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상고사] 메마른 학문에도 향기가 있다
[정진명의 어원상고사] 메마른 학문에도 향기가 있다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68-학문의 향기’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4.01.0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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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천상업고등학교 교지 『신원(新苑)』 표지.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1992년의 일입니다. 충남 서산여고에서 충북 제천상고로 발령을 받아서 갔는데, 업무로 문예를 맡았습니다. 제천상고에서는 해마다 교지를 만듭니다. 제가 문학(시)을 전공했다는 소문이 미리 돌았는지 저에게 그 업무를 주어서 맡았습니다. 교지 이름은 『신원(新苑)』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저의 작은 논문을 하나 실었습니다. 제목은 ‘삼국유사 고조선 조의 지명 고찰’이었고, 앞서 말한 대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여러 이름을 어원으로 풀어본 것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윤내현 교수의 책(『한국고대사신론』)을 읽고 받은 감동 때문이었고, 이 책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윤내현 교수에게 보냈습니다.

이듬해 집이 있는 단양고등학교로 적을 옮겨 정신없는 생활을 하는 중에 제천상고에서 재발송된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받아보니 발송자가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의 윤내현 교수였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정진명 선생님.
보내주신 『新苑』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실려 있는 정 선생님의 글 「삼국유사 고조선 조의 지명 고찰」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시는 선생님께서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데 우선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 선생님께서는 문학을 전공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지명이 지닌 의미를 밝히는 것이 역사를 전공한 사람보다 더 가능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 선생님의 지명 고찰의 내용은 저에게는 매우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정 선생님의 견해에 동감입니다.
외람되게 한 가지 말씀을 드린다면 정 선생님께서는 하늘을 숭배했던 환웅족을 외래족으로보시고 곰 숭배족을 토착족으로 보셨는데 저는 환웅족도 토착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정 선생님 글의 주된 요지는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만 참고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중략)
참고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학문연구에 더욱 진전 있으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3년 2월 19일.
윤내현 드림 [자필 서명]

이젠 누렇게 빛바랜 편지지와 110원짜리 우표가 붙은 편지 봉투에서 30년 흘러간 세월이 느껴지며 온갖 가지 감정이 회오리칩니다. 편지는 A4용지에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관공서에 막 컴퓨터가 공급되던 시절이었고, 1993년이면 단양고등학교 교무실에 피시 컴퓨터가 2대 놓여서 교직원 전부가 공동으로 쓰던 때였습니다. 아마도 대학은 조금 더 빨리 보급되었는지, 윤내현 교수도 그 컴퓨터로 프린트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감동한 것은, 교수라는 직책이 연구와 교육으로 정신없이 바쁜 직업인데도, 시골구석에서 보낸 허접한 책을 읽고, 장문의 답장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저도 지금은 가끔 다른 분의 책을 공짜로 받아보곤 하는데, 거기에 일일이 꼼꼼하게 답장 편지를 쓰지는 못하는 형편이어서, 지금 생각해도 윤내현 교수의 답장에 담긴 성의는 놀라운 일입니다.

어원에 관한 글을 쓰는데, 이런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은, 학문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람의 향기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향기는 세월이 지날수록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널리 퍼져갑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가슴에도 30년 전의 순수했던 향기가 전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저는 이후,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느라고 정신이 없는 세월을 보냈고, 나이가 들 대로 들어서 늙은이가 되어 퇴임했는데, 얼마 전에 이 잡문을 쓰느라고 이런저런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 보니, 윤 교수는 역사학계의 이단아로 별의별 고초를 다 겪으셨더군요. 심지어 같은 역사학을 연구하는 분들이 고발하여 국정원의 조사까지 받았다고 하니, 이건 탄식을 넘어서 분노까지 치미는 일이었습니다.

학문에서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분야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지표인데, 한때 건강하지 못했던 시절의 혼란했던 징후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지금이야말로 건강한 시절이라고 해야 할 텐데, 이곳저곳 눈치를 보니 역사학은 오히려 더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다른 세월 앞에서 옛사람의 탄식을 떠올리며 또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 길은 먼데, 날은 벌써 저무네!(日暮道遠)”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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