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책으로의 여행] 기록이 보여주는 교훈
[임영호의 책으로의 여행] 기록이 보여주는 교훈
  •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 승인 2024.04.02 15: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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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서책(書冊)으로는 드물게 국보 132호로 지정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은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을 교훈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 토록 1633년에 쓴 일종의 기록문학입니다.

이 책은 후손에게 지난 잘못을 경계하고 삼가하라는 일종의 경고장이기도 합니다. 

류성룡은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서 피란 가는 선조 임금을 따라다니며 지켰습니다. 또한 명나라 구원병을 맞이하고 접대하고 그들이 먹을 식량을 댔으며 군사정책을 건의하고, 군사작전을 짜고, 군병들을 모집하고, 군대를 지휘하는 활동도 했습니다.

조선이 처한 상황
조선은 200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선비들이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리고,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를 만들어 정쟁을 일삼았으며, 반역 죄목의 정여립(鄭汝立) 사건과 수많은 선비가 죽은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조정을 덮었습니다.

조선 초에 정비된 국방체제는 점차 붕괴하여 외침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의 마음도 조선 왕조로부터 이미 떠나있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유럽 상인들을 통하여 조총과같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봉건국가 체제 속에서 비약적인발전과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중·후반기부터 시작된 혼란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강이라는 왜군이 기강이 무너진 ‘나라 같지 않은 조선’에 쳐들어 왔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 명과의 국제적인 전쟁입니다. 조선 땅에서 전쟁은 하였으나 조선은 군사력이 전무한 상태로 실제 전쟁당사자는 명과 왜이고, 바다에서만 이순신이 있어 조선과 왜의 전쟁이었습니다.

조선은 전쟁 마당이었을 뿐이었고, 조선군은 작전권도, 지휘권도 없는 명의 예속 군에 속했습니다.

조선에는 싸울 수 있는 군인이 없고, 적만 보면 도망가는 도망 군뿐이었습니다. 명 도독 이여송(李如松)은 조선군에게 적만 보면 도망가는 〈도망 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 저녁, 쓰시마에서 우리나라로 몰려온 왜군은 배에서 하루를 보낸 뒤, 새벽에 왜군의 제1진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지휘아래 부산진성을 공격하였고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鄭撥)은 힘껏 싸웠으나 전사하였습니다. 

다음날 왜군은 동래성을 공격하였고, 역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역시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관이지만 칼과 활, 돌멩이를 든 관민 2000명으로 끝까지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카와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토시(宗 意智)는 비록 적장이지만 그의 용기에 존경을 표하고 예를 갖춘 장례와 추모비까지 세웠습니다.

그 후 불과 2개월만에 왜적은 거칠 것 없이 밀고 올라가 한양, 개성, 평양을 모두 함락시켰습니다. 

당시 조정에 있는 무장 중에는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이일이 순변사로 임명되어 상주에서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농민 8백여 명을 모아 싸웠으나 모두 적에게 도륙당고, 신립은 공격하기 어렵다는 험준한 숲인 조령을 버려두고 8000여 명으로 평탄한 들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기병 위주였던 신립의 정예 군대는 질척한 습지에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전멸하였고 신립 자신도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일의 첫 패배와 충주 탄금대 신립의 패전에는 척후 활용의 실패에도 원인도 있습니다. 적이 가까이에 와 있어도 몰랐던 것입니다.

왜군은 100년 이상 오랫동안 일본 내 통일 전쟁에서 전투경험이 풍부했던 무사들로 긴 칼과 긴 창, 조총으로 무장했지만 우리는 전투경험이 전무한 농민들로 짧은 칼과 창, 활과 화살이 전부였습니다. 

선조는 동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합니다. 히데요시가 통일하자 그는 조선통신사를 요청했고 이리저리 응하지 않다가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3월 조선통신사로 서인 황윤길을 정사(正使)로, 김성일을 부사(副使)로 삼고, 동인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여 왜에 보냈습니다.

이때 김성일은 왜의 조선 침략이 없을 거라는 잘못된 보고를 합니다. 당시 류성룡도 이황의 문하생인 김성일의 주장을 지지하였습니다. 

선조는 김성일을 파직하여 책임을 물었고, 경상도에서 신임이 두터웠던 김성일은 압송 도중에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었고, 그 역시 과거 발언으로 책임감을 느껴서 해당 업무를 잘 수행하고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왜군이 한양에 들어온 것이 5월 3일, 한나라의 수도가 점령되는데 걸린 시간은 20일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한양에서 군병을 모으려 했지만 300명조차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개성을 거쳐 평양에 들어온 것이 6월 13일, 그사이 전투다운 전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제1진 지휘자는 고니시 유키나카는 평양에 들어와 6개월 동안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주둔합니다.

제2진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는 최북단 회령까지 가서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넘겨받은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만듭니다. 

선조의 피란 길의 선택
왜적의 침략 사실이 처음 조정에 닿은 것은 4월 17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조선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김응남 등을 보내 왜의 침략을 명에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냅니다.

후에 명은 왜적이 예상과 다르게 일찍 평양에 닿았다는 보고를 받자, 조선이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끌고 왔다는 오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

선조는 어디로 피난 갈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1592년 4월 28일 신립이 패전하고 충주 방어선이 뚫렸다는 소식에 선조는 파천을 제안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4월 30일 새벽 추적추적 비가 오는 가운데 한양을 떠납니다.

왕의 행군을 지키는 관원과 대신의 수는 100여 명 수준밖에 안되었고, 군병들은 다 도망가서 선조가 한양을 떠날 때 호위 병사가 겨우 300명이었습니다.

신하들 대다수는 험지인 철령을 넘어 북방인 함흥과 경성으로 갈 것을 진언했으나, 류성룡은 함경도로 들어가면 중간에 왜군이 차단하면 고립된다고 주장하고 극구반대하였습니다.

그대로 했다면 아마 왜군 2진 가토 기요마사에게 두 왕자가 잡히듯 생포가 되었을 것입니다. 

선조는 도성을 떠나던 4월 30일부터 압록강을 건너갈 것인가  생각하였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명에 붙어살겠다는 것이 선조의 의도였습니다.

류성룡은 이는 주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명의 속국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조선은 하나의 나라로서 지위를 잃고, 조선왕도 사실상 없어진다고 극구 말렸습니다. 더군다나 민심은 말할 수 없이 궤멸 된다고 보았습니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은 왜적이 침략하기 전, 정읍 현감으로 있다가 전라 수군절도사로 파격적으로 임명되어 대포로 무장한 거북선과 판옥선을 건조하는 등 철저하게 적의 침략을 대비하였습니다.

이순신의 1592년 5월 거제 옥포에서 첫 해전의 완벽한 승리는 평양성을 점령한 왜군에 대한 보급지원을 막게 하여 향후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황해도와 평안도 해안지방까지 지키게 되었고, 요동과 천진 지방에 왜군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의 육로를 통하여 들어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류성룡은 실로 하늘의 도움이었다고 징비록에 기술하였습니다.

1592년 7월 15일, 요동에서 평양에 도착한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 3,000명을 데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매복 기습에 실패하고 요동으로 돌아갔습니다.

1592년 12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병 4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왔으나 그는 한참이나 미적거리다가 1593년 1월 7일,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여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령한 평양성을 탈환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기고만장한 이여송은 동년 2월 벽제관 전투에 참가 하였으나 조총의 위력으로 명의 기마병은 완전히 패배하였습니다. 벽제관 전투 후 전의를 상실한 명은 왜와 정면 대결하는 것을 아주 꺼려했습니다.

이후 전쟁은 4년 동안 소강상태였고, 왜는 전쟁을 중지하고 명의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휴전 협상을 하였습니다.

조선은 나라가 아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미래를 걱정하는 참된 관리라면 국가의 위기를 예감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죽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7~1584)는 그의 가장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조선의 현재를 뼈아프게 지적했습니다.

한마디로 조선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어느 대목도 손댈 수 없는 집, 하루가 다르게 썩어 내려앉는 집’이라고 일갈했습니다.

그는 당시 38세로 한참 활동했던 최고의 인재였으나 그 조차도 조선의 중흥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모든 상소가 원칙은 있으나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오로지 윤리적 주장만 있었습니다. 

원로학자 송복(1937~)은 《징비록》의 저자인 류성룡의 상소문 549개 자료를 분석하여 조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밝혔습니다. 송복의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라는 긴 제목의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 조선은 인물 빈곤입니다. 인물 동원력이 신라와 고려와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신라가 5000만 당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다양한 인재 덕분입니다.

조선은 무신 출신 장군이라야 신립, 이일, 이순신과 문관인 권율 장군 등 서너 사람이 고작이고, 정 2품 이상 중신 중에 정철, 이성중, 김성일은 전쟁 중 사망했고, 이항복과 이덕형은 30대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오직 50세인 류성룡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둘, 전쟁은 군량이 제일 중요합니다. 양식이 떨어지는 순간, 군은 반드시 넘어지고 엎어집니다. 7년 전쟁은 군량 전쟁이었습니다.

조선의 군량은 1차적으로 명군의 식량이 되고, 2차적으로 우리 군대의 식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돌아갑니다. 

5월 1일, 개성으로 가는 피난 길에서 류성룡은 영의정이 됩니다. 류성룡은 전시 수상으로 군량 수송 역을 맡았습니다. 그는 평안도 안주(安州)를 요충지로 하고, 가까운 정주(定州)를 이용하여 일차적으로 명군의 식량 모으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당시 조선의 군량 공급능력은 1만 명분이 고작이고, 그것조차수송의 어려움으로 5일분밖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곡식이 나올 곳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3~4천석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명의 군마(軍馬)까지도 사료공급을 해야만 했습니다.

류성룡은 하루하루 식량을 모아갑니다. 조선 조세의 거의 반은 호남에서 충당합니다. 이순신의 바다에서의 해전 승리와 김성일, 의병 김천일의 진주성(晉州城) 방어는 호남 군량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셋, 조선은 문치주의 나라로서 나라를 지키는 자는 무인(武人)이라는 것을 너무 간과합니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의 진(鎭)이 중심되어 각자 방어를 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였으나 을미 왜변(乙未倭變) 이후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변경합니다.

각 지역의 진(鎭)보다도 도체찰사, 병사, 수사, 방어사, 조방장, 수령과 같은 별개의 군대에 예속시켰고, 일이 벌어지면 일체의 군사들을 집합시켜 중앙에서 임명받은 지휘관으로 전쟁을 이끌게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전쟁의 지휘사령탑은 비변사(備邊司)입니다. 당연히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야 할 군국기무(軍國機務)에는 장수의 직접적인 참여 없이 문관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계급도 같아 지휘계통이 서지 않아 명령도 제멋대로입니다. 같은 등급이면 모두 특정 지역의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도원수 노릇을 합니다. 

넷, 임진왜란 이전, 지방이나 하층 무관인 병사, 수사, 첨사, 권관은 생활을 보장하는 녹봉인 봉급미(俸給米)가 없었습니다. 류성룡은 병사들의 생계걱정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습니다.

장수가 녹봉이 없어 병졸들을 수탈하거나 병사들을 시켜 수탈합니다. 베를 바치면 군역을 면제하거나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습니다.

오히려 당시는 녹봉 없는 장수가 인기였습니다. 녹봉 없는 무록제(無祿制)에 대하여 어느누구도 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조선은 아전(衙前)이 병사를 선발하는 나라입니다. 병사의 수가 허수로 실제 종사하는 병력은 8000명 수준이고, 군포를 관에 납부를 하여 군역을 면제받는 자인 보조군(補助군) 4만 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6년마다  군적을 정리해야했지만 정리가 안 되었고, 실전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평소 군인들은 군사훈련이 안 된 농사꾼 병사로 장수가 병사들을 단 한 번도 지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고, 병기마저 스스로 준비합니다. 주된 무기는 몽둥이와 죽창과 곡괭이, 쇠스랑입니다. 

류성룡은 속오제(束伍制) 실시를 주장하였습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양반도 군인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병사 5인을 묶어 1오(伍)로 하여 피라미드식으로 부대를 만듭니다. 

그는 정병 1만주의(精兵一万主義)와 훈련 제일주의(訓練第一主義)를 주장했습니다. 병사 1인당 3되를 지급하면 1년 식량으로 10만 8천 석이 필요합니다.

2000명씩 1영으로 하여 총 5영으로 훈련을 실시하고, 지금의 특전사처럼 가장 날쌔고 용감한 병사를 선봉으로 하는 군 편제 실시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은 허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글에서도 율곡의 직접적인 주장은 없습니다. 사후 수십 년 뒤, 그의 제자가 쓴 율곡 비문에 10만 양병설이 있습니다. 특정 당파의 사상적인 우위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 추측됩니다.

1590년대 조선의 인구는 230만 정도, 반을 남자로 치면 115만 명, 이 중 20~30세 젊은이는 전체인구의 16%인 18만 명 정도. 양반과 벼슬아치 자제 모두가 군병이 되어야 10만을 채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를 위한 군량미는 군병 1만 명당 한 달 식량이 6400석이라면 10만 명을 추산했을 때 최소한 연 76만 석. 임진왜란 당시 정부 세입은 고작 60만 석. 군병 10만 명 양성은 불가하다는 결론입니다.

우리 형편으로 전답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전문적인 군인의 독립적인 군대는 겨우 1만의 정병만이 타당합니다.

왜와 명의 조선분할 전쟁
임진왜란은 왜와 명에게는 조선분할 전쟁이었습니다. 명은 조선영토의 반인 한강 이남의 경기 남쪽 부분과 충청, 전라, 경상도를 왜에 주고, 조선의 북쪽인 함경, 평안, 황해, 강원도라도 사수하여 왜로부터 명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명의 참전목적이었습니다. 이 협상으로 인해  조선 땅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조선은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 전야와 같습니다. 

왜와의 3차 나고야 회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화조건으로 7개 조를 제시했는데 그중 네 번째 조항이 조선 분할안입니다.

그렇지만 명 조정에 보고할 때는 오직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것만 가짜 국서에 담아 명 조정에 상신합니다. 명 조정에서는 이것을 믿고 명의 책봉사(冊封使)를 일본에 파견합니다. 

히데요시는 강화 7개 조가 완전히 무시된 것을 알자마자 4년여의 협상을 완전히 결렬시킵니다. 히데요시는 조선 4도의 분할 목적으로 14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다시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입니다. 

이때 왜적은 조선군의 저항에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해안선에 머물면서 왜성들을 많이 축조하였고, 이것은 향후 왜적의 중요한 군사요충지가 되었습니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임진왜란도 끝나고 조선분할도 끝났습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첫날부터 조선군이 어이없이 패배하자, 백성과 조선군에 대한 불신이 커졌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왕권의 유지로 선조는 철저하게 명에 의존했습니다. 

명의 조선 직할 통치론은 1594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기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선조는 오히려 명군의 철군을 반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0년까지 명군 3만 3천 명이 더 조선에 주둔한 것도 명의 직할 통치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1598년 11월 1일은 두 가지 사건을 전 하는 날입니다. 삼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노량해전에서 전사와 영의정 류성룡이 명의 사신 정응태(丁應泰) 사건과 북인(北人)들의 무고로 탄핵을 당합니다. 

7년간에 걸친 전쟁이 종식된 바로 그날, 전쟁 기간 조선의 버팀목이었던 이순신과 류성룡이 함께 비운의 퇴장을 합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옳습니다. 조선은 군량도, 무기도. 군병도 없는 가장 무기력한 나라였습니다. 역사는 자신들이 지키지 않은 나라를 절대로 지켜주지 않는다.

류성룡은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天下雖安 亡戰必危)라고 경고합니다. 우수하고 강한 정병(精兵)을 만들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강한 훈련으로 강한 군인을 만들고, 포와 같은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고도 ‘징비’하지 않아 우리에게 역사는 자비롭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방 모두가 우리의 지독한 급망증(急忘症)과 우리의 한심한 의존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요즘 북한의 탄도미사일인 스커드나 미사일 발사와 같은 도발에 사드 같은 방어용 무기가 없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사드 배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경제보복까지 하지만, 만약 중국의 요구대로 사드 배치를 하지 않고 중국과 평화 관계를 유지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평화는 아닙니다.

적극적인 국익외교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군사력을 강하게 하는 것, 자주국방만이 나라를 지키고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현재에도 류성룡의 자강론(自强論)은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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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배기 2024-04-16 12:58:50
현재도 유성룡의 자강론은 유효하지요, 유효하고 말고요.
자주국방으로 똘똘뭉쳐 나라를 지켜야 하지요.
불안이 안정으로 바뀌길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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