하며 목이 메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대회 참가 신청서에는 선수들의 간단한 정보가 담겼는데, 거기서 뜻밖의 주소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함경북도 선수로 참가한 웅호정(雄豪亭) 소속의 윤시섭(尹時燮) 접장 주소가 간도성(間島省) 도문가(圖門街)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간도에서 살던 사람들이 서울까지 활쏘기 대회 참가차 다녀가곤 했던 것입니다. 백두산 옆구리에 깃든 도시 도문이 우리에게 이토록 가까웠던 증거입니다. 하지만 불과 70년만에 이런 풍경은 아득한 선사시대의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백두산도 중국령으로 올라 쓰레기나 버리고 온천물에 익은 달걀이나 깨 먹고 돌아오며, 일제 강점기 우리 겨레가 강력한 항일투쟁을 벌였던 백두산의 절반이 중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씁쓸히 확인하는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백두산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었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의 것이 되려면, 우리가 그에 값하는 어떤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고대사를 돌아보며 한 번 더 뼈아프게 느낍니다. 역사에 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백두산은 언제나 우리의 영산이 될 수 없음이 새삼 고대사에서 얻는 교훈입니다.

기자조선이 못내 찜찜하여 한마디 더 하고 갑니다. 앞서 기자조선이 가짜라는 전제로 논의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의 책 『고조선 연구』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윤내현은 원래 상주사(商周史)를 전공한 교수입니다. 즉 중국의 은나라와 주나라를 전공한 동양사 교수였죠. 이 분이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옛 기록을 상주사 연구자로서 논문 한 편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조선 문제를 모두 다루게 되면서 1980~1990년대 고대사 논쟁을 촉발하게 된 것입니다.

윤내현의 연구에 의하면 기자동래설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은주 교체기의 어지러운 시국에 만리장성 밖의 동이족 근거지로 옮겼습니다. 원래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고, 화하족이 세운 주나라로 바뀌자 은나라의 현자이자 재상으로 알려진 기자는 근거지를 옮긴 것입니다. 이들은 만리장성 바로 바깥에 살게 되는데, 그 자리는 단군조선의 통치영역이었고, 그래서 단군의 허락을 얻어서 조선과 중국의 사이 완충지대에 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위만이 중국과 기자조선 사이에 살겠다고 하여 허락을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기자가 살게 된 곳은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나중에 위만이 차지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은 고조선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경입니다. 고조선의 일부일 뿐, 고조선의 몸통은 그보다 더 동쪽의 광활한 지역에 두루 걸쳐있었다는 것이 윤내현의 주장입니다. 주로 중국 측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접한 고조선만을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고조선의 서쪽 변방에 관한 사항만 기록으로 남았고, 그것이 지금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왕조 이름을 기자조선으로 바꾼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것은 실제 사실이기보다는 은나라 사람 ‘기자’와 부리야트 종족 이름 ‘기지’가 서로 비슷한 소리를 지녀서, 그것이 혼종을 이루는 바람에 ‘기지조선’이 ‘기자조선’으로 불린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적어도 중국 측의 사서에서 확인되는 25개 종족이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중국과 항쟁한 그 거대한 나라가 불과 몇천 명 몇만 명이 망명 온다고 해서 제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그들의 이름으로 바꾼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설득력이 없는 일입니다. 이름도 비슷한 데다가 후대에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사대주의 경향이 일반화되면서 은나라 기자의 존재가 부각된 특이한 현상으로 이해됩니다.

이들, 은나라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기자의 후예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중국의 강역이 확대되면서 중국으로 다시 흡수되었는지, 아니면 중국에 대항하여 동쪽으로 조금씩 밀려난 기자조선을 따라서 그들의 일부로 흡수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조선에서 사는 사람들이 기자 얘기를 계속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중국 귀속보다는 조선으로 흘러들어 조선과 함께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수많은 조선의 종족과 뒤섞이며 조선의 일원이 되어간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조선을 배신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면 어떤 식으로든 은나라 기자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남았을 텐데(예컨대 설화나 전설 같은 형식으로.) 그런 것이 없는 점으로 봐서는 조선의 한 부족으로 흡수된 듯합니다. 은나라는 애초에 동이족이었으니, 흡수라는 말은 어쩌면 부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말해야겠죠. 그래도 우리 역사에서 기자조선이라는 이름이 존재하게 하였으니, 그 공은 크게 기억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기자가 아니었다면 부리야트의 기지도 상상하기 힘들었을 터이니.

한편,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고, 은나라는 동이족과 같은 혈통이니, 기자가 처음부터 예맥족으로 분류된 겨레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은나라 백이숙제가 고죽국 사람이고, 고죽국은 ‘고구려’를 표기한 향찰임을 앞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은나라의 기자나 백이숙제나 모두 부리야트 혈통입니다. 백이숙제는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 당하자 그 땅을 떠나지 않고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는데, 기자는 그와 달리 그 땅을 떠났습니다. 은나라 유민들이 주나라를 대하는 태도가 다름에 따라서 그 후의 행동이 서로 갈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기자동래설은 주나라의 통치를 받기 거부한 동이족의 이동과정에서 나타난 이야기를 책봉 관계로 오해하여 만들어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이 정리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민족 구성이나 위치 이동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언어만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마지막으로, 고조선의 직책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고조선은 제정일치 단계의 신정(神政) 사회였습니다. 무당이 곧 임금이던 시절의 사회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삼한으로 오면 제정이 분리됩니다. 통치자는 따로 있고, 무당도 따로 있습니다. 『후한서』 한전에 따르면, 무당이 사는 읍이 따로 있고 이름은 소도이며, 그 읍의 우두머리를 천군이라 불렀다고 나옵니다. 삼한은 고조선의 모습이 잘 간직된 곳입니다. 이 ‘천군(天君)’은 중국어 발음으로 ‘tianjun’인데, 단군(壇君)도 ‘tanjun’이어서 사실상 똑같은 발음으로 들립니다. 중국 측의 기록이기에 한자만 달리 적힌 게 아닌가 싶습니다.(『고조선 연구』)

이런 구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습니다. 시골 동네마다 있는 ‘서낭당, 성황당’이 그것입니다. 이 서낭당도 1년에 한 번씩 동제를 지내는데, 동네에서 인품과 덕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제사장을 삼습니다. 삼한의 소도 기록과 똑같습니다. 이런 풍속이 5,000년 넘게 지속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제정일치 사회는 고대국가로 접어들면서 거의 다 사라집니다. 제사장의 지위가 한 단계 낮아지는 것이죠. 그런 특징의 초기 현상을 삼한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제정일치가 아직까지 이어지는 사회가 일본입니다. 일본의 신도(神道) 신사(神社)가 그것이죠. 아직도 일본 천황이 신사 연합회의 우두머리입니다. 일본이 자랑스러워하는 만세일계는 진화가 덜 된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제정이 아직도 분리가 안 된 것이죠.

『위략』에는 삼한에 ‘우거수(右渠帥)’라는 직책이 나오는데 단군이 통치하던 시절의 작은 나라 통치자를 ‘거수’라고 부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거도 이 우거수의 뜻이었을 겁니다. 저절로 신라의 ‘거서’간이 떠오릅니다. 만주어로 ‘하늘’은 ‘*kese’이고, ‘임금, 우두머리’는 ‘han, khan’입니다. ‘거서간’은 하늘이 내린 왕을 뜻하는 퉁구스어입니다. 그대로 ‘천군(天君)’을 뜻하는데 이로 보면 소도에서는 퉁구스어로 거서간이라고 부르고, 소도 밖 속세에서는 ‘거수’라고 부른 듯합니다. ‘거수’는 ‘기자’와도 비슷합니다. 단군 밑에 기자가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거수 밑에는 ‘박사(博士)’라는 직책도 있었습니다. 중국에도 이와 똑같은 박사가 있었지만, 경전을 읽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와는 다른 말입니다. 이것은 한자로 적혔지만, 우리말입니다. ‘벅수, 박수’인데, ‘박수무당’이라고 아직도 무당 사회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말합니다. 무당이 옛날에 제정일치 사회의 군주이자 무당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박수’를 한자로 적은 것이 博士입니다. 천군, 거수, 박수, 이 모두가 신정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 몽골어로 스승은 ‘baksi’여서 박수의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선인(仙人)이라는 말도 보이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선인은 ‘선비’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선비’의 옛 표기는 ‘션ᄇᆡ’입니다. ‘선, 산, 션’은 ‘사나이(산+나히)’에서 볼 수 있는 말로 사람을 뜻합니다. ‘비’는 ‘방, 뱅이, 보’처럼 사람을 뜻하는 말이죠. 중국에서도 선비를 뜻하는 士는 도끼를 형상화한 상형문자로, 전쟁의 주력군을 뜻하는 말이었고, 실제로 춘추전국시대는 이들이 성장하여 사회의 주 세력이 됩니다. 따라서 ‘선비’는 전쟁을 수행하는 주력군의 구성원을 말합니다. 仙은 소리를 적고, 人은 뜻을 적어서 ‘선비’라고 읽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장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자어 ‘將軍’으로 보는데, 꼭 한자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사무가나 무당들이 섬기는 신들은 대부분 ‘장군’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지읒(ㅈ)과 디귿(ㄷ)은 구개음화로 자주 넘나듭니다. 그러면 ‘댱군’이 되는데, ‘군’을 ‘han, khan’의 표기라고 본다면 ‘댱ᄀᆞᆫ’이 되어 ‘단군’과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장군’은 한자말 ‘將軍’ 때문에 소리가 동화되어 그렇지, 무당을 뜻하는 순우리말 같습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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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와 2023-02-05 18:08:57
슬라브계가 실라입니다. 일본 히라가나는 슬라브계 천자문 약ㅇ식 필기체로 간체를 말합니다.
백제는 태백족을 말하는데 이게 인도 베트남 네팔 티베트 계열로
일본 카다카나는 백제 쿠다가나로 천자문 약식 필기체 즉 간체입니다.
이들을 통하면 그지역으로 판견된 관리들이 쓰던것을
서구열강 앞잡이 노릇한 현재 일본인들 국문으로 서구가 독도=도쿄열도와 함께 하사한것이죠!
잉글리쉬 알파벳은 설총의 이두문자로 단군조(은나라) 단군신화의
호족이 갈려나가며 가지고 나간 언어체계가 라틴어로 슬라브계어
즉 틴라 신라어를 말하며 이들을 복속시키고 박석김이 수령으로 들어가 다스리며 종교지도자로 설총이 들어가 넓부러져 있던 라틴 틴라 문자를 체계화시키고 천자문 음을 집어넣어 체계화시킨게 오늘날 잉글리쉬 알파벳입니다.

유리 2023-01-28 01:32:36
우리는 고조선을 잘모릅니다
고조선의 역사가 남아있지 않기때문입니다

소위
환단고기는
유사사이비이기
때문에
믿을게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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