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단재 신채호가 중국 여순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고 고백했다는 글을 읽으며 단재에 심취했던 젊은 날의 제 가슴도 찡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연구를 많이 했는데, 그것을 글로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어 아쉽다는 그런 얘기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가야에 관해 신채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저의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원을 공부하면서 그 내용을 어느 정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단재가 가야 연구를 했다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시작했을 것이고, 거기에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인도에서 바다를 거쳐 김해에 이르는 과정이 아주 잘 나왔으니, 인도의 드라비다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면서 가야 연구에 한층 깊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단재 신채호는 고조선을 연구하면서 그 전의 연구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한자 표기를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를 합니다. ‘평양’을 ‘펴라’, ‘압록강, 압자하, 패수’ 같은 강을 ‘아리라’라고 하는 식이죠. 하지만 이런 소박한 꿈도 차디찬 감옥에서 그의 순국과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어원학에 손을 댄 김에 혼란에 빠진 6가야국의 이름이라도 정리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이 순국으로 꿈을 미처 못 펼친 단재 신채호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가 창작한 것은 아니고 이미 발표된 강길운 교수의 글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정리합니다. 벌써 30년째 도서관의 책꽂이 무덤 속에서 잠자는 강길운을 꺼낸 것이니, 역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 각기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도 그 분야의 학계에서 땅속 깊이 파묻어버린 두 사람을 동시에 기억하여 위로하는 일일 것입니다.
먼저 ‘가야’라는 말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것부터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가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적었습니다. 인도의 아유타국 왕성에는 물고기 문양이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불교의 목어(木魚)로 바뀌어 한참 뒤에 중국을 거처 우리나라 절로 들어옵니다. 이 물고기를 드라비다어로는 ‘Kayal, Kaye, Kayya, Kăra’ 같이 아주 비슷하지만 다양하게 부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각기 ‘加耶, 伽倻, 駕洛’이라는 식으로 적은 것입니다. 아마도 바다 이미지와 맞물리다 보니 물고기를 중요시한 것 같고,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굳었으며, 불교 양식으로 자리잡아서 한반도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가락국기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가장 애착을 갖고 썼음 직한 글입니다.
불교사는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아주 단순한 궁금증 하나 여쭙고 갑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불교 전래에 대해서 배우기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에 전진의 순도가 처음으로 불경과 불상을 들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한참 전인 189년에 죽은 허황옥은 인도에서 올 때 배에 돌탑을 싣고 왔습니다. 그 돌탑은 지금도 김해에 있습니다. 물론 닳고 닳아서 돌덩이 몇 개 포개놓은 듯한 모습이지만. 그렇다면 불교가 처음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허황옥이 김해 바다에 다다른 그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국사 시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전합니다. 이상합니다. 만약에 중이 직접 오지 않았다거나 불경이 아니라서 허황옥의 탑이 불교 유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불교의 자취가 이렇게 또렷한데,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불교 전래는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이렇게 질문을 하나 해두고 가야로 돌아갑니다.
첫 번째로, 금관가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金官小京金官國一云加落國一云加耶
‘金官’은 드라비다어 ‘절바라’를 옮긴 표기입니다. 터키어로 황금은 ‘zer’이고, 드라비다어의 방언인 타밀어에서는 도시가 ‘cēri’입니다. 터키어로 ‘관리, 통치자’는 ‘văṟi’입니다. 이 터키어 낱말은 드라비다어와 비슷해서 우리말에서도 바다를 옛날에는 ‘바ᄅᆞᆯ’이라고 했습니다. ‘čel, zer’도 마찬가지죠. 지금도 우리는 ‘철’이라고 합니다. ‘김해(金海)’는 ‘철바라’를 번역한 것입니다.
가야 중에서 ‘절바라, 철바라, 쇠바라’ 가야는 통치자가 사는 마을을 뜻합니다. 그러니 금관가야는 처음에 6가야를 통솔하는 우두머리 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가야 중에 대가야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권력을 나중에는 대가야에 넘겨주었겠죠. 이것은 여섯 가야가 인도에서 와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 퍼졌지만, 그들의 힘에 따라서 단일세력으로 외부에 대응하는 가야의 대표는 계속 달라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 함안에 있던 아라가야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옵니다.
咸安郡… 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
‘함(咸)’은 ‘다 함’ 자입니다. 드라비다어로 ‘모두’는 ‘ela’입니다. 이 ‘아라가야’를 한자로 함안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el’은 ‘咸’으로 ‘a’는 ‘安’으로 표기한 것이죠. ‘ela’는 만주어에서도 똑같은 뜻으로 ‘ele’라고 합니다. 아라가야는 ‘모두가 함께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6가야를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 말이죠.
함안 바로 옆 창녕에 갔더니, ‘아라소’가 유명하다며 맛있는 식당을 안내해주더군요. 그래서 아라소가 뭐냐고 했더니, 이 지역에서 나는 특산 우리 소인데, 맛이 으뜸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습니다. 현지인들도 모르는 어원을 나만 알고 있어서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그게 2000년 무렵이니, 벌써 20년 전의 일입니다.
‘아라소’는 아라가야 지역의 소라는 뜻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 시대에는 주변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만주의 여진족, 바다 건너 왜, 유구국에서 단골로 진상을 했습니다. 그 진상품 중에서 동물도 있었는데, 코끼리 같은 것도 받아서 기르다가 결국은 코끼리가 관리인을 밟아 죽이는 바람에 코끼리를 사형에 처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나옵니다. 이런 동물 중의 하나가 물소입니다.
30여 년 전에 KBS-TV ‘역사스페셜’에서 활과 관련하여 자문해주고 직접 고증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작가 한 분이 물소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물소를 수입해서 기르려고 했는데, 그 장소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몰라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녕에서 아라소 한우고기를 씹다가 문득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활은 ‘각궁(角弓)’이라고 합니다. 활채에 뿔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황소뿔은 짧아서 세 개를 대야만 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무용총에 활쏘기 사냥 그림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활채에 매듭이 위아래도 2개씩 그려졌습니다. 뿔이 겹친 부분을 보강하느라고 끈으로 단단히 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개씩 덧댄 활을 삼각궁(三角弓)이라고 합니다.(『이야기 활 풍속사』) 당연히 긴 뿔로 한 번에 댄 것과 비교하면 성능이 떨어지고 불편하죠. 그래서 조선에서는 긴 뿔을 수입합니다. 그게 무소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소뿔이 나지 않습니다. 중국의 양자강 이남이나 일본, 규수 같은 곳에서 나죠.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그 뿔을 수입하느라고 조정은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활이었는데, 그 활채를 보강할 좋은 뿔을 구하느라고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시인으로 잘 알려진 소동파는 조선이 뿔을 구해가면 송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황당한 상소문을 올려 실제로 송나라에서 엄격히 수출이 금지된 적이 있고, 그 때문에 조선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구걸에 가까운 청으로 수출금지 조치를 푼 적이 있습니다. 송나라조차도 무기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생각을 할 지경이니, 조선에서는 당연히 무소뿔 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하려고 갖은 방법을 모색하고 시도합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소와 한우를 교배하여 뿔이 긴 소를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조선 조정에서는 왜에서 진상한 물소를 국내에서 키우려고 했습니다. 물소는 남방 지역의 동물이기에 추위에 약합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우리나라 안에서 기후가 가장 고온다습한 지역을 찾았고, 바로 경남의 창녕으로 낙점되었습니다. 창녕에는 지금도 이름난 우포늪이 있죠. 그래서 거기에다가 물소를 보내어 키우라고 창녕군수에게 지시합니다만, 실패로 끝납니다. 물소가 한국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 어딘가에 있는데, 제가 이런 글을 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어서 한 귀로 흘려듣듯이 한 눈으로 흘려읽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에 왕조실록에서 읽은 기억이 있으니, 이 대목이 꼭 필요한 분은 열심히 찾아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 기능이 아주 좋으니 금방 찾으실 것입니다.
무소뿔이 부족하던 옛날에는 국내의 황소뿔 중에서 가장 긴 것을 임시방편으로 활에 썼습니다. 그것을 향각궁(鄕角弓)이라고 합니다. 긴 무소뿔로 댄 활은 흑각궁(黑角弓)이라고 합니다. 무소뿔의 빛깔이 검기 때문입니다. 황소 뿔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해도의 해주 지역과 경상도의 창녕 지역에서 좋은 뿔이 난다고 했습니다. 황해도 해주의 소는 어떤 까닭으로 다른 곳의 황소보다 뿔이 더 긴지 모르겠으나, 창녕의 황소 뿔이 다른 지역보다 더 긴 까닭을 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물소를 키운 곳이니, 틀림없이 물소와 황소를 교배하려고 시도했을 것이고, 일부는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라소’가 지금까지 남아서 명성을 유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아라소가 조선 시대 물소를 기른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천의 권영구 궁장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황소 뿔로 만든 휘궁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딱 하나 만든 적이 있습니다. ‘휘궁’은 뿔이 짧은 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직접 써보니, 쓰는 데 큰 문제는 없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뿔에서 잔금이 가면서 트집이 잡히더군요. 그렇게 되는 것을 ‘소풍 난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탄력이 떨어지고 곧 뿔이 완전히 떨어져나갑니다. 그래서 활을 못 쓰게 되죠.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조선 시대 내내 중국에 굴욕 외교를 펼치면서도 무소뿔 확보에 생사를 걸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무기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활이었습니다. 무과를 볼 때 7가지 병장기를 보는데, 그중에서 4가지가 활쏘기 능력 테스트였습니다. 목전, 철전, 애기살, 기추. 조선 후기로 가면 유엽전까지 추가되죠. 활쏘기를 못하면 무과 출신이란 어림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활이 얼마나 어렵냐면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서 보통 15년은 죽어라고 쏴야 제대로 배웁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경우에는 34살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보통 무과로 방향을 결정하는 나이는 사서삼경을 다 읽을 무렵인 15~16세쯤입니다. 그러면 충무공의 경우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 겨우 무과에 합격한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무술이 한국의 전통 활쏘기입니다.
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며 속으로, ‘이 놈 봐라?’하시는 분은, 앞서 제가 『한국의 활쏘기』를 냈다는 사실을 깜박 잊으신 겁니다. 『한국의 활쏘기』는 1929년에 나온 『조선의 궁술』(조선궁술연구회) 이후 처음으로 70년만에 활쏘기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국궁 종합 입문서입니다. 1999년 학민사에서 내어 3판을 찍고, 2013년에 개정증보판을 찍었습니다. 오늘 아라소와 관련하여 활쏘기 얘기를 한 이 내용은 여기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겁니다. 국궁계에서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처음 얘기하는 것이어서도 그렇고, 과녁 맞히는 일 이외에는 아무 데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세 번째로, 고령에 있던 대가야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렇게 나옵니다.
高靈郡本大伽倻國
고령과 대가야가 일치하려면 ‘高=大’인 말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말에 있습니다. ‘말잠자리, 마루’ 같은 데서 보이는 ‘ᄆᆞᄅᆞ(宗)’가 그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도에서 온 말입니다. 드라비다어로 ‘mēlu’가 ‘정수리, 상류’의 뜻입니다. 커지다(mali), 말잠자리(mal)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대가야를 옛 표기로 적으면 ‘ᄆᆞᄅᆞᄀᆞᄅᆞ, 말가라’가 되겠지요.
가야는 물고기를 뜻하는 말에서 시작하여 물고기 모양이 그려진 또는 그런 모양의 왕성으로 뜻이 넓혀 쓰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들으시면 또 발끈하겠지만, 가야지역과 일본 지역에서 보이는 열쇠 구멍 모양의 무덤 ‘이른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저는 이 물고기 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도 드라비다에서 온 통치자들 무덤 양식이죠.
그런데 신라 후기에 이르면 이들이 신라와 백제 왕조의 주축 세력으로 자리 잡는데, 각 지역에 왕성이라는 뜻의 지명이 생기니 그 이미지를 없애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한자로 지명을 옮길 때 加를 ‘더으다’로 읽어서 ‘덜, 돌’로 적게 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령(寧, 靈)입니다. 靈이 왜 ‘돌’이냐고요? ‘덜미’는 신을 뜻하는 가야계 언어입니다. ‘입덧, 덧들다’의 ‘덧, 들’이나 ‘탈(病)’도 이것과 같은 뿌리를 지닌 말입니다. 꼭두각시놀음에서 덜미가 있죠.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을 조종하는 게 뭔가요? 신이죠. 사람이 목덜미를 잡히면 꼼짝 못 합니다. 그렇게 조종하는 것이 덜미죠.
따라서 고령은 ‘마라돌’이겠지요? 아마도 우두머리가 사는 너른 들판 또는 높은 고을이 될 것입니다. ‘말가라’와 ‘마라돌’은 같은 말입니다.
네 번째로, 함령의 고령가야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렇게 나옵니다.
古寧郡本古寧加耶國今咸靈
‘古=咸’이 되는 말을 드라비다어에서 찾아봅니다. ‘늙은, 낡은’은 ‘mutu’이고, ‘전부, 모두’는 ‘muttum’입니다. 우리말 ‘모두’도 여기서 온 말로 보입니다. 古寧은 ‘모두가라’겠지요. 6가야 중에서 어른 노릇을 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어른 가야가 되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고성의 소가야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봅니다.
固城郡本古自郡本小加耶國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조에는 이 밖에 ‘古自, 古州, 鐵城’도 나옵니다. 드라비다어로 ‘작은, 좁은’은 ‘ciṟu’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말에도 있습니다. ‘실개울, 오솔길’에서 볼 수 있죠. 아이누어에서는 ‘선철(銑鐵)’을 ‘sira kami’라고 하는데, 여기서 ‘sir’을 볼 수 있고 이것이 위의 지리지에서 ‘小=鐵’로 대조된 것입니다. 터키어로 ‘옛’은 ‘koja’인데, 이것이 그 계통의 신라어인 ‘고블>고을’과 만나서 ‘옛고을’이라는 뜻의 ‘古自’가 된 것입니다. ‘自’는 끝소리(ㅈ) 첨가 현상. 터키어로 ‘굳은’은 ‘sert’여서 ‘固’는 여기서 온 말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여 ‘固=小=鐵’의 등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가야는 ‘실가라’를 적은 것인데, 뜻은 ‘쇠를 잘 다루는 나라’라는 뜻일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성산가야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렇게 나옵니다.
星山郡本一利郡一云里山郡今加利縣
‘星=一利=里’를 보겠습니다. 드라비다어로 ‘별, 금성’은 ‘veḷḷi’인데, 경상도 사투리 ‘빌’과 똑같습니다. 이 말은 드라비다어에서 왔을 것입니다. 터키어로는 하나가 ‘bir’이니, ‘리(利)’는 끝소리 첨가 현상일 것입니다. 터키어로 마을은 ‘beled’입니다. 위에서 본 세 한자가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산가야는 ‘비리가라’를 적은 말인데, 이것은 ‘큰 마을이 있는 나라’라 뜻일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이 성산가야를 ‘벽진(碧珍)’ 가야라고 했습니다. 성산과 벽진은 같은 말입니다. 표기만 달리 한 것이죠. 즉. 碧은 ‘푸를 벽’ 자이고, 珍은 ‘돌(보배) 진’자입니다. 보배가 제아무리 빛나야 돌이죠. 요즘 말로 그대로 읽으면 碧珍은 ‘푸르돌’이 됩니다. ‘veḷḷi’이죠.
이상을 보면 6가야가 모두 어감은 다르지만 자신이 가장 뛰어난 나라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름이 붙었습니다. 당사자들의 자부심이 잘 드러나는 이름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에 이런 의미를 붙이지 않는 사람이나 겨레는 없을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들 중에서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강해져서 나머지 가야를 통솔하는 방식으로 가락국은 세력균형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신라로 합병되고 말죠.
지면이 더는 허락지 않아서 여기서 가야 얘기를 그치겠습니다. 이 정도 소개라도 저승에 계신 신채호 선생의 영혼에 작은 위안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도서관의 무덤 속에서 30년도 넘는 깊은 잠에 빠질 책을 내신 강길운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번도 뵌 적 없는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