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상고사] 신라 5 석탈해
[정진명의 어원상고사] 신라 5 석탈해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59-신라5'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11.0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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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각출판사의 삼국유사 탈해왕 부분.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저는 문학도이다 보니, 역사학에 문외한이어서 관련 자료를 찾을 때도 인터넷을 뒤져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에는 워낙 허접한 자료들만 떠돌아서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되는데, 어쩌다 괜찮은 자료가 얻어걸리는 수도 있습니다. 석탈해를 검색하고 몇 글을 읽다 보니 정말 괜찮은 글이 하나 보이더군요. 이재환의 「신라 석(昔) 씨족의 기원과 이동 연구」라는 논문입니다. 몇 차례 스크랩되어 옮겨 다닌 탓에 원문보기를 눌러도 원문은 벌써 사라진 글이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석탈해에 관한 역사 기록은 몇 군데 나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삼국사기』 탈해왕 본기, 그리고 『수서』 신라전입니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남해왕 때, 가락국의 바다에 배가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신민을 데리고 북을 치며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고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의 동쪽 아진포에 이르렀다. 바닷가의 한 노파가 (중략) 궤를 열어보니 단정한 사내아이와 더불어 칠보와 노비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대접하자, 사내아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正明國, 또는 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어떤 글에서는 琓夏를 花廈國이라고도 적는다. 용성은 왜(倭)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다 : 일연의 주석). 일찍이 우리나라에는 스물여덟 용왕(龍王)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람의 배속(胎)에서 나왔으며 왕위를 대여섯 살부터 이어받아 임금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려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8품(品) 성골(姓骨)이 있으나 가리는 일 없이 모두 대위(大位)에 올랐소. 그때 우리 부왕(父王)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서 아들 얻기를 빌었더니 일곱 해 만에 커다란 알을 하나 낳았소. 이에 대왕은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었던 일이니 이는 반드시 좋은 징조가 아닐 것이다.’라 하시고 궤를 만들어 나를 칠보(七寶)와 노비들과 함께 궤 속에 넣어 배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고 ‘부디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일가(一家)를 이루도록 하라.’고 비셨는데, 이때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지켜주어 이곳에 이르렀소.”라고 했다. ―『삼국유사』권 1「기이」1 제4 탈해왕 조

석탈해가 외부 세력이라는 것은 역사학자들에게도 이견이 없습니다. 이들이 배를 타고 어디선가 출발하여 한반도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출발지는 ‘용성’이라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용성이라는 역사상의 지명을 찾으면 이들의 이동과정을 추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성은 모두 세 군데로 걸러집니다.

요령성(遼寧省) 대릉하(大凌河) 중류
대동강 하구인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龍岡郡)
전라북도 남원시의 옛 이름이 용성(龍城)

용성으로 지목된 이 세 곳을 두고서 이재환이 내린 결론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서기전 195년부터 180년 사이에 위만(衛滿)은, 주변의 세력들을 아울러서 난하(灤河)와 갈석산(碣石山)으로부터 대릉하까지로 지배했는데, 이때 대릉하 중류에 자리 잡은 요녕성 용성국은 서기전 114년 전한이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4군(郡)을 설치할 한나라의 공격을 피해 지금의 평안도 남포시 용강군으로 이동합니다. 서기전 59년 이전에 낙랑국(樂浪國)의 유민들이 평안도로 밀려 내려오자, 탈해는 다시 배를 타고 떠나 전라북도 남원에 터를 잡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백제가 한강으로 내려오고, 남원도 안전하지 못한 곳이 되자 섬진강을 떠납니다. 이후 탈해는 김해를 정복하려 했으나 김수로왕에게 패배하고 오히려 가야에게 밀려났으며(『가락국기』) 마지막으로 아진포(영일만)에서 토함산을 넘어가 경주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이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석 씨족의 기원과 이동, 정착과정입니다. 고단한 석탈해의 여정을 아주 잘 정리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논문은 그 동안 제가 연재해온 글에서 여러 북방 민족이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온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내용이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만으로 재구성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고, 바로 그 점을 저의 어원 연구로 더 채워보면 좀 더 확실한 얘기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주절주절 얘기를 덧보태는 중입니다. 하하하.

아진포(阿珍浦)는 영일만(迎日灣)를 말합니다. ‘아진+포’는 ‘아잔+개’입니다. ‘아잔’은 ‘아찬’과 같고, ‘아침’과도 같습니다. ‘아ᇫ+ᄋᆞᆫ’의 짜임입니다. ‘아사달’도 같은 어원이죠. 이것을 한자로 번역하면 ‘해를 맞다(迎日)’입니다. ‘해돋이 마을’의 뜻이죠. 그래서 ‘영일’이 된 것입니다.

석탈해는 ‘스키탈 크랄’을 그대로 적은 것으로, ‘방랑자 왕’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청동기와 철기를 한반도와 만주에 전한 세력으로, 북부 이란에서 출발하여 몽골 초원지대를 거쳐 바이칼호까지 왔다가 다시 남동쪽으로 흘러가서 흉노의 일파가 되었다가 고조선의 일부가 되었고, 대동강과 전라도 남원 그리고 가락국을 거쳐, 마침내 한반도 맨 끝인 경주까지 와서 왕 노릇을 하다가 흘해니사금 이후에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이들은 처음에 이란어를 썼겠지만, 초원의 지배자인 흉노에 편입되어 터키어를 함께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석탈해가 자신의 출신지로 말한 용성은, 앞서 말한 세 곳 이외에 흉노전에도 나오는데 이것이 그 방증입니다.

“매년 정월에는 선우가 있는 정(庭)에서 모든 장(24長)이 소집회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 용성(龍城)에서 대집회를 열고 조상과 천지신명과 귀신들에게 제사 지냈다. 가을에 말이 살찔 때에는 대림(蹛林)에서 대회를 열어 백성과 가축의 수를 조사하였다.”- 『사기』 흉노전.

용성이라는 말로 보아 용들이 사는 언덕배기를 말하는 것이고, 이 때 용이란 왕을 나타내는 말일 겁니다. 옛날부터 임금을 용(龍)으로 묘사했는데(龍顔, 龍袍, 龍床, 龍種.), 아마도 이 전통은 흉노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짐작합니다. 그러니까 용성을 비롯하여 용과 관련이 있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은 왕의 혈통을 뜻하게 됩니다. 석탈해도 마찬가지로 흉노의 통치하에서는 왕 대접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흉노는 한나라 무제의 공격으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용성의 한 구성원이던 석탈해도 동쪽으로 흘러와서 동족인 위만조선의 날개 밑에 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대릉하의 용성입니다. 그런데 한 무제의 공격은 흉노에 그치지 않고 조선으로 이어져 결국은 조선도 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됩니다. 이들은 다시 떠날 수밖에 없죠. 한사군이 설치된 지역에서 한나라의 지배를 거부하며 동쪽으로 이동한 세력이 예맥족이고, 이들은 그들을 따라 동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옮겨갑니다. 이 세력이 누굴까요? 바로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 소서노죠.

소서노는 고구려를 세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용성국은 대동강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서노가 압록강에서 주몽을 만날 때 석탈해 세력은 고구려의 남부인 대동강 언저리에 머물렀다는 얘기입니다. 소서노가 주몽과 결별하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 같이 따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한강가에 와서 살 터를 두고 패가 갈립니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인천)으로 가고, 온조는 바람들이(위례)에 남습니다. 그러다가 비류가 다시 돌아와 온조 밑으로 들어가죠. 비류를 지지한 세력은 터키어를 쓰는 세력이었기에, 장자 왕위 계승 원칙에 따라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했는데, 이들의 판단 착오로 몽골어를 쓰는 온조 지지 세력에게 밀려 나라 이름까지 ‘백제’로 바뀝니다. 비류를 지지했던 세력의 일부는 온조 밑으로 들어갔지만, 일부는 백제에서 이탈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동강의 용성을 떠난 석탈해가 이 비류백제의 이탈 세력에 섞였을 것은 훤히 보입니다. 석탈해는 이란계 유목민이었지만 정체성은 흉노의 한 갈래였으며, 나중에 신라에서 터키어를 쓰는 흉노족 김알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들의 실체를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서』 신라전에서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백제인이며 바다로 달아나 신라에 들어와 드디어 그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는 기록은 석탈해가 노서노의 세력과 함께 남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백제가 제 자리를 잡아가면서 터키어를 쓰는 부족들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고, 이들은 남으로 내려갑니다. 그것이 남원에 용성국이 나타난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미 남해안에는 가락국의 세력이 널리 자리를 잡았고, 석탈해는 더는 갈 곳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백제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새로운 땅에는 김수로왕이 가야의 터를 다져서 그 사이에 낀 것입니다. 남원이라는 작은 땅에 안주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탈해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죠. 그 첫 번째 시도가 김수로왕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입니다. 실제로 탈해는 김수로 왕을 찾아가서 한판 싸움을 벌입니다만, 패하죠. 앞선 탈해왕 신화에서 김수로왕이 신민을 거느리고 나가서 탈해가 탄 배를 맞이하려고 했는데, 쏜살같이 달아났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압축한 표현일 겁니다. 갈 곳을 잃은 석탈해는 김수로왕에게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영일만으로 떠나 토함산을 넘어갑니다. 거기에 퉁구스족(혁거세)이 세운 작은 나라가 있는데, 그곳으로 합류하죠. 그것이 신라입니다. 합류하는 과정은 앞서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탈해왕조’에 따르면, 탈해는 신라 2대 남해왕 때 와서 서기 57년에 즉위해 나라를 다스리는데, 남해왕은 서기 4년부터 서기 20년까지 서라벌을 다스렸으므로 탈해가 신라로 건너온 시기는 서기 4년에서 20년 사이가 될 것입니다.

석 씨는 신라 왕가에서 박 씨와 교대로 탈해(4대 57~80) 벌휴(9대 184~196) 조분(11대 230~ 247) 침해(12대 247~261) 유례(14대 284~) 기림(15대 298~) 흘해(16대 310-356)로 왕위를 이어갑니다. 석탈해가 스키타이족이지만 흉노 시절에 터키어를 쓰는 부족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바로 김알지와 순서를 바꿔가며 왕을 계승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7대 내물마립간에 이르러 왕의 호칭도 니사금(퉁구스어)에서 마립간(터키어)으로 바뀌고 이후 왕계는 김 씨로 확정됩니다. 석 씨가 품어준 김알지의 후손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죠. 흘해왕을 마지막 왕으로 이후 석 씨는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춥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흘해왕이 자식이 없어서 김 씨가 왕위를 승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람을 미화시킨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다는 석 씨는 지금까지도 핏줄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석 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얼마 안 되는 희귀성이 되었습니다. 역대 왕을 한 김 씨, 이 씨, 왕 씨와는 좋은 대조를 보입니다. 어째서 이런 걸까요? 석탈해의 행적을 좇다 보면 결론도 간단해지지 않나요? ‘방랑자’라는 별명답게 석 씨 부족 대부분은 어디론가 또 떠나간 겁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제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죠. 바로 일본, 즉 ‘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한 사람 중에는 석 씨의 자취를 일본에서 찾아서 입증하려는 분도 있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왜’가 일본 섬나라가 아니라, 북방 대륙 고조선의 통치 강역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먼지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개국(蓋國)이 거연(鉅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으며 왜는 연에 속한다.(蓋國 在鉅燕南 倭北 倭屬燕)-『산해경』
주나라 성왕 때 월상(越裳)은 꿩을 헌상하고, 왜인은 창초(暢草)를 바쳤다.-『논형』권 19 회국편
유왜인이시맹불(有倭人以時盟不)-안휘성 박현(亳縣)의 원보갱촌 제1호분 벽돌
고구려 수성(遂成:차대왕)이 왜산(倭山)에 나가 사냥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런 기록들은 대부분 지금의 왜가 중국에 알려지기 이전의 기록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에 사는 왜가 아니라 중국 북동부 고조선의 지배를 받던 겨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즉, ‘倭’를 우리는 지금 ‘왜’라고 읽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렇게 읽지 않고 조선 시대 내내 ‘예’라고 읽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에 그렇게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예’에 가까운 발음으로 자신을 지칭합니다. 화(和)가 그것입니다. 이 화도 조선 시대에는 ‘예’로 읽었고,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정신을 ‘대화혼(大和魂)’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개도 안 물어갈 쪽발이 망령이죠.

따라서 위의 기록에 나타난 倭는 ‘왜’가 아니라 ‘예’입니다. 그러면 선뜻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지요. ‘예맥’의 ‘예’입니다. 한나라식의 표현에 따르면 ‘진번’이 되는 것이죠. 김부식의 『삼국사기』 잡지 지리(地理)에 실린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 : 이세적)의 편지에서 고구려의 땅 이름 가운데 ‘평왜현(平倭縣)’이 나오고, 이것은 왜를 평정했다는 뜻인데, 이세적이 친 나라는 고구려이므로, 이 ‘倭’는 고구려 발음으로는 예(濊)이고, 중국 측 기록으로는 ‘진번’이 되는 것입니다. 북방에 있던 왜는 고구려의 한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탈해왕 조의 ‘왜’가 하북성이나 요녕성에 있었다면, 지금의 요녕성 대릉하 중류에 있던 용성(龍城)에서 서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이므로, “용성국은 (왜에서 바라보았을 때) 왜(倭)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다.”는 구절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곳의 ‘왜’는 일본이 아니라 고구려의 한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倭’의 발음이 ‘예’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동예설을 주장한 것은 이영희인데, 함경남도 덕원의 옛 지명이 용성이라는 점을 들어 석탈해가 동예인이라고 했고, 이재환은 덕원의 위치를 들어 석탈해와 관련 없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고대 한국사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교과서에서 설명한 대로 받아들여서 생긴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영희의 가설이 더 맞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나라의 4군은 요동의 평양을 공격하여 설치한 것이므로 한반도 안에 있ᅌᅳᆯ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때의 동예는 하북이나 요녕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파악됩니다. 만약에 이렇다면 대릉하의 용성과 함경도의 덕원 용성은 같은 것이었기가 쉽습니다. 하북이나 요녕의 예족이 동쪽으로 한없이 밀리면서 삼국이 정립한 이후에는 두만강 유역과 바닷가까지 와서 정착했다는 증거가 되죠. 그 와중에 용성에 살던 석탈해도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석탈해의 후예들은 김알지의 후손에게 밀려 왕위에서 멀어지고, 또다시 방랑을 떠납니다.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서 새로운 천황가의 세력으로 자리 잡죠. 일본은 한반도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이합집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여는 마지막 ‘초원지대’로 변합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이 세력들은 자신의 마지막 힘이 남을 때까지 싸움을 마다하지 않죠. 전국시대에 칼을 든 사무라이들이 끝까지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려던 태도는 이들이 마지막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얄궂은 운명이 남겨준 유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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