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글 윤현주 작가, 사진 채원상 기자] 언젠가부터 나무의 ‘옹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의 태(態)에 빼앗겼던 시선을 옹이에 두기 시작한 건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다.
조금 더 친절해지자면 내게 휘몰아친 고민과 시련이 어떤 흔적으로 남을까, 고심하면서부터다.

나무에 옹이는 삶의 흔적이고 성장의 증거다.
나무가 성장할 때 나무줄기 세포와 자라나는 가지 세포가 교차 되면서 생긴 흔적이 옹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일수록 더 많은 옹이를 품고 산다.
세월만큼 키워낸 가지와 꿋꿋이 겪어낸 삶의 풍파가 차곡차곡 쌓였을 테니 옹이 또한 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m에 달하는 수고의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느티나무는 480여 년을 살아온 나무로 세월에 걸맞은 웅장한 기세를 지녔다.
그리고 그 웅장함 속엔 고된 세월의 무게가 오롯이 드러난다.
군데군데 보이는 옹이는 나무의 크기만큼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수부리 느티나무에서 마디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상처 가득한 우리네 아버지의 손을 떠올렸다.
굳은살처럼 박혀있는 옹이에서 고집스럽고 단단한 그러나 한없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을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된 흔적같다고 할까?

사람들은 옹이를 상처와 고집스러움에 비유한다.
옹이 많은 나무가 갈라지거나 뒤틀려서 목재로서 가치가 없듯 상처 많은 사람 또한 타인에게 사랑을 주는 게 인색하다고 여긴다.
물론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 중에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벽을 치고 사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삶의 모습이 다르듯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움켜주고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상처를 이겨내고 더 괜찮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이들 또한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나무의 옹이가 후자라고 생각한다. 죽은 세포와 새로운 세포는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니지만 애써 밀어내지 않고 서로를 품지 않는가?
이는 깊고 따뜻한 옹이의 속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누구나 옹이 진 마음 한 자락씩은 품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괜찮은 인생이란 하나, 둘씩 쌓여가는 옹이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893 느티나무 481년 (2023년)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청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