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기』 한(漢)나라 때(BC 91년) 사마천(BC 145~85)
『한서』 후한 때(BC 82년경) 반고(班固:32~92)
『후한서』 남조 송(宋) 때(432년경) 범엽(范曄:398~446)
『삼국지』 서진(西晉) 때 진수(233~297), 배송지(裴松之:372~451) 보충
위의 네 가지 책을 사사(四史)라고 합니다. 중국 고대사를 적은 네 가지 중요한 역사서라는 뜻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당연히 『사기』입니다. 뒤의 책들은 『사기』를 바탕으로 뒷이야기를 이어간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러 가지 책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할 경우 앞선 책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역사서를 기록한 편찬자들이 동이족의 역사만 기록할 리는 없습니다. 동이족의 역사는 편찬자들에게 수많은 중국 역사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홀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똑같은 동이족의 역사를 두고 중국의 사관들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기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고조선이 망한 뒤 한사군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故遂定朝鮮爲四郡 封參爲澅淸侯 陰爲萩苴侯 唊爲平州侯 長爲畿侯 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侯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 當誅贖爲庶人: 『사기』 권115 조선열전
故遂定朝鮮爲眞蕃臨屯樂浪玄菟四郡 封參爲澅淸侯 陶爲秋苴侯 唊爲平州侯 長爲畿侯 最以父死頗有功爲沮陽侯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 當誅贖爲庶人: 『한서』 권95 조선전
두 글을 잘 비교해보십시오. 서로 다른 부분에 밑줄을 쳤습니다. 오타가 분명한 글자를 빼면 똑같습니다. 두 글을 비교해보면 4군 앞에 갑자기 <眞蕃臨屯樂浪玄菟>가 끼어들었죠. 『사기』의 글을 반고가 옮겨적으면서 자기 생각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것이 말썽 많은 한사군의 첫 기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한사군은 반고의 주장이지 사마천의 기록이 아닙니다. 반고가 어디선가 끌어다가 오려 붙인 것입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고조선이 망하고 무제가 봉지로 정해준 4군은 ‘획청후, 추저후, 평주후, 기후, 온양후’입니다. ‘후’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에게 주는 벼슬 이름입니다. 모두 다섯 곳이죠. 아마도 숫자가 안 맞으니 앞의 4군은 이와 다른 것이라 여기고, 반고는 다른 지역 이름을 갖다가 『한서』에 덧붙인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겹(王唊)은 평주후로 임명된 지 1년만에 죽어서 ‘평주’는 저절로 사라졌죠. 그래서 이런 사실을 잘 안 사마천은 5군이 아니라, 4군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기는 2년 뒤에 사라졌는데, 한사군을 한삼군이라고 하여 3과 4가 섞여 쓰이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따라서 한사군은 5에서 하나(평주)가 줄어 ‘획청후, 추저후, 기후, 열양후(涅=溫=沮=苴)’의 4군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반고가 이런 사정을 모르고 뜬금없이 ‘진번, 임둔, 낙랑, 현토’를 끼워넣은 것입니다. ‘진번, 임둔’은 『사기』 조선 열전에 나오는 말이고, ‘낙랑, 현토’는 『한서』 왕망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모두 조선이 차지했던 지역에 있는 작은 나라죠. 이렇게 하여 한사군의 명칭이 등장한 것입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되풀이하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참 큰일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평주는 1년 뒤(B.C.107) 없어지고, 기는 2년 뒤(B.C.105)에, 열양은 4년 뒤(B.C.103)에, 획청은 9년 뒤(B.C.99)에, 추저는 17년 뒤(B.C.91)에 없어집니다. 이들이 있던 지역은 『한서』 권17 연표에 나오는데, 기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하동(산서성 남쪽)이고, 나머지는 연제지간(북경 천진 산동)입니다.
이런 상황은 조조의 시대까지 마찬가지여서, 이곳에 둥지 튼 공손 씨가 남쪽 바닷가의 한위(韓魏)를 공격하여 대방군(204?~238)을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사마의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공손연이 죽은 뒤에는 조조의 위나라에서 이곳에다가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를 임명하지만, 한예(韓濊)의 공격으로 모두 죽습니다.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낙랑 대방을 비롯한 한사군이 모두 북경 근처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상의 주장은 제 생각이 아닙니다. 1970년에 박시인이 낸 책 『알타이 인문 연구』라는 책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소개한 것입니다. 1970년에 벌써 식민사관을 극복한 이런 훌륭한 업적이 나왔는데, 그 뒤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글을 무시한 채 왜놈 스승들이 싸놓고 간 똥 무더기를 포장하느라 바쁩니다.
위에서 제시된 다섯 제후의 이름을 상고음으로 재구성해보겠습니다. 획청(澅淸[ɣwai qing]), 추저(萩苴[tsʰjŏɡ tsʰjaɡ]), 평주(平州[bǐeŋ tjŏɡ]), 온양(溫陽[wən ʎǐaŋ]), 기(畿[ɡʰi̯ər])인데, 이 중에서 획청과 기는 지금까지 읽어온 지식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겠네요. ‘획청’은 ‘과이친’쯤으로 발음되니 ‘친’은 황금을 뜻하는 북방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ɡʰi̯ər]’는 ‘걸’쯤으로 발음될 것이니, 중앙을 뜻하는 몽골어이고, ‘계루, 고려, 구려’와 같은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京畿)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지역을 나타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한 번 찾아내어 보십시오. 저의 입만 멀뚱멀뚱 바라보지 말고요. 그런 것까지 다 해드리다가는 제가 진이 빠져 죽겠어요. 고통을 좀 분담합시다. 하하하.
다시 돌아갑니다. 박시인은 이 글의 결론에서,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 유물을 두고 오래 고민한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유물 발굴 지점이 곧 당사자의 근무지가 아니라는 논리죠. 이 점은 그 유물이 나타났을 때 신채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일본학자들은 고대사의 유물을 제가 발굴하는 곳에다가 심어서 고대사의 시기를 끌어올리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닙니다. 아예 그들 역사학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니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제국주의 앞잡이들이 못 할 일은 없고, 그의 후예들이 지금도 그런 짓을 합니다.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는 사람은 제가 발굴 중인 유적에 석기를 몰래 땅에 파묻어서 일본의 선사시대 역사를 7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시대로 끌어올렸다가 발각되었습니다. 약 20년 동안 162곳의 구석기 유적을 날조했습니다. 이들이 이러는 건 간단합니다. 열등감 때문이죠. 이러다 보니 일본의 고고학은 아예 믿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보다 더 앞선, 세계 최초의 15,000년 전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저는 그것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인류사의 전개 방향으로 볼 때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섬으로 가는 방향이 옳지, 그것이 거꾸로 갈 수는 없다는 문명의 도도한 흐름 때문입니다. 한반도보다 앞선 일본의 구석기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낙랑 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발굴했다는 그 유적도 믿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한일 강제 합병이 끝난 직후인 1910년대에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 낙랑 대방과 관련된 유물이 3년만에 우르르 쏟아져나옵니다. 실학자들이 몇백 년간 찾으려고 몸부림치던 그 유물이 어찌 그리 단시간에 마법처럼 뿅 하고 그들 앞에 나타났을까요? 그것도 꼭 필요한 그 시기에!
그런데 말입니다. 대방군은 중국과 고구려가 만나는 접경에 설치된 군입니다. 중국이 책과 조복을 갖다놓으면 나중에 고구려가 들러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영된 것이죠. 그러니 대방군은 중국과 고구려가 만나는 국경선 근처에 있어야 합니다. 이게 상식이죠. 이 대방군의 유물이 1911년에 황해도에서 발굴됩니다. 그것도 3년 사이에 우르르 나옵니다. 그렇다면 중국과 고구려의 국경이 황해도이어야 하는데, 이건 어떤 역사이론이나 학술로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대방군의 유물이 조작의 결과임을 만천하여 보여주는 일입니다. 낙랑 유물도 이런 혐의를 벗을 길이 없습니다. 다음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낙랑군 재평양설의 물적 증거를 제공하여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라고 구체화시킨 세키노 다다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모두 갖추어진 낙랑출토품류를 구입했다.’는 일기가 공개되자 그 물적 증거는 위조된 것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 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로부터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漢代의 발굴품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류는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출전: K스피릿)
『세키노 다다시 일기[關野貞日記]』의 내용입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출토된 낙랑 유물은 모두 이런 것들입니다. 신채호나 박시인은 이 기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니, 천상 그의 영전에 바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일본의 역사 연구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소설입니다. 차라리 제가 지금 어원을 따라가며 쓰는 이 소설이 더 그럴 듯할 겁니다. 더는 조작할 수 없는 ‘언어’를 따라가는 중이니, 이렇게 곳곳에 심어놓은 유물보다 저의 추론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고등학교 도덕 시험 주관식에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짜라투스투라』를 쓴 독일의 근대 철학자는 누구인지 이름을 쓰시오.”
답은 ‘니체’죠. 그런데 채점하던 선생님의 눈에 희한한 답이 보였습니다. 어떤 놈이 ‘누드’라고 쓴 것입니다. 조금 더 채점하니 별의별 답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상한 답을 쓴 놈들을 불러다가 추궁을 했습니다. 그리고 배꼽을 잡고 웃다가 죽었습니다. 정답 ‘니체’를 컨닝한 학생이 ‘나체’라고 썼고, 그것을 커닝한 또 다른 학생은 ‘알몸’이라고 썼고, 그것을 또 컨닝한 학생이 마지막으로 ‘누드’라고 쓴 것입니다. 환갑이 지난 제가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우스갯소리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의 상고사를 다루는 중입니다. 몇 안 되는 기록으로 온갖 상상을 덧붙여 구성한 교과서의 고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꾸만 이 우스갯소리가 떠오릅니다. 북경에 있던 니체가 난하의 나체와 대릉하의 알몸을 거쳐 평양의 누드로 자리 잡습니다. 우리는 『짜라투스투라』를 쓴 독일 철학자의 이름을 ‘누드’라고 배우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역사학이 진실을 제대로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걸 알아볼 능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에는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봤자 저로서는 쓸모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원을 따라가며 살펴본 저의 눈에는 자꾸만 앞의 우스갯소리와 겹쳐 헛웃음이 나옵니다. 제가 떠드는 이 연재 글의 내용이 한 늙은이의 노망이면 좋겠습니다.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