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철 지난 이념 논쟁으로 인한 독립운동가 모욕 행태가 지속되면서 반대급부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이는 그만큼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의 행태가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본지는 이런 독립운동가 모욕 행태에 맞서 독립운동가 재조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주 전과 지난 주에는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찾았고 이번 주에는 대전이 낳은 위대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현재의 생가는 단재 선생이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았던 곳이라 한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인물이다.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등 많은 역사 연구 서적을 저술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유명한 것은 『조선상고사』일 것이다. 이 『조선상고사』는 단재 선생이 말년에 중국의 대련에서 수감되었을 당시 옥중에서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선상고사』는 그의 미완성 유작(遺作)이다.

본래 『조선상고사』는 남북국시대 이전까지 역사를 쓰는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서기 663년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난 부분까지 집필을 완료한 이후 단재 선생이 1936년에 옥중 순국하면서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옥중에서도 우리 역사 연구를 잊지 않고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 우리 고대사를 장엄하게 복원한 그의 노력은 숙연하게만 느껴진다.
신채호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에 속해 있지만 남쪽 끝 지역에 있어 생각보다 거리가 매우 멀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시골마을에 그의 생가가 있었다. 교통편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곳에 있어 앞으로 대전시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신채호 선생의 생가는 생각보다 매우 소박했다. 안채 하나와 곳간채 하나가 있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고령 신 씨라는 양반가의 집안인데 생각보다 매우 가난하고 불우했던 환경에서 태어났던 셈이다. 실제로 신채호 선생이 불과 7살이었을 때 아버지인 신광식 씨가 타계했고 15세였을 때 친형을 잃었다고 한다.
신채호 선생은 여러 모로 독특한 사상가였다. 우선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얼핏 봐서는 모순되어 보이는 면이지만 신채호 선생에게는 이런 면이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그가 주창한 민족주의가 우리가 익히 아는 민족주의와 개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크게 2가지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침략적 민족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저항적 민족주의다. 침략적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예시는 나치 독일의 아리안 제일주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그리고 일제의 군국주의 등이다. 반면에 저항적 민족주의는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신채호 선생의 민족주의는 당연히 저항적 민족주의다.
그의 저항적 민족주의 정신이 제대로 발현된 것이 의열단의 요청을 받아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이다. 일제에 맞서 저항을 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일제의 정부 기관 등은 모조리 파괴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란 점이 전혀 모순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역사 연구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유교 사상에 의해 저술된 『삼국사기』와 불교 사상에 의해 저술된 『삼국유사』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자료를 폭넓게 채택하여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간 사서와 중국 현지를 답사하며 입수한 정보들도 모두 실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645년 1차 고․당 전쟁 이후 고구려 연개소문의 중국 정벌 내용이다.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중국 현지를 답사하며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지점에 있는 고려영진(高麗營鎭)이란 곳과 북경 남쪽 하북성 하간시 서북쪽 12리에 있는 고려성(高麗城) 등이 모두 연개소문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란 것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그를 토대로 연개소문이 패주하는 당 태종 이세민의 뒤를 추격해 대반격을 감행하여 북경시 일대까지 모두 고구려 영토로 삼았다는 내용을 그의 역작 『조선상고사』에 실었다. 또한 598년 1차 고․수 전쟁 당시 부실한 내용에 대해서도 『대동운해』와 『서곽잡록』 등 현전하지 않는 사서의 기록을 인용해 내용을 보충하고 기존 관찬 사서엔 기록되지 않은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존재도 발굴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병도, 신석호 등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장악한 상태고 이들은 실증사학이란 외피를 입고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아직도 이들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식민사관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채호 선생이 지하에서 가슴을 치실 일이다.
본지에서는 지난 달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과 함께 북간도 일대 독립운동의 유적지를 답사한 바 있다. 김학철 선생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중국으로 다시 떠나버린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신채호 선생의 인생 역정을 비춰보면 만일 그가 해방 이후까지 살아 있었을 경우 그 또한 김학철 선생처럼 남북한 어디에서도 적응하지 못했을 것 같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역사를 모르는 것은 곧 제 이름자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제 부모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학생들이 역사에 너무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는 그간 역사 교육을 소홀히 했던 기성세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 아닐까? 하물며 그렇게 10년 넘게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도 막상 회화 실력은 바닥인 것이 대다수 한국 학생들의 실태다. 이런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식 비효율적 교육은 아무 필요가 없다. 이번 기회를 토대로 역사 교육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