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상고사] 한사군의 이름 5
[정진명의 어원상고사] 한사군의 이름 5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43-한사군의 이름 5’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7.06 0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북아역사넷의 '해국' 부분 캡처.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한사군의 명칭에 대한 저의 의견은 ‘아님 말고!’식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기 바랍니다. 훗날 혹시 몰라서 힌트라도 될까 하여 적어두는 겁니다. 고조선의 역사를 적는 학자분들의 의견은 거의가 ‘아님 말고!’식이니, 이런 의견을 내는 저라고 해서 딱히 부끄러워할 의무는 없는 듯합니다. 하다 하다 안 될 때 끌어다 쓰는 귀퉁이 의견으로 족합니다. 

한사군 때문에 『신오대사(新五代史)』를 부분부분 읽다 보니 알타이 말붙이(語群)의 후예들이 나타나서 흥미를 끕니다. 이들 부족에 대한 기록을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거란(契丹)은 후위(後魏) 이래로 이름이 중국(측 사서)에 보인다. 때로 고막해(庫莫奚[kʰomuakɡʰieɡ])와는 같은 (夷狄의) 부류(同類)이나 (혈연 상으로는) 다른 종족(異種)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살던 곳을 효라개몰리(梟羅箇沒里)라고 말한다. 몰리(沒里)는 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황수(黃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을 이르는 것으로 선비의 옛 땅을 획득한 것이라 예로부터 또한 선비의 남겨진 무리(遺種)라고 말했다. 당대(唐代)에 그(들이 살던) 땅은 북쪽으로 실위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고려와 인접했고 서쪽으로는 해국(奚國)과 이웃했고 남쪽으로는 (당의) 영주에 이르렀다.”

거란은 중국과 요동의 북부 지역을 넓게 차지하면서 발해를 무너뜨리고 요나라를 세웠습니다. 여기서는 황수라고 나오는데, 요하의 상류를 말합니다. 요하는 중국의 북쪽 사막지대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기역 자로 꺾여서 남쪽으로 내려가 발해로 들어갑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 흐르는 요하 상류의 이 강물을 황수(黃水)라고 하고 몽골어로 시라무렌(Šira Mören)이라고 하는데, ‘시라’가 노랗다는 뜻이어서 그렇게 적은 것입니다. 효라개몰리의 위치가 이 황수의 남쪽이라고 합니다. 효라개몰리의 ‘몰리’가 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로 우리말 ‘물’입니다. 용을 ‘미리, 미르’라고 하는 우리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용도 ‘물’의 뜻이죠.

그리고 그 효라개몰리 남쪽에는 황룡이 있습니다. 구글 지도를 보면 시라무렌 남쪽으로는 적봉시가 있고, 적봉시 동쪽으로는 요하 상류의 지류가 북쪽으로 흘러 시라무렌으로 합류합니다. 그러니 효라개몰리는 요하 상류의 이 지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황룡은 이 지류의 동남쪽 지역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황룡국이 등장합니다. 2대 유리 왕의 태자 해명(解明)이 황룡국 사자가 선물로 준 강궁을 당겨서 부러뜨려 그들의 기세를 눌러버리는 장면이 있죠. 그러니까 고구려에 온 황룡국의 사자는 효라개몰리 남쪽에 살던 거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란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고조선을 구성하던 한 부족입니다.

 “해(奚, [ɡʰieɡ])는 본래 흉노의 별종이다. 당나라 말에 음량천(陰涼川)에 살았는데 (그곳은) 영주 관아의 서쪽, 유주의 서남쪽에서 모두 수백 리 (떨어졌)다. (그들에게는) 인마 이만 기(騎)가 있었다. (무리를) 5부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아회부(阿薈部), 두 번째는 철미부(啜米部), 세 번째는 오질부(粵質部), 네 번째는 노개부(奴皆部), 다섯 번째는 흑흘지부(黑訖支部)라 하였다. 후에 비파천(琵琶川)으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유주에서 동북쪽으로 수백 리 (떨어져 있었)다. 그 땅에는 검은색 양이 많았고 말은 앞 발톱이 단단해 달리기를 잘했고 그것들이 산에 올라 짐승을 쫓아다니면 아래위로 (달리는 모습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앞부분에서 거란을 ‘고막해’와 같은 부류이나 혈연 상으로는 다르다고 설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몽골어를 쓰는 종족과 터키어를 쓰는 종족이 뒤섞여 살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래서 거란을 ‘해’의 일부로 보고 앞에 꾸밈말을 넣어서 ‘고막해’라고 한 것입니다. ‘해’는 터키어를 썼는데, 그의 일부로 섞여 살던 ‘고막해’는 몽골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초원지대에서 생존을 목표로 협력하던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거란의 세력이 커지면서 독립하여 나중에 요나라를 세우는 강성한 부족이 되죠.

‘해’가 5부로 나누었다는 것이 보이죠? 흉노의 일파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부족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5부 통치구조도 이것의 연장선입니다. 마치 판박이를 보는 듯합니다.

흉노의 지배층은 터키어를 썼으니, 위의 다섯 무리에 관한 말을 터키어와 대조해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터키어로 중앙은 ‘özek’입니다. 오질(粵質[jiuɑtȶi>yuèzhì])과 정확히 대응합니다. 터키어로 뒤는 ‘geri’인데, 철미부(啜米[tjuædmiei>chuomǐ])에 대응합니다. 노개(奴皆[nuokăi>nújiē])는 정면을 뜻하는 터키어 ‘yüz’와 대응하죠. ‘nu’의 n이 탈락하면서 반모음화한 겁니다. 아회(阿薈[ɑtsəŋ])는 터키어 ‘Alçak(낮은 곳)’와 대응하고, 흑흘지(黑訖支[xəkki̯əttɕie̯])는 터키어 ‘Yüksek(높은 곳)’과 대응합니다. 좌우를 높이에 따라 다르게 대접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형이나 지위에 따라서 높낮이로 구분된 듯합니다. 

참고로 한사군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말들이 많은데, 한국 역사학은 이에 관해 단재 신채호의 학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못 나갔다는 느낌입니다. 단재 신채호의 학설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신채호의 경우, 그의 여러 저서들에 나타난 한사군론은 일정하지 않으나, 뒷날 그의 주장이 정립되었을 때에 그는 '한사군의 반도 밖 설치설' 내지는 '한사군을 실제로는 설치하지 않았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한사군이 실제로는 설치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어느 지역에 어떤 군현을 설치할 것이라고 계획만 세운, 일종의 '지도상의 설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한군현 허치설'인 셈인데, 이 주장보다는 '한반도 밖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한반도 밖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위만조선의 수도와 강역이 지금의 요하 하류 지역에 있었으니,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세워진 한사군은 요하 하류 지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한사군의 존재와 겹치는 시기에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평양과 그 부근에는 최 씨가 다스리는 낙랑국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 한군현 즉 낙랑군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단재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대무신왕 기록에 그의 아들 호동과 낙랑국왕 최리의 딸의 혼인 관계 기사를 제시한다. 덧붙이는 것은, 신채호가 '한사군의 한반도 밖 설치'를 내세우면서 그 세력이 지극히 보잘것없는 '교치설'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이만열, ‘역사문화산책’에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을 다음처럼 배치했습니다. 즉 지금의 평양 일대에 낙랑군을 놓고, 그 밑(황해도)에다가 진번을 놓고, 도ᇰ쪽(강원도 함경도)에다가 임둔을 놓고, 그 북쪽에다가 현도를 놓았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대방은 현도의 동쪽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만강 건너 사할린쯤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엉뚱하게 황해도에 있다고 합니다. 환장할 일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은 『사기』의 기록을 무시하고 한사군을 어떻게든 한반도 안에다가 우겨넣으려고 용을 썼습니다. 학자의 양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제국주의의 시녀나 똘마니 노릇을 자처했습니다. 이익을 위해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본인들의 이런 특성을 우리나라 백성들은 ‘쪽발이’라고 콕(!) 찍어 불렀습니다. ‘쪽’은 반이라는 뜻이고, ‘바리’는 사람을 뜻하는 아이누어입니다. ‘비바리, 냉바리, 학삐리, 발바리, 군바리’ 같은 말에 있죠. ‘쪽’을 게다짝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 구실을 반쪽밖에 못 한다는 뜻이 더 맞습니다. 일본 어용학자를 탓하기 전에, 문학도인 제가 보기엔, 역사학이 원래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이 쓴 『사기』를 정확히 읽으면 우리가 배운 역사 지식과는 사뭇 다른 사실이 드러납니다. 특히 한사군의 위치는 아주 또렷하게 드러나죠. 지금까지 『사기』를 번역한 분들의 논리에 성실하게 따라서 정리한 저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위만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요하에 있었으니, 거기가 낙랑이고, 낙랑의 왼쪽에 진번이 있어야 하고, 낙랑의 동북쪽 즉 지금의 서만주에 현도가 있어야 하고, 현도의 왼쪽 그러니까 진번과 현도 사이에 임둔이 있어야 합니다. 조선이 망한 뒤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 무제가 ‘생각’했겠죠. 그것이 ‘허치설’입니다. 만약에 실제로 설치했다고 해도 이렇게 배치되어야 합니다. 이때도 한반도에는 삼한이 있었습니다. 삼한이 한사군에 포함되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이렇게 허술하게 설치된 한사군에 대해 고조선의 옛 부족들이 저항하면서 일어나는 시기가 바로 삼국시대 초기입니다. 이런 흐름을 이끈 것은, 기자조선 시절 내내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예맥족입니다.

진수의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의 사마의가 요동의 공손찬을 공격할 때 그 북쪽의 선비와 오환 세력을 이용합니다. 선비와 오환은 대대로 요하 상류인 시라무렌과 지금의 중국 내몽골 근처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거란이 되는데, 역시 거란도 남송과 중국의 절반을 나눌 때 그 지역을 중심으로 통치 영역을 넓힌 정도였습니다.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할 때 소손녕이 서희의 말만 듣고서도 순순히 물러난 것은, 송나라로부터 넘겨받은 중국 북부의 연운 16주를 관리하느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이들의 본거지는 중국의 북부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만주를 지나 압록강 이남에 웅크린 고려까지 싸움판으로 끌어들일 힘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들 거란의 조상이 한사군에 편입되었다면, 한사군의 위치가 어디쯤이어야 하는지 저절로 드러납니다. 적어도 한사군이 대동강 근처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사군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킨 뒤에 세운 군현입니다. 조선의 통치 밑에는 오환 선비의 조상인 동호와 예맥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한사군의 지배를 받아야 할 구도였다는 뜻입니다. 흉노에게 땅을 빼앗겼던 동호의 후예인 선비와 오환은 흉노가 떠난 자리로 돌아와서 중국을 위협하는 강한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신흥강자에게 결국 망하고 말죠. 그 신흥강자는 바로 완안부의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입니다. 금나라에 뒤이어 초원 강자의 끝판왕 몽골이 일어서죠. 전 세계가 그 말발굽 아래 무릎 꿇습니다.

용광로처럼 뒤얽혀 끓어오르는 이 상황에서 우리 역사만을 똑 떼 내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주와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초원지대와 연결되어 한 덩어리처럼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사도 그 용광로 속에 뒤섞인 내용물의 일부입니다. 그러자면 각 부족이 쓴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그 언어를 모르고 접근하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해석에 다다릅니다. 그 결정판이 한국의 국사 교과서입니다. 초원지대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들을 모조리 한반도라는 자루에 집어넣고 짓이긴 것이 우리가 중고등학교 내내 배운 한국 고대사입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3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