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얘기 나온 김에, 살수(薩水)도 정리하겠습니다.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쳤다가 을지문덕에게 호되게 당하여 20만 대군을 물밑에 장사지내고 겨우 2,700명만 살아 돌아간 강이 ‘살수’입니다. 살수대첩. 역사학계에서는 이 살수를 청천강에 비정하고, 실제로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어원으로 보면 살수는 압록강입니다. 청천강과 압록강이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려서 어느 쪽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위치나 상황으로 보면 청천강보다는 압록강이 더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굳이 압록강을 버리고 청천강을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충북 충주에서 수안보로 가는 길을 따라 긴 골짜기가 파였는데, 거기에 냇물이 따라 흐릅니다. 이름이 ‘살미’입니다. ‘살미휴게소’에서 커피 한잔하고 수안보나 단양으로 차를 몰아 목적지로 갑니다. 이 냇물을 한자로는 ‘살수(薩水)’라고 적습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당연히 향찰식 표기죠. 그러니 압록강을 ‘살수’라고 적었지만 읽을 때는 ‘살미’였다는 뜻입니다.
이 ‘살미’를 다른 한자로 적으면 ‘졸본(卒本)’이 됩니다. ‘본(本)’은 ‘밑 본’자입니다. 받침(ㅌ)이 떨어지면 ‘미’가 되죠. ‘졸(卒)’은 소리를 적은 것이고, ‘본’은 뜻을 적어서, ‘ᄉᆞᆯ미’입니다. ‘졸’과 ‘살’은 같은 말입니다. 모두 ‘높다, 크다’는 뜻을 지닌 말 ‘ᄉᆞᆯ’에서 갈라진 말입니다. ‘살’은 북방어의 ‘수라상, 솔개, 독수리’에서 보듯이 높다는 뜻입니다. ‘미’는 순우리말로 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장마, 미더덕’ 같은 말에서 볼 수 있고, ‘미추홀(彌鄒忽), 매홀(買忽), 매구루(買溝婁), 매포(買浦)’ 같은 말에서 볼 수 있죠.
지금은 이 졸본천을 혼강(渾江)으로 부르는데, ‘渾’은 물이 어지러이 휘감기며 돌거나, 또는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휘감기는 것을 우리말로는 ‘사리다’라고 표현합니다. 국수의 ‘사리’도 그것이고, ‘고사리’도 풀 끝이 동글게 돌돌 말려서 붙은 이름입니다. 즉 ‘고사리’는 ‘끝(곶)이 사려지는 풀’의 뜻입니다. 서로 다른 물이 만나 이렇게 뱅뱅 돌며 사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 ‘渾’이기에 ‘혼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살미’의 ‘살’을 ‘사리다’의 어근 ‘살’로 오인한 결과 번역이 좀 이상스럽게 된 이름입니다. ‘혼강’은 만주어 ‘살미(卒本)’를 번역한 말입니다.
충북 괴산에 보면 청천면이 있고, 그 앞에 개울이 있는데, 이름이 청천(靑川)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살매(薩買)현을 청천현으로 고쳤다고 나옵니다. ‘살수’와 ‘살미’가 ‘청천’과 같은 말임이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살미’가 청천(靑川)으로 옮겨지는 까닭은 동쪽의 뜻 때문입니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어서 높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입니다.
아마 청천강도 살미였기 때문에 살수대첩의 현장을 청천강에 비정한 것 같은데, 이건 너무 무책임한 일입니다. 압록강도 살수였고, 충주 옆의 개울도 살수였고, 괴산의 청천천도 살수였습니다. 이런 식이면 살수대첩이 괴산의 청천에서 일어났다고 주장 못 할 일도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하려고들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한자와 향찰로 표기된 동의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청천(靑川)=살수(薩水)=살매(薩買)=살미=졸본(卒本)=압록(鴨綠)
이상은 저의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함부로 광합성을 한 결과인데, 정답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답이 없는 어떤 문제를 푸는 출발점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의 자취를 여기다가 슬쩍 남겨놓고 갑니다. 역사학자님네야 어차피 이런 생각에 귀 기울이지도 않을 것이니, 말을 하는 제 속은 더없이 편합니다.
‘졸본’이나 ‘수라상, 독수리’ 같은 말에서 보듯이, 만주어에서는 높다는 뜻을 ‘살’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지배층이 쓴 몽골어에서는 ‘가라, 가리(garui)’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역이 떨어지면 ‘아리, 아라, 오리’가 되는데, 이것을 새의 한 종류인 ‘오리’로 알아듣고 번역한 말이 ‘鴨(오리 압)’ 자입니다. 그래서 ‘압자하(鴨子河), 압록강(鴨綠江)’이 된 것입니다. ‘압자’는 ‘오리알’을 말하고, ‘압록’은 ‘아’에 리을(ㄹ)이 첨가된 것입니다. ‘알, 아리’이죠. 우리말로 하자면 ‘아리수, 아라내, 알내’쯤이 될 겁니다. 경주의 ‘알천(閼川)’도 이것을 적은 말입니다.
‘가라, 가리’에서 기역이 탈락하면 ‘아리, 오리’가 되는데, 이것이 가끔 ‘오를 상(上)’자로 번역됩니다. 위치상으로 높은 곳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두머리나 왕처럼 지체 높은 분이 산다는 뜻으로도 이렇게 적힙니다. 예컨대 흉노족 중에서 좌현왕과 우현왕이 사는 곳을 상곡(上谷)이나 상군(上郡)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뜻으로 굳어져서 그 지역의 군 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몽골어로 소나무는 ‘narasu’입니다. 송화강의 ‘松’이 ‘나라수’라니, ‘아리수’와 똑같죠. 살수와 압록은 같은 말인데, 같은 물길을 만주어로 읽느냐 몽골어로 읽느냐에 따라서 달리 기록된 것입니다. 100년 전에 단재 신채호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 뒤 100년이 더 지났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역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오리’는 ‘새’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새’는 방위상 동쪽을 나타내고, 동쪽은 동양의 고대 민족에게 높은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동쪽에 있는 물줄기를 ‘새’또는 ‘쇠’ 같은 이름을 붙입니다. 금천(金川) 같은 냇물 이름은 가장 쉽게 ‘ᄉᆡ’를 옮긴 사례입니다. 지구는 둥글지만, 고대에는 해가 뜨는 쪽이 높은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쪽에 흐르는 물줄기에 ‘새’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