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상고사] 신라 3
[정진명의 어원상고사] 신라 3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57-신라3'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10.1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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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서림에서 나온 한한대자전의 '제' 자.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앞서 잠깐 말했습니다만, 김일제(金日磾)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입니다. 한 무제가 흉노를 공격할 때 명장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그때의 나이가 14살이었습니다. 붙잡혀와서는 말 키우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한 무제의 눈에 들어 발탁되었고, 나중에는 김씨 성을 하사받아서 타현(秅縣)을 봉지로 받아 다스렸기에, ‘타후(秅侯)’라고 불립니다. 문무왕의 비석에 ‘秅侯天祭之胤’이라는 구절이 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김씨 성을 받은 까닭은 흉노족이 황금으로 만든 금인(金人)을 제천의식 때 쓰기 때문입니다.(『알타이 인문 연구』) 이 ‘제천금인’은 곽거병이 전리품으로 중국에 가져옵니다. 흉노족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모태인 알타이산맥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알타이가 이들의 말로는 ‘금’이어서, 알타이를 한자로 쓸 때 ‘金’이라고 합니다. 황금이 귀하고 비싸서 귀한 사람인 왕족, 즉 하늘의 아들과 그 자손에게만 붙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런 귀족들은 이름 자체가 ‘알’입니다. 김일제의 어머니가 알씨(閼氏)인데, 이것은 고대 터키어에서 ‘부인’을 뜻하는 ‘alga’를 적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국과 천만리나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경주 김씨 족보에 김일제가 등장합니다. 경주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문무왕비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이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문제는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건너온 과정이 또렷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김알지의 ‘알지’가 ‘일제’와 너무 닮았다는 것입니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똑같은 말이라는 심증이 갑니다. 한나라 때의 한자 발음과 지금의 우리 발음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트집 잡고 싶은 분도 있으실 겁니다. 여기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면 현대의 중국음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음이 훨씬 더 한나라 시절의 한자음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음은 당나라 무렵의 음(중고음)입니다. 이것은 『반야심경』의 주문을 읽어보면 압니다. 중국 무협 드라마에서 중국인들이 현대 발음으로 하는 것보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 한자음으로 읽는 것이 인도어(범어)의 소리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중국은 벌써 2,000년이나 흐르면서 소리가 많이 변했는데, 당나라 때 받아들인 소리를 지금도 우리는 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중국어에서는 입성(入聲)이 아예 사라졌습니다. ‘입, 각, 촉’ 같은 말의 발음이 없어져서 중국 현대인들은 4성 체계인 자기네 한자를 보고서 입성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치 콩 속에서 팥을 골라내듯이 쏙쏙 찾아내죠. 이런 걸 보면 오히려 중국인들이 더 감탄합니다. 한자음은 우리의 발음이 한나라의 발음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알지’와 ‘일제’가 거의 같은 소리라고 제가 감히 주장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김알지의 출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탈해이사금 9년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했는데,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자 잘생긴 사내아이가 나왔고, 이 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탈해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씨로 했으며, 자라면서 똑똑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가락국기의 김수로왕이 등장하는 것처럼 외부 세력이 어느 집단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신화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신화일 뿐입니다. 실상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덤터기죠. 신라는 퉁구스어를 쓰는 박씨와 스키타이어를 쓰는 석 씨, 터키어를 쓰는 김씨 세 부족이 지배층 노릇을 했습니다. 석탈해로 대표되는 세력이 가장 약하여 결국은 터키어를 쓰는 김알지 세력에게 흡수된 것인데, 그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탈해가 ‘니사금’이라는 퉁구스족의 왕명을 쓴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박 씨에게 붙었을 것입니다. 패거리 숫자가 가장 적어서 세력이 약한 까닭이었겠지요. 그 전에도 가락국의 김수로왕에게 덤볐다가 패배하고 쫓겨난 전력이 있습니다. 그 뒤로 신라에 와서 남의 집 담장 밑에 숯을 숨겨놓고 원래 자기네 집이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 집을 차지하죠. 이렇게 오락가락하다가 어렵게 왕이 되자 자신을 지지할 세력이 필요했고, 그때 터키족에게 손을 내민 것이며 김알지가 그 손을 잡은 것입니다.

‘磾’는 옥편에 ‘사람 이름 제’로 나옵니다. 보통명사가 아니라 그냥 사람 이름으로 쓰이는 말인 것으로 보아 한 무제가 김씨 성을 하사하듯이 김일제에게 만들어준 이름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자가 많이 생길 무렵입니다. 그래서 한자 하나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磾’는 ‘石+單于’의 짜임으로, ‘새끼 선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어린아이를 ‘돌이, 똘이, 똘똘이’라고 합니다. 이 ‘돌’은 돌덩이(石)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돌처럼 단단하게 살아라는 뜻이 붙기는 했지만. 터키어로 ‘자손’은 töl’입니다. 이것을 ‘石’으로 옮긴 거죠. ‘單’은 앞서 살펴본 대로 고대 터키어로 ‘폐하’를 뜻하는 ‘jenap>jenu’이라고 했습니다. 김일제가 흉노의 선우 ‘휴도왕’의 아들이었기에 그의 아들이라는 애칭을 붙여서 만든 글자가 ‘磾’입니다.

이렇게 해서 14살에 붙잡혀온 포로에게 붙여줄 그럴듯한 이름을 뜻하는 한자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뜻을 정했으면 ‘음’도 정해야죠. 뭐라고 할까요? ‘흉노 왕의 귀하신 아들’을 뜻하는 말에 걸맞은 ‘음’은 무엇으로 하는 게 좋을까요? ‘귀인, 존자’를 뜻하는 말이 있습니다. ‘벼슬아치, 구실아치’의 ‘č’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제’라는 음이 결정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름 제(磾)’자가 탄생합니다. 金은 ‘제천금인’인 때문에 생긴 한자이고, 日은 해를 숭상하는 흉노족의 관습 때문에 붙은 것입니다. 김일제는 ‘제천금인 가문의, 해 같은 아기 선우’라는 뜻이 됩니다.

김일제는 제천금인을 섬기는 알타이 사람이라서 ‘김’을 성으로 받았고, 김알지는 금궤에서 나와서 ‘김’을 성으로 받았습니다. 성씨의 내력이 똑같습니다. 내력이 같으면 이름도 같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알지’를 똑똑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이것은 뜻을 잘 모르고 붙인 설명입니다. 알지는 흉노족의 ‘고위관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몽골어로 ‘ere’는 ‘남자’를 뜻하는 말인데, 크게 보면 몽골족과 함께 움직인 석탈해가 붙인 이름이니, ‘알지’는 당연히 ‘ere’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궤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표현은 더욱 이 점을 확실히 보여주죠. ‘ge’는 ‘존자’를 뜻하는 접미사인데, ‘erege’는 남자 존자를 뜻합니다. ‘여성 존자’는 ‘alga’였고, 이것이 ‘알씨’가 된 것입니다. ‘alga’는 알가(-哥)인데, 제 집안을 스스로 말할 때는 ‘가’라고 하고, 남의 집안을 말할 때는 ‘씨’라고 하니, ‘알가’를 ‘알씨’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쓰는 ‘씨’와 ‘가’는 한자가 아닙니다. 우리말입니다. ‘씨’는 ‘씨앗’과 같은 뿌리를 지닌 말입니다. ‘가’는 동북아에 살던 사람들의 공통 용어 ‘간, 카간, 한’입니다. ‘氏’나 ‘哥, 家’는 그 소리를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알’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백제를 다룰 때 벌써 한번 봤습니다. 백제의 지배층은 임금을 ‘어라하(於羅瑕)’라고 하고, 피지배층은 ‘건길지(鞬吉支)’라고 했습니다. ‘어라하’가 바로 ‘얼-한’이고 ‘존자인 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소리 그대로 ‘erege’라고 봐도 됩니다.

우리말에서도 ‘알’은 해를 뜻합니다. ‘이틀, 사흘, 나흘’의 ‘흘’이 ‘해’의 자취입니다. 이 말들의 짜임은 ‘잍+을, 샇+을, 낳+을’입니다. ‘을’의 옛 표기는‘ᄋᆞᆯ’입니다. ‘ᄋᆞᆯ’은 ‘해’의 변형입니다. 그래서 알 란(卵) 자를 쓰는 것입니다. 주몽의 엄마 유화가 햇빛에 닿았다가 알을 낳았다는 것도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 해는 물론 해모수라는 사람이고, 그의 해(알)를 품었다가 앞으로 해(왕)가 될 사람을 낳았다는 뜻입니다. 사실에만 집착하는 역사학자들께서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겠거든, 저의 주장을 부인하시기 전에 주변의 문학도에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괜시리 말 먼저 했다가 나중에 망신당하지 마시고.

김일제가 죽은 뒤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의 반란에 휘말려 위기를 맞습니다. 김일제의 자손이 왕망의 처가와 한 피붙이였던 까닭으로,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잠시 새로운 왕국을 만들었을 때 왕망의 편에 섰습니다. 그 뒤로 후한의 광무제가 일어나면서 왕망파를 숙청하기에 이르자 큰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이들이 설화처럼 성을 바꾸고 중국에 살았는지, 아니면 떠도는 전설처럼 가야가 뱃길로 김해에 이를 때 거기에 편승하여 흘러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떠도는 설화는 믿기 어렵습니다. 그럴 듯은 하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합니다.

다만, 이렇게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신라 왕실에는 진작부터 터키족이 있었고, 한 무제의 흉노 정벌로 파편처럼 흩어진 흉노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흘러들어서 경주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한반도로 흘러든 터키족의 존재는 비류백제에서도 한번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문무왕을 비롯하여 경주에 살던 터키족이 김일제의 직접 후손이라는 연결점은 없더라도, 같은 흉노족으로서 김일제와 혈통을 연결 지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는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문무왕 비의 기록은, 신라의 지배층이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일어난 유목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무제 무렵의 상황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신라의 건국 연대는 정확히 믿기 힘들지만, 어쨌든 한 무제의 흉노 정벌이 있던 기원전 129년보다 한참 뒤에 일어난 일이니, 경주의 김알지가 흉노와 연관된 것은 분명합니다. 경주 김씨 족보에 기록된 김일제의 기록과 신라 문무왕 비의 기록은 결코 허황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분명히 어떤 연관과 맥락이 있는 기록임은 그들이 쓴 말의 뿌리를 통해서도 또렷이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한국인의 혈통 사랑이 만들어내 족보의 세계가 팔만대장경 이상으로 놀라운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 평민들의 신분 상승 욕구로 족보의 대혼란이 일어나지만, 이런 기록을 살펴보면 적어도 조선 중기 이전의 족보에 나타난 기록들은 매우 사실성이 짙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저는 이번에 우리나라 족보의 사실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천 년 전의 사실이 한 집안의 조상 내력을 적는 족보에 이토록 정확하게 기록된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저는 동래 정 가인데 동래 정씨의 내력은 경주 정씨의 분파이고, 조상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동래 정씨 파보』의 기록을 보고, 저걸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핏줄의 내력을 의심한 저를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에 정승 판서를 지낸 사람의 후손입니다. 조선 초기 인구의 70%를 이루던 상민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갑자기 사라진 쇠백정들은 지금 조선 시대 어느 재상의 자손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족보에 적힌 글들이 황당하게 보이지만, 김일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족보 기록의 사실성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중국의 역사학에서는 극히 최근까지도 흉노나 동이를 자기네 역사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역대로 북적이나 동이로 분류하여 자신들과 구분 지었죠. 그러던 것이 변화의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동북공정과 맞물립니다. 그때 흉노까지도 중국 역사로 넣으려고 하였고, 그들이 내세운 강력한 증거가 바로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였습니다. 대부분의 흉노가 공격을 받고 서쪽과 동쪽으로 콩 튀듯이 흩어졌는데, 김일제를 비롯한 적지 않은 흉노족들이 포로로 잡혀 중국으로 끌려왔고, 이들이 흉노를 대표하기 때문에 역사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흉노를 중국의 민족사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을 비롯하여 그 주변의 역사학에서 이를 부인할 만한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처지입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아리랑’과 ‘씨름’, ‘한복’, ‘된장’까지도 중국에게 빼앗길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런 덤터기를 쓰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자들이, 제 나라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킨 한국의 역사학자들이라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그들의 업보가 되었습니다. 똥 싼 놈은 따로 있는데, 그 똥을 치우는 놈도 따로 있어서, 이런 뒷설거지나 해야 하는 저의 오지랖도 참 어지간하다는 탄식을 하면서, 얄밉지만 흉노가 한국의 엄연한 역사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흉노는 터키어를 썼고, 우리 역사에서 터키어를 쓴 부족들은 적지 않습니다. 위만조선이 터키어를 썼고, 신라 후기를 지배한 김씨가 터키어를 썼습니다. 이것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위만은 한 무제의 흉노 정벌 직전에 기자조선을 넘어뜨린 사람이고, 신라의 김씨들은 처음부터 신라를 세운 세력의 일부이지만, 그 세가 미약하여 다른 종족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돕는 방식이었습니다. 탈해 니사금이 김알지를 주워다 길렀다는 것이 그런 증거를 보여주는 설화입니다. 그러다가 신라 중기를 넘어서면 왕실을 접수하여 신라가 망할 때까지 그들의 왕국이 됩니다. 이 정도 설명이면 머릿속에서 무언가 퉁(!)하고 울리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라 왕실의 김씨 세력은 터키어를 쓰는 흉노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신라 초기에 아주 미미해서 혼자서는 왕 노릇도 못 하던 김씨 세력이 후대로 가면서 다른 왕족들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요? 박 석 김 세 성씨 중에서 박 씨와 석 씨는 새끼를 치지 않고 김씨들만 후손을 잔뜩 낳았다는 얘기일까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사람이 자식을 생산하는 능력은 거의 비슷하고 자식 많이 낳은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었던 옛날에는 세월이 좀 흐른다고 해서 어느 한쪽만 더 불어날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김씨 세력이 갈수록 힘을 얻었다는 것은, 다른 그 어느 곳에선가 그들과 비슷한 세력이 밀려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라 후기로 가면서 김씨 세력이 커졌다는 것은, 그들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세력이 외부로부터 꾸준히 흘러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들은 흘러들어온 것일까요?

뻔히 예상되는 일이 아닐까요? 한 무제의 흉노 정벌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터키족들은 자신과 동족들이 사는 곳으로 흘러들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위만조선이었을 것입니다만, 위만조선은 곧 무제의 공격으로 망하고 말죠. 그러면 위만조선에 깃들었던 터키족들은 그들 스스로 왕국을 수립하든가 기존의 왕국으로 흘러들어 의탁해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 왕국을 수립하던 세력은 벌써 우리가 보았습니다. 누구죠? 바로 비류백제입니다. 처음 ‘십제’를 세웠던 세력들이었죠. 그러나 이들은 온조의 휘하로 들어감으로써 몽골어를 쓰는 왕조에 흡수되었습니다.

그다음으로 기존의 왕실에 의탁해야 하는 방법으로는 신라가 있습니다. 신라에는 미약하기는 하지만 이미 왕실의 일원으로 자리 잡은 김씨 세력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의탁하면 됩니다. 백제에서 비류 백제를 세우려던 세력의 일파는 틀림없이 신라로 옮겨갔을 것입니다. 백제가 건국된 이후에 후기로 접어들면 백제 왕실은 가야계가 거의 독자지 합니다. 웅진 시대의 백제는 그곳 토착 부족들과 협의를 통해 경영된 나라입니다. 터키어를 쓰던 세력을 드라비다어를 쓰는 세력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가 교류했던 상황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됩니다.

하지만 신라 후기에 이르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립니다. 위만조선이 망하고 신라가 후기로 접어들 때까지는 300~400년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때의 터키족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 자취가 바로 북위가 군대를 보내 요서와 진평의 백제를 쳤으나 졌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입니다. 그때까지도 중국 내에는 흉노와 몽골의 세력이 남아서 한 왕조의 공격을 견딜 만큼 우뚝한 세력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이들도 결국은 흩어지는데 크게 몽골계는 고구려의 품으로 들어가고 터키계는 백제로 합류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백제의 중흥기와 맞물립니다. 

또 한 가지 문무왕비에서 자신의 조상을 김일제라고 한 것도 그러한 세력 합류의 한 증거가 됩니다. 김일제의 후손은 후한 대에도 중국에서 벼슬을 하지만, 이들 중 일부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전혀 무리는 아닙니다. 특히 왕망(王莽)을 거치면서 멸족의 위기를 맞았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일제의 후손도 자신과 같은 혈족인 터키어를 쓰는 신라로 합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무왕비에서 타후 김일제의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규모로든 김일제의 후손은 신라로 합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문무왕이 김일제의 직계 자손이라는 주장은 무리입니다. 김알지와 김일제가 비슷한 시기의 혈족일 것은 분명합니다. 김일제가 한나라로 잡혀간 그 시기에 어디론가 달아났던 김일제 일족의 일부가 신라까지 흘러들었다고 보는 게 무난한 상상일 겁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한 무제의 공격으로 시작된 흉노와 중국의 전쟁은 흉노의 패배로 끝을 맺었고, 그 결과 흉노는 서쪽으로 가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했습니다. 흉노의 일부 세력은 동이족의 활동으로 합류하여 수많은 왕국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는데, 이들의 자취가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곳은 신라였습니다. 신라는 명실공히 흉노족의 후예가 세운 왕국입니다. 우리말의 뿌리(語源)가 보여주는 역사의 실상이 그렇고, 문무왕 비 같은 비석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지난 세월에 글로 만들어진 문서들이며, 그 문서에 코를 박고 딴 곳을 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한국 역사학의 결론일 뿐입니다. 심지어 경주 김씨 족보만도 못한 역사서를 믿는 한국 역사학자들의 결론과는 다르게 흉노는 한국의 맨 가장자리에 와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만들어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통일신라를 우리 민족의 본줄기로 삼는다면, 한국의 기원은 흉노에 닿습니다. 흉노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의 역사입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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