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려 1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려 1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32-고려 1’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4.2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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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태조세가 부분.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고려사 태조세가 부분.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발해를 샅샅이 파헤쳐본 마당에, 고려를 빼고 지나가면 서운하겠죠?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혈통도 또렷하지 않습니다. 고려 초기의 혈통은 발해처럼 오리무중입니다. 알려진 게 별로 없습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개성에 대대로 산 호족으로 알려졌는데, 아버지는 용건이고 할아버지는 작제건이어서 성이 다르고 이름이 같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인물이 나중에 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의 내력은 신화로 꾸며졌습니다. 이런 흐리멍덩한 혈통에 대한 의심은 당시에도 있었는지, 왕 씨의 내력을 이제현이 직접 설명하여 정리하기도 했습니다.(고려사-고려세계-이제현의 찬)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하기를, “김관의(金寬毅)가 쓰기를, ‘성골장군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 보육을 낳으니 이 분이 국조 원덕(元德) 대왕이다. 보육이 딸을 낳으니 당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의 배필이 되어 의조(懿祖)를 낳고 의조가 세조를 낳고 세조가 태조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당나라의 귀인이라고 한 이는 의조에게는 황고(皇考)가 되고 보육은 황고의 장인이 된다. 그런데도 국조라고 일컫는 것은 어째서인가?”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태조가 3대의 조상과 그 후비를 추존하여 아버지를 세조 위무(威武) 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를 위숙(威肅) 왕후라 하였으며, 할아버지를 의조(懿祖) 경강(景康) 대왕이라 하고 할머니를 원창(元昌) 왕후라 하였으며, 증조할머니를 정화(貞和) 왕후라 하고 증조할머니의 아버지 보육을 국조 원덕(元德) 대왕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증조를 빠트린 대신 증조할머니의 아버지를 써넣어 삼대 조고(祖考)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살펴보건대, ‘국조는 태조의 증조이고 정화왕후는 국조의 비이다.’라고 하였으며, 『성원록(聖源錄)』에 이르기를, ‘보육 성인(聖人)은 원덕대왕의 외할아버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서 보건대 원덕대왕은 당의 귀한 가문 사람의 아들로서 의조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정화왕후는 보육의 외손부로서 의조에게는 비가 된다. 그러니 보육을 국조 원덕대왕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말하기를, ‘의조가 중국인 아버지[唐父]가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받은 바, 바다를 건너 멀리 가서 (아버지를) 뵈려 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곧 그 뜻이 매우 절실하였을 텐데도 용왕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묻자 곧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구하였다고 하였다. 의조는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성원록(姓源錄)』에 이르기를, ‘흔강(昕康) 대왕【곧 의조】의 처인 용녀는 평주(平州) 사람인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고 하였으니 곧 김관의가 기록한 바의 것과는 다르다.”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말하기를, ‘도선(道詵)이 송악 남쪽에 있는 세조의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을 심을 밭에 마를 심었구나.」라고 하였는데 기장은 왕(王)과 우리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런 까닭에 태조께서는 이로 인해 왕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들이 그 성을 고쳤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아! 우리 태조께서 이것을 하였다고 여기는가? 또 태조와 세조께서는 궁예 밑에서 벼슬하였다. 궁예는 의심과 시기가 많았는데 태조께서 아무 까닭 없이 홀로 왕씨를 성으로 삼았다면 어찌 화를 얻는 길이 아니었으랴? 삼가 『왕씨종족기』를 살펴보니 국조의 성이 왕씨라 하였다. 그렇다면 곧 태조에 이르러 비로소 왕을 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기장을 심는다는 이야기도 또한 거짓이 아니리오? (김관의는) 또 말하기를, ‘의조와 세조 휘의 아래 글자가 태조의 휘와 더불어 나란히 같다.’고 하였다. 김관의는 개국하기 전에는 풍속이 순박함을 숭상하여 혹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까닭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왕대력(王代曆)』에는, 의조께서 6예에 통달하였고 글씨와 활쏘기가 당대에 신묘하게 빼어났으며, 세조께서는 젊은 시절 재주와 도량을 쌓아 삼한에 웅거할 뜻을 지녔다고 하였다. 어찌 할아버지의 이름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삼으며 또 아들의 이름으로까지 삼았겠는가? 하물며 태조께서는 창업하여 왕통을 전함에 있어, 행동거지를 선왕을 본받았는데 어찌 부득이하게 편안히 예에 어긋난 이름을 지었겠는가? 삼가 신라 때를 생각하건대, 그 임금을 마립간이라 부르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대아간(大阿干)이라 불렀으며 시골 백성들에 이르러서도 으레 간(干)을 이름에 붙여 불렀으니 대개 서로 높이는 말이다. 아간을 혹 아찬(阿粲)·알찬(閼餐)이라고 한 것도 간·찬(粲)·찬(餐) 3자(字)의 소리와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의조와 세조 휘의 아래 글자도 또한 간·찬(粲)·찬(餐)의 소리와 더불어 서로 가까우니 이는 이른바 서로 높이는 말을 그 이름에 이어 붙여 부른 것이 바뀐 것이지 이름은 아니다. 태조께서 마침 이 글자를 이름으로 삼았기에 호사가들이 드디어 끌어 붙여다가 만들어 말하기를, ‘3대가 같은 이름이면 반드시 삼한의 왕이 된다.’ 하였을 터이니 대개 믿을 수 없다.”라 하였다.

고려의 혈통에 중요한 인물 ‘두은점 각간’에 대해서는 전원철의 책에 나오니 거기서 자세히 보시고, 여기서는 요약만 하겠습니다. ‘두은점(豆恩坫) 각간’은 부리야트어 ‘토곤 테무르 칸’을 적은 향찰 표기입니다. ‘豆恩’의 옛 발음이 ‘토곤’이고, ‘坫’은 테무르의 ‘템’을 적은 것입니다. ‘점’과 ‘템’은 뒷날 일어난 구개음화 현상이고, 끝 받침은 생략된 것이죠. ‘각간’은 신라의 고위직을 나타내는 말이니 ‘칸’을 적은 것입니다. 豆恩坫 角干=토곤 테무르 칸.

또! 또! 또! 반박하려고 혀를 움찔거리는 분들에게 경고합니다. 저한테 말하지 마시고, 전원철의 책을 읽은 다음에, 전원철에게 항의하십시오. 저는 저에게 필요한 내용만 뽑아낸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전원철의 주장이 확실히 맞습니다. 음운의 변천 과정이나 상호 작용을 검토해보아도 전원철의 주장은 오류가 없습니다. 아마도 반박하시기 꽤 힘들 겁니다. 한 번 해보시죠. 제대로 된 반박이라면 뭔가 위대한 업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괜히 남 욕하느라 시간 허비하지 마시고, 뜻깊은 일에 에너지를 쏟아부어 역사에 길이 이름 남기시기 바랍니다.

도선국사 얘기가 나옵니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를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그가 ‘기장 심을 곳에 마를 심었구나’라고 탄식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장’은 식물이 아닙니다. 비유일 뿐이죠. 왕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기장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만리장성 안의 영정하 말이죠. 영정하의 영정(永定)이 바로 ‘기장’의 향찰 표기라고 했습니다. ‘깆+앙’의 짜임으로 ‘앙’은 ‘마당, 봉당’ 같은 말에서 보듯이 접미사이고, ‘깆, 긷, 깃’이 기자(箕子)와 같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기장’은 왕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1575년의 광주 천자문에 ‘王: 긔ᄌᆞ 왕’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현자의 이름이 아니라 왕을 뜻하는 우리 말이라고 했고,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고려에서는 흔히 쓰던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서 먹던 떡 중에 ‘기정 떡’이 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기주 떡’이라고 했는데, 전라도에서는 ‘기정 떡’이라고 합니다.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서 발표시키면 ‘술떡’이 되는데, 쌀가루로 하면 이게 뽀얗게 부풀면서 빛깔 고운 고급스러운 떡이 됩니다. 여기다가 참기름을 살짝 바르면 마치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것을 ‘기주, 기정’이라고 합니다. 잔칫집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말하자면 잔칫상에서 귀족 대접을 받은 떡입니다. 이 떡의 이름이 ‘기주, 기정’인 것을 보면 어근 ‘깆’이 ‘기자(箕子), 기정(永定)’의 어근처럼 왕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잔칫상의 왕이 바로 ‘기주, 기정’입니다.

기장은 ‘영정하’에서 보듯이 오랜 내력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의 자취는 발해에서도 볼 수 있죠. ‘걸’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箕子=기장=긔ᄌᆞ=기정=기주=乞=大=王=龍=帝’ 이런 맥락으로 보면 왕건은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혈통이 분명하죠. 발해의 대조영도 걸걸중상도 모두 발해의 왕족이고 고구려의 후손을 뜻하는 말인데, 이점은 고려의 창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건의 아버지는 용건이고 할아버지는 작제건입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3대에 걸친 이름이 같다는 것입니다. 모두 ‘건’입니다. 이름이 같고 성이 다른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위의 기록에서도 “삼가 신라 때를 생각건대, (중략) 시골 백성들에 이르러서도 으레 간(干)을 이름에 붙여 불렀으니 대개 서로 높이는 말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설화에서는 3건이 지나야 왕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건’이란 말의 뜻을 잘 모르게 되면서 갖다 붙인 합리화죠.

‘건’은 이름이 아니라 그 집안의 벼슬 이름일 것입니다. ‘건’은 위의 인용문에도 나오듯이 신라 벼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직 이름입니다. ‘아찬, 대아찬’의 ‘찬’, ‘각간’의 ‘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북방 민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칸, 간, 한’의 변형된 소리입니다. 따라서 왕건 용건 작제건의 ‘건’은 그 소리에 맞는 어떤 벼슬을 한 집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기장’이 되는데, 기장은 왕을 뜻하는 우리말이므로 왕건이 왕이 된 뒤에 덧붙은 말일 것입니다. 왕건의 집터를 두고 도선국사가 기장 심을 터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왕건 집안을 ‘기장 댁’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기장이 곡식 이름과 같아서 왕이라는 뜻을 감추는 효과를 냈을 것입니다.

왕은 용으로도 표현합니다. 따라서 ‘帝=龍=王’은 같은 말입니다. ‘帝建=龍建=王建’이죠. 帝 앞에 작(作)이 붙은 것은 할아버지 때부터 왕이 되었거나 추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건’은 신라의 관직명일 것인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말이 붙었으니, 나중에 고려의 왕이 된 신라 출신의 벼슬아치를 뜻합니다.

유래가 불분명한 왕족들이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것이 지렁이 설화입니다. 처녀가 애를 뱄는데 남자가 밤마다 와서 자고 가죠. 몰래 옷에다가 실을 꿰어 놓고 날이 밝았을 때 실을 따라 가보니 그 끝에 지렁이가 꿰이어 죽었다는 이야기죠. 궁예도 이런 출신입니다. 이런 것은 어떤 위대한 인물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 위대성을 다른 존재에 가탁하여 신비화하려는 발상입니다. 신화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표현법입니다. 하필 지렁이인 것은, 지렁이가 땅의 정기를 받은 존재라는 뜻이고, 또 지룡(地龍)과 소리가 같아서 그렇게 연결한 통속어원설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와 비슷한 존재가 또한 용인데, 용은 뱀을 이상화한 동물입니다. 뱀을 대표하는 말은 ‘구렁이’죠. 접미사 ‘이’를 빼면 ‘구렁’만 남는데, ‘굴+엉’의 짜임이죠. ‘엉’은 접미사이니, 의미를 지닌 말은 ‘굴’입니다. 이제 앞서 살펴본 ‘걸, ᄀᆞᄅᆞ, 가리, 클’과 같은 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영정하(永定河)에서 본 ‘영정’이 바로 ‘구렁’이고 ‘기장’입니다. 우리말 구렁이에 가탁하여 통속어원설이 작동된 것입니다. 용은 ‘구렁’이고, ‘(용)가리’이고, 미르(마루, 宗)이며, ‘乞(클)’이고, 대(大, 한)이고, 찬(粲)이고, 간(干)입니다. 그가 바로 ‘작제, 용, 왕’이 붙은 ‘건(健)’이라는 인물입니다. 여기다가 나중에 고려가 선 뒤에 옛날 일을 전하는 사람들이 ‘고려(고리, 구리, 계루)’ 발음을 ‘구렁’과 동일시해서 역시 같은 내용을 덧붙인 것입니다. 서해 용왕 설화를 잠시 보겠습니다.

선종은 한 달 동안 머무르다가 진의가 임신하자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며 활과 화살을 주고 당으로 돌아갔다. 뒤에 아들을 낳아서 작제건이라 하였다. 작제건은 총명하고 용맹하였으며 서예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5,6세 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16세에 아버지가 남겨 준 활과 화살을 받고서 기뻐하며 이를 쏘니 백발백중인지라 사람들이 신궁이라 하였다.

아버지를 찾아서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날이 흐려 3일 동안 나아가지 못하는데 뱃사람들이 점을 쳐서 "고려 사람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작제건이 활과 화살을 잡고 바다로 뛰어내리자 밑에 바위가 있어 그 위에 설 수 있었다. 그러자 안개가 개고 순풍이 불어 배가 떠났다. 이윽고 서해 용왕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부처의 상을 한 여우가 자기를 못살게 구니 활로 물리쳐 달라고 하였다. 과연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며 부처의 상을 한 자가 나타나기에 주저하다가 쏘았더니 늙은 여우가 떨어져 죽었다. 서해 용왕이 감사하며 소원을 묻자 작제건은 장차 동쪽 나라의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에 용왕은 그대의 자손 삼건을 기다려야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다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작제건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용왕의 맏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용궁에서 나올 때에 용녀의 말을 듣고 용왕으로부터 칠보 외에 돼지를 얻어서 돌아왔다.

작제건이 돌아오자, 작제건이 용녀에게 장가들고 돌아왔다며 경사로 여기고, 네 주와 세 현의 사람들이 성을 쌓아 궁실을 지어 주었다. 일 년이 되어도 돼지가 우리에 들어가지 않아서 이상하게 여겨 놓아두었더니, 송악 남쪽 기슭 옛 강충의 거처에 자리를 잡으므로 거기에 집을 지었다. 그래서 영안성과 송악을 왕래하며 30년을 살았는데, 용녀는 침실의 창밖에다 우물을 파고 우물을 통해 서해 용궁을 왕래하였다. 작제건이 용녀의 당부를 어기고 몰래 그 광경을 엿보니, 용녀는 우물에 들어가 황룡으로 변하여 오색구름을 일으키며 용궁으로 사라졌다. 용궁에서 돌아온 용녀는 부부의 신의를 지키지 않은 작제건을 원망하며 다시 용이 되어 우물에 들어가 버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속리산 장갑사에 들어가 독경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뒤에 추존하여 경강대왕이라 하고 용녀를 원창왕후라 하였다.

설화에서 3건을 지나야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작제건 용건 왕건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왕건은, 사람 이름이 아니고 그를 사람들이 부른 호칭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죠. 왕건은 발해와 같은 핏줄을 받은 사람으로, 고구려의 혈통이며 조상은 주몽입니다. 신라 시절에 자신의 혈통을 숨기고 있다가 신라가 망하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용 신화를 앞세워 귀족으로 나섰고, 지도력을 발휘하여 왕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서해 용왕이 과연 누굴까요? 우리나라에서 서쪽에 있는 바다는 황해이고 발해입니다. 나라 발해를 기준으로 서쪽 바다라면 서해가 아니라 바다 발해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하죠. 나라 이름이 발해인데, 그 이름이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바다를 가리키는 이름이니, 서해 용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서해란 바다가 아니라 ‘발해’라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용왕이란 그 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해 용왕은 발해의 왕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왕건은 발해의 왕족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발해의 왕족은 고구려 혈통이니, 왕건 또한 발해와 같은 혈통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지은 것도 이유는 똑같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진 고구려의 혈통 왕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역사학에서는 혈통에 관한 이런 주장이 왜 없었을까요? 유물이나 문서만 의지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고려 왕건의 혈통이 이렇게 또렷합니다. 고려가 말로만 고구려를 이은 게 아니라 분명한 근거와 의지로 왕통을 이었음이 확인되죠. 여기서 뭘 더 입증해 드려야 역사학자들께서 믿으실까요? 언어학을 전공한 제가 보기에, 한국의 역사학은 너무 편협한 학문입니다. 주변 학문에서 들이대는 자료나 증거조차 믿지 못합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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