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구려 1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구려 1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22-고구려1'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2.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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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인의 알타이인문연구 표지.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한나라 무제가 북방의 흉노를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서 어원은 뒷전이고 이제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다 훑어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난감한 사태를 어디서 수습해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흑흑흑.

그런데 지금까지 제 머릿속의 이야기를 가리산지리산 풀어내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또 떠오릅니다.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냐면, 무제의 흉노족 정벌은 그렇다 쳐도, 그 후에 벌어진 수많은 정세 변화 속에서 각궁의 골격처럼 또렷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의 세력 확장이 만리장성을 넘어서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여러 민족은 중국으로 흡수되지만, 유달리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버티는 부족이 하나 눈에 띕니다. 여러분도 눈치채셨나요? 잘 모르겠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단순한 독자로 룰룰랄라 따라오는 분들에게는 이게 잘 안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겨레를 관통하는 한 줄기가 마치 다 분해된 해장국 속의 뼈다귀처럼 버티는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맥족입니다. 이들은 원래 바이칼호숫가에 살다가 청동기를 따라 중국 접경까지 가서 기자조선까지 지배하던 사람들인데, 중국의 동쪽 정벌이 시작되자 악착같이 저항하며 끝없이 동쪽으로 이동합니다.(그 반대 방향 즉 원래 중국에 있던 민족이었으나, 나중에 바이칼로 이동한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데,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음.) 이들의 중국 내 마지막 자취가 북위(386-535)의 공격으로 488년에 촉발된 요서와 진평 사이의 백제이고, 중국과 결사 항전하던 이들은 같은 혈족인 한반도의 백제로 합류하여 끝내 중국화를 거부합니다. 게다가 같은 민족인 고구려도 중국에 계속하여 대항하는 정책을 버리지 않습니다. 제 눈에 띈 것이 바로 이 치열함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걸까요? 예맥이 중국에 대해 이토록 강력하게 저항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의 글을 쭉 읽어오신 분이라면, 이 정도의 질문에 답이 쉽게 나올 듯합니다. 기자조선을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의 지배층은 몽골어를 썼습니다.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는데도 멀뚱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저의 글을 완전히 건성으로 읽어오신 분입니다. 반성해야 합니다. 하하하. 한 무제의 흉노정벌로 인해 터키어를 쓰는 흉노는 서쪽과 동쪽으로 대부분 흩어졌지만, 흉노의 통솔하에 중국의 만리장성 북동쪽에 살던 예맥족은 완전히 고립되어 흉노가 떠난 자리에서 중국과 홀로 대항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흉노의 일부 세력은 여전히 위만조선의 지휘 아래 중국과 대립하는 상황이지만, 무제의 침략으로 이들도 한풀 꺾이자 예맥족은 스스로 나라를 연 것입니다. 그것이 소노부에서 권력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고구려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맥족으로서는 중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터키계인 위만조선을 믿을 수 없게 된 셈이고, 결국은 홀로 서는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고구려가 한사군을 밀어내며 자리 잡아가는 것도 그런 선택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중국 화하족은 원래 황하 북쪽의 사막지대에서 목축 생활을 하다가 양자강과 황하 사이의 너른 들녘으로 슬금슬금 내려와서 자리 잡은 겨레입니다. 주나라 무렵이 되면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고, 그러한 삶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중원’입니다. 무협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중원(中原)이란 양자강과 황하 사이의 비옥한 땅을 말하는 것이고, 이곳에 자리 잡은 역대 왕조의 핵심 근거지는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과 낙양입니다. 이곳을 중심 무대로 역대 중국의 문명은 남북으로 점차 넓히고 펼쳐져 왔습니다. 중국 대도시의 이름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양자강 하구에 있는 대도시 이름은 ‘난징(南京)’이고, 황하 하구에 있는 대도시는 ‘베이징(北京)’입니다. 낙양이나 장안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북한계선의 중심도시가 북경이고 남한계선의 중심도시가 남경입니다.

진나라 때쯤에 이르면 북경에서 조금 더 올라간 곳인 동쪽 끝 갈석산에서 서쪽 고비사막까지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영토 개념이 비로소 자리 잡습니다. 한나라 대에 이르면 영역을 장성 바깥까지 넓히려고 애쓰는데, 그 바깥에 있던 동이족과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원 동남쪽의 넓은 평야 지대에는 옛날부터 동이족이 살았지만, 중국의 화하족이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동이족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귀속되고 동화됩니다.

이런 현상은 중국이 동이족을 흡수하는 방향으로도 이어지지만, 그 반대로 동이족들이 강력한 왕조를 세워서 중국으로 들어가 주인노릇하는 방향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왕조가 동북아의 초원지대에서 일어나서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중국으로 흡수되고 말죠. 원나라도 세계를 지배할 만큼 강대했지만, 중국에 안주함으로써 혈통까지 동화되어 극소수만이 초원지대로 돌아갑니다. 그 뒤로 다시는 못 일어나고 말죠. 청나라도 처음엔 민족 분리 정책을 쓰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중국화 되어 지금은 여진족을 찾아보기도 없습니다. 중국은 만리장성 너머의 수많은 백성과 왕조로 수혈을 받으며 거꾸로 그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중원에 왕조를 세웠던 모든 겨레의 내력을 정리하여 역사를 만들고 이름을 ‘25사’라고 붙였습니다. 이 ‘25’사가 중국 역사의 줄기입니다. 요즘 발빠르게 진행되는 동북공정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스스로 허무는 행위임을 이 ‘25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 『황제의 여인』을 보면 순치제가 미복 잠행에 나섰다가 강남에서 한족 미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을 궁으로 데려와서 벌어지는 소란이 이 드라마의 주제인데, 한족 여인과 혼인할 수 없다는 청 황실의 내부 원칙과 현실에서 벌어진 애틋한 사랑 사이의 갈등이 잘 드러납니다. 순치제의 강한 반발로 결국 이 여인을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이 문제는 만주족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는 만한 혼인을 허용함으로써 만주족이 한족에 흡수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로 이런 동화 현상 때문에 앞서 알아본 예맥족의 치열한 저항은 아주 독특한 현상으로 저의 눈에 띈 것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중국에 섞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의 처절한 행동과 저항은, 오랜 뿌리가 있던 것임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알아본 대로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와 조나라는 조상이 같고, 이들은 주르친(珠里眞)이었습니다. 즉 퉁구스계열이었다는 말입니다. 단군조선도 퉁구스어를 썼죠. 그렇다면 사건의 내막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10,000년 전의 적봉과 홍산 지역에서 석기시대 왕조인 단군조선이 서는데, 소빙하기로 그곳의 환경이 황폐해지면서 이들 세력의 일부가 기원전 1,600년 무렵 황하 유역으로 옮겨서 치앙(商) 나라를 세웠고, 따라서 은나라의 지배층은 단군과 같은 주르친 계열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보며 따라가는 고구려는 몽골어를 쓴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르친 계열이 은나라 때 지배층 노릇을 하다가 주나라에게 망하고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 그 후예들이 진나라와 조나라를 세웁니다. 반면에 그들보다 더 동쪽에 있는 연나라와 제나라에서는 기자의 자취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북서쪽은 주르친 계열의 제후국이 들어서고, 중국의 북동쪽과 동쪽에는 몽골어 계열의 제후국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지배층이었던 주르친 계열의 밑에서 살던 몽골어 계열이 독립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 은주 교체기 이후의 변화양상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발해만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중국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저항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데,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연나라와 제나라로 자리 잡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오랑캐’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본모습을 지키려고 합니다. 중국의 제후국이 힘을 얻으며 자리 잡을수록 이들은 근거지를 빼앗기고 자리를 옮기게 되죠. 이런 상황이 부리야트를 비롯하여 고구려 같은 몽골어 쓰는 사람들이 끝없이 저항하며 이동하게 된 원인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렇게 언어의 계열만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퉁구스어를 쓴 사람들도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동쪽으로 끝없이 함께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진국(辰國)을 거쳐 신라(新羅)에 이르는 박혁거세 세력이 이런 이들을 대표합니다. 또 흉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터키어 계열의 부족도 있죠. 이런 역사변화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그것을 주도한 세력 분포가 몽골어를 쓴 사람들이 역사의 주요 사건에서 도드라지기에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중에서 우리가 역사기록에서 접할 수 있는 사건의 중대한 변곡점은 한나라 무제의 흉노정벌이 아닐까 하는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셈입니다. 뭐 역사학자들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하는 수 없지만, 문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이런 상상이 즐거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얘기를 했는데도 예맥족이 몽골족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치실 분들이 또 있을 듯하여, 고구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의 통치구조는 흉노와 똑 닮았습니다. 고구려 얘기를 하기 전에 고구려의 일파가 한강가로 와서 세운 백제 얘기를 하는 게 더 낫겠습니다. 백제의 정치체제는 5부제라는 것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중앙은 왕이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동서남북에는 각기 해당하는 부(部)를 두어서 독립된 형태로 운영되었고, 이것은 예하 조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직은 흉노의 것이었습니다. 흉노는 선우의 지휘로 전투에 임할 때 각기 소속에 따라 오방기(청황적백흑)를 휘날리면 등장했습니다.(『알타이 인문 연구』) 색깔만 보면 어디 소속인지 금방 알게 되는 체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대로 백제에 적용된 것입니다. 백제의 지배층이 터키어(비류계)와 몽골어(온조계)를 쓴 연합정권이었기에 당연한 현상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동서남북과 중앙이라고 말을 하지만, 과연 당시 백제사람들도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예컨대, “너는 어디 사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동부에 사는 누구다.”라고 대답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동부니, 서부니, 남부니, 북부니 하는 말들은 『삼국사기』를 기록한 사람들의 용어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려 시대의 유학자들이죠. 그 대표자가 김부식이라는 건 우리가 학교에서 잘 배워서 압니다. 하지만 몽골어를 쓰는 백제 지배층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백제 지배층은 몽골어로 자신이 속한 각 부의 명칭을 불렀겠지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모르겠다고요?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거나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죠. 저도 학교 교육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찾아내고 상상한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돌려보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문제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으니, 고구려를 들여다보면 백제 지배층이 쓰던 말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도 백제와 똑같이 5부제로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여는 4출도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중앙을 뺀 나머지를 말합니다. 그것도 윷말에 있는 용어를 그대로 썼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이걸 우리말로 바꿔볼까요? 말한, 쇠한, 돝한, 개한. 이 말도 처음 보죠? 이런 상상을 한 번도 안 해보셨죠? 그게 바로 여러분(!)입니다. 저는 문학도라서 혼자 이런 생각 많이 해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지 40여 년만에 이 자리에 슬그머니 털어놓는 겁니다. 하하하. 중앙의 왕은 무슨 한일까요? ‘걸한’이죠.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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