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프리즘] 은행나무에 관한 상념
[시사프리즘] 은행나무에 관한 상념
  • 이홍준
  • 승인 2015.06.22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홍준 세종특별자치시의회 운영전문위원

[굿모닝충청 이홍준 세종특별자치시의회 운영전문위원] 바람이 건듯 부니 푸르른 나무들이 부스스 몸서리를 친다. 출근길에 옛청사가 되어버린 시청 앞뜰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 왔다. 잠시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몇 그루가 더 자리잡고 있다. 3년여 다니면서도 은행나무가 있는지 몰랐다. 라기 보다는 관심이 없었다. 평소 나무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어지간히 무심했던게 사실이다. 문득 은행나무에 대한 광화문에서의 지난 날이 떠올랐다.

광화문 청사에서
2000년초 광화문 청사에 근무할 때 같은 부서에 나이가 지긋하신 계장님이 있었다. 이분은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만 존재하는 관보(官報) 업무였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관보게재 요청과 관련해 신청 시기, 절차, 방법 등이 손톱만큼의 하자가 있거나 청탁이 있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거나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고는 걸쭉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보니 직원은 물론 부서장도 난감하기가 일쑤였고 타 부서 직원들도 마뜩잖게 여기고 멀리했다.

나는 당시 서무 역할을 하는 처지라 맡은 업무 외에도 소소한 것들을 챙겨야만 했다. 그런 일들을 말없이 처리하는 모습이 그닥 밉지 않아 보였는지 살갑게 대했다. 무시로 막걸리에 홍탁이 최고라며 한 잔 산다거나, 삼겹살에 소주 한 잔하자거나, 맥주에 통닭이 최고라며 꼬드겼다. 거부라도 하면 다른 거라도 뭐 한 가지는 꼭 해 준다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해 가을의 끄트머리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청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내리자 달갑지 않은 냄새가 후욱 다가왔다. 코를 막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 분은 런닝셔츠만 입은 초췌한 모습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기며 한 손에 든 우유 팩을 건넸다. 윗면이 개봉된 우유 팩에는 막 허물 벗은 은행 열매가 소복히 담겨 있었다. 그 분은 전 날 집에 들어가지 않고 광화문 주변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 사무실에서 밤새 은행을 깠던 것이다. 그날 내내 100여미터 길이의 14층 복도는 물론 계단을 타고 위아래 층으로 냄새가 진동했다.

영원한 은행나무처럼
은행나무는 약 2억 년 전에 탄생한 인류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수목이다. 지구상에서 1과 1속 1종으로 20년 이상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 씨를 심어 손자를 볼 나이에 열매를 맺는다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은행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고 병충해에 강해 옛부터 사찰 등에 주로 심어졌고 아름다운 관상수로도 그 몫을 톡톡히 한다.

잎은 부채꼴처럼 생겨 활엽수라고도 하고 자세히 보면 바늘을 겹겹이 붙여 놓은 모양으로 침엽수라고 한다. 그러나 분류학자들은 침엽수도 활엽수도 아니라고 말한다. 열매는 노란 빛을 띤 살구 모양의 씨로 양복 소매단추 크기에 악취 나는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 잎과 열매는 약용으로도 쓰이며 혈행을 개선하고 폐와 위를 좋게 하며 피부병이나 고혈압 등 실로 다양하게 쓰인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려 이전에 들여온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에는 천년이상을 살아 온 은행나무가 있다. 초입에 들어서면 좌측에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우람하거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고한 자태에서 신비함을 느낀다.

은행나무는 광화문 대로변 양측과 정부서울청사를 둘러싸고 심어져 있다. 시청에서부터, 덕수궁, 경희궁, 세종문화회관 주변은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절정을 뽐낸다. 가을 저녁이면 노란색 가로등이 되기도 하고 연인의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잡게 한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그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황금빛 가득한 인생을 꿈꾸었을까?

하지만, 겨울녘에 들어서면 은행알의 고약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 올라 행인들의 코를 틀어막게 한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과 짓이겨진 은행 열매를 요리조리 피하는 걸음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이는 서울이라는 도시 한복판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잠시 숨돌리고 가을을 음미하며 천천히 살아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치원에 남아 있는 청사는 진작부터 활용계획이 마련되어 주변의 우려는 해소되겠지만 많게는 삼십년 이상 공직생활을 한 분들에게는 인생의 절정을 보낸 장소에 대한 상념이 들 것이다. 특히 세종시를 만들어 내는데 마음을 모으고 조치원에서 생업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는 회환마저 들 것이다.

모든 것은 생즉멸 멸즉생(生卽滅 滅卽生)이다. 조치원 청사에 남아 있는 은행나무는 전에도 그래왔듯이 수많은 것들을 나이테에 켜켜이 채우고 변화, 그 새로워짐을 말없이 지켜 볼 것이다. 영원함과 곧은 기상의 상징인 은행나무처럼 새 청사와 여기 이 청사도 그 긴 생명력을 이어받길 기대해 본다.
사족 : 몇 년 전 청계산의 숲 속에서 들려오는 아주 낯익은 욕설을 듣고 산아래 ㅇㅇ은행나무 식당에서 막걸리에 묵무침을 먹으며 그 분의 장수를 빌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