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 6주를 찾아서 ⑥] 고려 천리장성은 어디에?
[강동 6주를 찾아서 ⑥] 고려 천리장성은 어디에?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와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들
  • 조하준 기자
  • 승인 2023.12.10 20:3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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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의 기록을 통해 본지에서 밝힌 고려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 천리장성을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전 기사를 통해 고려시대엔 ‘압록강’이 2개가 있었고 그걸 『고려사』에선 ‘鴨江’과 ‘鴨綠江’으로 중국 25사에선 ‘鴨淥江’과 ‘鴨綠江’으로 구분해서 기록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동시에 고려 국경이었던 곳은 ‘鴨江’ 혹은 ‘鴨淥江’이었으며 그 강은 지금의 요하를 가리킨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또한 강동 6주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었던 귀주(龜州)는 1233년 고려 역적 홍복원(洪福源)에 의해 몽골의 심양로(瀋陽路)에 편입됐고 나머지 5개 주는 1270년 고려 역적 최탄(崔坦) 등에 의해 몽골의 동녕로(東寧路)에 편입된 사실도 확인했다. 그를 통해 강동 6주가 요령성 요양시 및 심양시 주변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와 앞으로 추가적으로 더 밝혀야 할 점 등에 대해서 짚어볼 것이다.

고려 천리장성

요나라와 3차례 전쟁을 치른 후 고려는 1033년부터 1044년까지 11년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것은 결국 태조 왕건(王建)으로부터 내려온 북진정책의 좌절을 상징하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장성은 방어용이기에 장성을 축조한다는 것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겠다는 의도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 국사 교과서에선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를 아래의 지도대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도를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천리장성을 축조한 목적은 거란족의 재침(再侵)을 막기 위해서인데 이 지도를 보면 압록강 하구가 텅 비어 있어 장성 축조의 의미가 별로 없어 보인다.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고려 천리장성. 만약 이대로 장성을 축조했다면 압록강 하구가 텅 비어 있어 거란의 재침을 막기 어렵다.(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 천리장성이 축조된 곳은 낭림산맥과 개마고원이라는 험준한 산악지대인데 이 지역은 현대에도 강삭철도가 다닐 정도로 교통이 열악한 곳이다. 이런 곳을 가로질러 장성을 쌓는 건 포클레인이나 불도저 같은 중장비가 있는 현대에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란족이나 여진족은 모두 기마민족들인데 이런 자들이 개마고원 같이 제대로 길도 안 나 있는 험악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쳐들어올 만한 실익이 없다. 이상의 이유로 본지에서는 종전의 천리장성의 위치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고려사』에 기록된 천리장성의 기록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려사』 권 82 지 36 병 2 성보 편에 적힌 천리장성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덕종) 2년(서기 1033년)에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비로소 북방에 관방(關防)을 쌓도록 했다. 서해 물가의 옛 국내성(國內城)을 경계로 압록강 하구에서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개의 성을 거쳐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개의 성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 길이가 1,000여 리에 뻗쳤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자였다.”

얼핏 보면 위 지도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록을 보면 장성의 동쪽 끝이 화주(和州)임을 알 수 있는데 국사학계에서는 이곳을 함경남도 영흥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따라 비정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화주가 정말로 함경남도 영흥군이었을까?

고려-요 국경은 어디였나?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를 알기 위해선 먼저 2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강동 6주가 요하 동쪽의 요령성 요양시와 심양시 일대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 사실이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사』 권 38 지8 지리 2에 적힌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의 기록이다.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하등주이며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 월희(越喜)의 옛 성이었으나 발해가 회원부(懷遠府)를 두었고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종이 이 땅이 고려와 이웃해 있다고 하여 개태(開泰) 초에 주를 설치했고 한족 포로들로 채우게 했다.”

신주가 고려와 이웃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거란과 고려 양국 간의 국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신주란 곳은 어디인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적힌 신주의 위치는 이렇다.

“본래 월희의 옛 땅이고 발해가 회원부를 설치했다. 치소는 회복현(懷福縣)이다. 요나라가 신주 창성군을 설치했으나 원나라가 폐지했다. 옛 성은 오늘날 봉천성 철령현 동북쪽에 있고 개원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本越喜故地渤海置懷遠府治懷福縣遼置信州彰聖軍元廢故城在今奉天鐵嶺縣東北接開原縣界)”

청나라 때 편찬된 『성경강역고』에도 신주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다.

“생각건대 오늘날 창도부(昌圖府) 동북쪽의 팔면성(八面城)이 대개 곧 요나라 신주의 옛 성이다.(按今昌圖府東北之八面城蓋即遼信州故城)”

이 팔면성은 현재도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에 팔면성진(八面城鎭)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 위치는 요령성 북쪽 끝으로 오늘날 길림성 사평(四平)시와 접경하고 있다. 요나라 신주의 위치는 바로 이곳이다. 만일 우리의 상식대로 고려의 국경이 오늘날 압록강이라면 아마도 신주가 고려와 이웃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서 고려와 요나라 양국 간 국경이라고 언급한 신주(信州)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성경강역고』는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 팔면성진이 신주라고 기록하고 있다.(출처 : 구글 지도 갈무리/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 팔면성이란 곳에서 압록강 하류의 평안북도 의주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무려 336.4km로 부산광역시에서 경기도 의정부시까지 직선거리와 맞먹는 거리다. 부산과 의정부가 이웃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기록에 맞게 해석하면 고려의 영토는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북쪽인 길림성 사평시 일대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서 송나라 사신 허항종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따르면 고려와 금나라 간 국경이 신라산(新羅山) 깊은 곳에 있는데 그 신라산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라고 했다. 고려와 이웃해 있다는 요나라의 신주는 그 두 곳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즉,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은 남쪽으로 요양시, 심양시 일대부터 북쪽으로 길림성 사평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쌍성총관부의 위치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갈 곳은 장성의 종점이라는 화주이다. 화주는 이후 1258년 고려 역적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몽골에 팔아넘겼는데 몽골은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했다. 이 쌍성총관부가 어디에 설치됐는지를 알면 자연스럽게 화주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다.

먼저 『고려사』 권 130 열전 43 《반역열전》 조휘(趙暉) 편에 적힌 쌍성총관부 설치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고종 45년(서기 1258년) 몽골군의 병력이 대거 침입하자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장주(長州), 의주(宜州), 문주(文州) 등 15주 사람들이 저도(猪島)로 들어가 보전했다.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저도가 성은 크지만 사람이 적어 지키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여 마침내 15주 사람들을 죽도(竹島)로 옮겼다.”

몽골군이 1258년에 쳐들어왔을 때 고려의 고주, 화주, 정주, 장주, 의주, 문주 등 15개 주 사람들이 저도라는 섬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국사학계에선 고주는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화주는 함경남도 영흥군, 정주와 장주는 함경남도 정평군, 의주는 강원도 원산시, 문주는 함경남도 문천군이라고 한다.

기록으로 본다면 당시 몽골군이 이 지역으로 쳐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사학계의 지명 비정은 모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올바른 지명 비정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상의 지역들은 대개 함흥평야 일대에 위치해 있는데 몽골에서 이곳으로 쳐들어오려면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을 넘어야 한다. 몽골군이 굳이 개마고원이라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어서 쳐들어올 만큼 실익이 있을까? 이 개마고원이란 곳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가 몸소 입증해준다.

화주 일대가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라고 가정할 경우 마침 장진군은 당시 몽골군이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장진군 일대는 지금도 도로가 좁은 산길인데다 현재도 철도 장진선은 강삭철도로 운영하는 곳이다. 산의 경사가 너무 급해서 도저히 철도를 부설할 수가 없어서 케이블로 열차를 감아올려서 다니는 것이다.

현대에도 이 정도로 개마고원은 도로 시설이 열악한 곳인데 13세기 중반이면 더욱더 길이 좁고 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철도도 제대로 못 놓을 정도로 험한 개마고원을 13세기 중반에 몽골 기병이 넘어서 왔다는 건 참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문제지만 화주를 비롯한 15개 주의 주민들이 저도라는 섬으로 대피했는데 그 저도란 섬에 큰 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동해안에는 큰 성을 쌓을 만한 큰 섬이 거의 없다. 서해안이나 남해안이면 몰라도 동해안에는 울릉도, 독도 정도를 빼면 떠오르는 섬이 없다시피 하다.

왜냐하면 동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인 서해안이나 남해안과 달리 단조로운 해안선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울릉도나 독도는 모두 육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전의 지명 비정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봐야 한다.

앞서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국경이 신주(信州)라고 했는데 신주의 위치는 앞서 말했듯이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의 팔면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국경은 신라산인데 그 신라산의 위치는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과연 천리장성의 종점인 화주가 함경남도 영흥군이었겠는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는 이후 명나라에서 설치한 철령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고려사』 권 137 열전 50 우왕 5의 기록에 우왕이 주원장에게 철령위 설치에 항의하는 내용의 표문을 보내면서 거기에 주원장(朱元璋)이 한 말이 인용돼 있다. 그 말을 그대로 실어보면 이렇다.

“철령의 이북, 이동, 이서는 원나라 개원로에 속했던 곳이니 소속 군민들은 모두 요동에 속하게 하라.(鐵嶺迆北迆東迆西元屬開元所管軍民仍屬遼東)”

철령위 설치 당시 명나라는 철령의 이북, 이동, 이서가 원나라 개원로(開元路)에 속한 곳이었다는 점을 들어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다. 또 해당 표문에서 우왕은 화주가 쌍성(雙城)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당시 우왕은 조휘와 탁청 등이 금나라 심주로(瀋州路)에 쌍성현(雙城縣)이란 곳이 있는 걸 알고 고려 화주를 그곳이라 속여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주원장에게 설명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우왕의 표문에 따르면 1258년 고려 역적 조휘와 탁청 등이 화주 일대를 몽골에 들어다 바칠 때 고려의 화주를 금나라의 심주 쌍성현으로 속였고 그 때문에 화주가 쌍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국사학계의 지명 비정대로 지도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곳에 있어서 화주를 금나라 심주 쌍성현이라고 속일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의 위치와 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고려 화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조휘와 탁청은 고려 화주를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이라 속였고 그 때문에 화주가 '쌍성'이 됐다고 했는데 과연 속을 만한 위치인가?(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 서쪽 60리라고 한다. 그런데 조휘와 탁청 등이 고려 화주를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이라고 속였다면 두 곳이 비슷한 위치에 있어 헛갈리기 쉬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은 요령성 철령시 인근에 있는데 고려 화주는 멀리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었다면 오히려 속는 사람이 바보일 것이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 『고려사』에 적힌 우왕의 표문 내용 대부분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분명히 주원장은 철령의 이북, 이동, 이서를 달라고 했는데 우왕은 철령 이북의 땅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볼 때 우왕의 표문 내용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

앞서 이미 철령위의 위치를 언급할 때 보았듯이 주원장이 말한 철령은 만주의 철령인데 우왕이 말한 철령은 한반도의 철령으로 보인다. 『명사』에 적힌 기록과도 상이한 점을 보면 아마도 『고려사』에 적힌 우왕의 표문은 일정 부분 조선시대 사가들에 의해 변조된 것으로 보인다.

철령위의 위치가 봉집현이었던 철령성 즉, 요령성 심양시 소가둔구 봉집보였다고 했으니 쌍성총관부 역시 한반도에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철령의 주변이 옛 개원로 소속이었다면 개원로와 쌍성총관부도 분명히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원로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기록된 개원로의 기록을 살펴보면 본래 금나라의 첫 수도였던 상경 회령부였고 치소(治所) 즉, 중심지는 황룡부(黃龍府)라고 기록돼 있다. 황룡부는 오늘날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을 말한다. 그랬다가 1267년에 현재의 요령성 철령시 개원시로 치소가 옮겨졌다고 한다. 따라서 개원로란 지금의 요령성 철령시와 길림성 장춘시 일대를 아우르는 행정구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편을 보면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1258년에 원나라에 투항할 때 기록을 보면 화주의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기록은 이렇다.

“목조(穆祖)는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식구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동북면의 의주(宜州)에 이르렀다. 백성 170여 호가 같이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 고려는 목조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고 고원(高原)을 지켜 원나라 군사들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 때 쌍성(雙城) 이북이 개원로에 속했다. 원나라 산길대왕이 와서 쌍성에 주둔하여 철령 이북을 취하려 하며 재차 목조에게 사람을 보내 원나라에 투항하도록 청했고 목조는 부득이 김포노(金甫奴) 등 1,000여 호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 기록에 쌍성 이북이 개원로에 속했다고 했는데 역으로 말하면 쌍성 즉, 고려 화주는 개원로 남쪽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주석에는 쌍성이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이라 했지만 만약 그 말대로라면 개원로가 길림성 장춘시부터 함경남도까지 매우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니 현실적으로 맞지 않아 보인다.

국사 교과서에 표시된 쌍성총관부의 위치와 본지에서 밝힌 쌍성총관부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결국 쌍성총관부가 설치됐던 화주는 철령 이동, 이서, 이북 지역 안에 있어야 하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 국경이었던 신주 인근에 있으면서 개원로의 치소가 있던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 남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범위 안에서 찾아본 결과 장춘시 서북쪽에 쌍성보진(雙城堡鎭)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이 실제 쌍성총관부가 설치됐던 고려의 화주로 보인다.

화주 동쪽의 ‘바다’와 천리장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다는 식의 기록은 조선시대 들어 화주의 위치를 함경남도 영흥군으로, 장성의 서쪽 끝을 압록강으로 보면서 덧붙인 기록으로 보인다. 

다만 '바다'에 대해선 海의 의미가 ‘바다’가 아닌 다른 의미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고대 중국에서는 海를 ‘바다’ 외에도 넓은 평원이나 큰 강, 큰 호수 등에도 썼다.

화주로 지목한 길림성의 쌍성보진(雙城堡鎭) 인근에 송화강이 있는데 송화강은 과거 범선을 타고 길림성까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강 폭이 매우 넓었다. 또 하중도(河中島)가 매우 많아 몽골의 침입 당시 화주 인근 백성들을 섬으로 대피시켰다는 기록도 어렵잖게 설명된다.

따라서 실제 고려 천리장성은 요하를 따라 길림성 장춘 서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축조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고구려 천리장성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 천리장성이 실은 고려 천리장성이었을 수도 있고 고구려 천리장성을 고려가 개축(改築)한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점들

이렇게 총 6개의 기사를 통해 고려의 서북쪽 영토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어 학계에서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추려 본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함길도의 북쪽 끝은 두만강 이북인 공험진(公嶮鎭)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북간도 지역은 조선의 영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평안도의 북쪽 끝은 압록강이라고 적혀 있다. 고려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 고려의 영토는 요양, 심양 인근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60년 뒤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엔 압록강 이북의 옛 땅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강동 6주의 위치가 왜곡된 이유 또한 조선이 옛 영토를 잃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안북도로 교치된 지명에 강동 6주의 연혁을 삽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요나라 동경 요양부의 위치다. 강동 6주의 위치를 보면 동경 요양부의 위치가 과연 요령성 요양시일 것인지 의문이 남게 된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동경 요양부가 한 번 옮겨졌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경 요양부의 연혁을 소개하면서 “본래 이곳을 말한다”는 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동경 요양부가 어떤 사연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동경 요양부가 고려의 강동 6주 획득 이후 옮겨졌다면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경 요양부가 요령성 요양시에만 있었다면 “본래 이곳을 말한다”는 말은 나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요․금 교체기에 고려가 획득한 포주성(抱州城)과 내원성(來遠城)의 위치이다. 본래 이 두 성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가 상실했다가 1115년에 수복에 성공한 성이다. 종래엔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알려졌지만 이 또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주성과 내원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도 앞으로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 밖에 중국 25사 지리지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지에서 밝힌 내용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위한 답변이다. 『요사』 지리지에 나온 귀주, 통주, 철주 등은 고려의 강동 6주와 이름만 같은 요나라의 다른 행정구역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25사 지리지의 특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중국 25사 지리지에서 어떤 지명이 거론된다고 해서 그곳이 모두 그 당시 왕조의 땅이었다고 이해하면 절대 안 된다. 중국 25사 지리지는 현재는 그 땅이 자기네 땅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들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모두 지리지에다 기록했다.

한 예로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 지리지엔 이미 오래 전에 고구려에 편입된 요동군도 기록돼 있다. 심지어 북위 자신들이 고구려 장수왕, 문자명왕 등을 '요동군개국공'에 책봉한다고 버젓이 기록했는데도 그렇다. 고구려 태왕들에게 요동군의 지명을 따서 공작 작위를 내린 이유는 당시 요동군이 고구려를 대표하는 지명이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자기네 지리지에 실어 자기들 땅인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25사 지리지에 어떤 지명이 거론된다고 해서 모두 그 당시 왕조 땅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나라나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은 모두 엄밀한 의미에서 북방 민족 왕조이기에 중국 왕조에 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중원에 진출하면서 일정 부분 중화사상을 수용했고 피정복자인 한족 관료들도 많이 등용했다. 그 때문에 『요사』, 『금사』 등의 지리지도 기존 중국 역사서 서술 방법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끝으로 이번 고려 강동 6주와 관련한 6개의 기사를 작성하는데엔 인하대학교 윤한택 교수와 복기대 교수 외 3인의 공동저자가 공저한 『압록과 고려의 북계』가 많은 참고가 됐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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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철 2024-02-02 00:04:55
기자다운 기사입니다.

양규 2023-12-29 03:53:18
매우 훌륭한 기사네요! 앞으로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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