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남의 말을 아는 사람은 제 말을 모른다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남의 말을 아는 사람은 제 말을 모른다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2-삶속의 진짜 우리말’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4.02.22 08: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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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말은 자신이 이해한 세계를 나타내는 수단이자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전혀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본래의 우리말을 아주 잘 보존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투리를 연구할 때 취재 대상으로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 ‘무식할 것’입니다. 남의 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천상 자신이 알고 있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간 적이 없는 노인들을 찾아가서 그분들이 쓰는 말을 찾이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오히려 남의 말을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어 좀 섞어 쓰면 그럴듯해 보이는 사회 분위기가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은 지배자를 지향하는 성향의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옛날에는 반상의 구별이 뚜렷해서 상놈이 굳이 양반의 말투를 흉내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로 넘나들 일이 없었던 것이죠. 양반이 상놈으로 될 리도 없고 상놈이 양반으로 될 리도 없으니, 그냥 자신들의 언어를 쓰면서 몇 백 몇 천 년 동안 지내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언어 변화의 측면에서 보면 더욱 위험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배층의 언어는 왕족의 언어를 닮는데, 왕족의 언어는 세계 문화의 중심을 향하고 있거든요. 지금은 미국이겠죠? 그러니 지배층으로 올라갈수록 우리의 본래 언어와는 점점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노인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 말의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9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저는 가끔 깜짝깜짝 놀랍니다. 명색이 시인으로 살아온 제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묘한 충격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지난번에는 김장이 끝났길래, 밥상에 올라온 김치를 보고서 김장 김치냐고 여쭈었더니, ‘지레김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는데, 집사람이 그걸 알아듣고는 다시 ‘지레김치’라고 재방송해 줍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김장을 담그기 전에 간단히 담가 먹는 김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지레짐작’과 같은 조어법이겠죠?

또 ‘붉새’라는 말도 쓰시기에 뜻을 여쭈어보니, 해가 뜰 때 하늘이 붉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네요. 저녁의 서쪽 하늘에 드리우는 것은 ‘노을’이고, 아침에 동녘 하늘에 드리우는 것은 ‘붉새’입니다. 붉새면 날이 흐려 비가 오고, 노을이 지면 다음 날은 가물답니다.

‘자가품’이라는 말도 쓰십니다. 일을 하다가 어깨 같은 곳에 갑자기 통증이 생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작+아픔’의 구성이 보이는데, ‘작’은 ‘작은’의 어근이겠죠? 그럭저럭 견딜만하지만, 그냥 두기에는 불편한 정도의 아픔을 말하는 걸 겁니다.

제가 허접한 농담을 잘하는 것을 보신 장모님이, 절더러 ‘싱검쟁이’라고 합니다. 싱거운 소리를 잘한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이런 말을 우리는 잘 쓰지 않습니다. 실제로 ‘싱검쟁이’라는 말에 한글파일에서는 붉은 밑줄이 쳐집니다.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거나 맞춤법이 틀렸다는 경고죠. 한 번, ‘싱거움쟁이’라고 써볼까요? 그랬더니 ‘싱거우면 쟁이라고’로 고치라는 권고 글이 뜨네요. 으하하하.

맞춤법에 맞추어 만들어본 ‘싱거움쟁이’는 어느 모로 보아도 ‘싱검쟁이’의 정겨운 누낌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런 말들은 정말 정겹고 살가운 말인데도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다 아는 것 같은데 모릅니다. 그러면서 점점 책 속의 언어로 빨려 들어갑니다. 책 속의 언어는 죽은 언어입니다. 죽은 언어를 바른 언어로 생각하고, 산 언어를 버립니다.

자신의 언어를 버리고 남의 언어 속으로 빨려드는 중산층의 의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정말 살아있는 우리의 언어가 있습니다. 남의 말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제 말을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중산층의 허영심입니다.

이런 허영심은 우리가 쓰기 꺼리는 말에서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애기집’이라고 해야 하는데 ‘자궁’이라고 하고, ‘똥’ 같은 말은 아예 쓰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 말을 안 쓰려고 정말 애들 쓰십니다. 개인들의 이런 노력은 불쌍하기는 하지만, 욕까지 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방송계의 언어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분노가 치미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자궁은 남성 중심의 언어이니 ‘포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여성단체의 대표 말이 버젓이 아홉 시 공중파 뉴스에 나오는 지경입니다. 포궁이란 말은 우리가 쓰지도 않는 한의학 전문용어입니다. 자궁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자(子)’가 아들을 뜻하는 말이니 여성을 무시하는 말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흑임자나 구기자의 ‘자’도 아들이라는 뜻인가요? 여러분이 이 주장의 오류를 한 번 바로잡아 보십시오. 인터넷 어디선가 제가 이 말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자궁이라는 말이 싫으면 ‘애기집’이라는 우리말을 쓰면 될 일입니다. 자궁이라는 한자말을 쓰지 말자고 주장하면서, 정작 우리말을 쓰기도 싫은 거죠.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지도층에 가득하고 심지어 재야시민단체에도 가득하니, 우리 말은 도대체 어디서 서식해야 할까요?

1970~80년대에 이오덕 선생은 방송계의 비문이나 구어체를 많이 지적하셨는데, 요즘은 그런 오류는 양반입니다. 한자를 영어로 대체하는 작업이 방송가 전체의 사명인 것처럼 여기는지, 하루가 멀다고 한자 낱말을 영어로 대체합니다.

언어 앞에서는 ‘지식’이 망령입니다. 삶 속에서 곧장 올라오는 말들이 진짜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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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2024-04-10 23:49:32
중국쪽보다는 일본쪽에 공통된 말을 쓰자는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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