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옥분 “10년의 망설임… 이제야 소녀상 앞에 노래를 바칩니다”
남궁옥분 “10년의 망설임… 이제야 소녀상 앞에 노래를 바칩니다”
‘광복70주년’ 앞두고 위안부 할머니들 위한 헌정곡 발표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5.08.12 15: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도 서러워 멈춰버린
고향도 추억도 묻어 버린
눈이 부신 청춘의 이름마저도
잊혀진 채 살지만

사랑을 담아 둘 마음속엔
진홍빛 슬픔만 남았어도
가녀린 꽃잎 가슴에 맺힌 눈물로
그 꽃을 지켜 내리

비를 기다려 울던 세월
하늘 두고 하소연했지
그 하늘 바뀌어도 낯선 바람
누굴 위해 불었던가

잊으려도 지우려도
죽어서도 죽지 못하네
아픔도 슬픔도 없는 곳에
단 하루는 욕심인가

-남궁옥분 ‘봉선화(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노래)’ 중

 

[굿모닝충청 이호영 기자] 노래 가사처럼 ‘아픔도 슬픔도 없는 단 하루’는 욕심이었을까. 지난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유년 할머니는 응어리진 가슴속 한을 풀지 못한 채 93세의 일기로 쓸쓸히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올해 들어서 벌써 여덟 번째, 정부 등록 기준 238명의 피해자 가운데 이제 47명의 할머니만 남았다.

박 할머니는 1941년 친구와 같이 부산에 갔다가 일본군 간호원으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한국여성 6명과 함께 19세 꽃다운 나이에 일본인에게 넘겨진 뒤 일본 관동과 싱가포르로 끌려다니며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1945년 광복 후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와 부산과 경기도 파주를 전전하며 산나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박 할머니는 2007년 미국 애리조나주 메사추세츠로 거처를 옮겨 양아들 부부와 함께 지금까지 생활해 왔다.

광복 70주년을 불과 1주일 앞두고 벌어진 슬픔. 하지만 정부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고 전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무료화하면서 ‘국민적 경축(?)’ 분위기를 띄우려할 뿐 정작 아픔을 같이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평화의 소녀상과 마주하다
박 할머니가 가신 바로 전날 가수 남궁옥분(57) 씨를 만난 건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3·1절을 즈음해 발표한 ‘2015 광복 70주년’ 앨범에 그는 “어두운 우리 역사의 한가운데서 피어보지도 못한 채 무참히 짓밟혀버린 순백의 영혼들. 광복 70년, 그 어떤 사과도 받아내지 못한 채 시간만 자꾸 흘러간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것 또한 너무 죄송스럽다. 그 서러운 영혼들, 그분들의 아픔위에 조심스럽게 이 노래를 바친다”고 진심을 써내려갔다.

하지만 이기심으로 가득한 머리를 죽비로 내려친 듯 멍한 충격과 가슴을 에는 듯 쓰라리고 먹먹한 ‘진실’을 발표하고도 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흔한 방송사 앨범 돌리기도 포기했다.

이날도 대전시청 앞 보라매근린공원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마주한 남궁옥분 씨는 “그동안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1000번은 들었지만 ‘혹시라도 오해가 있지는 않을까, 과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가슴만 끓였다”며 “그래도 누가 들어주든 안 들어주든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마음 속 숙제를 한 것 아닐까 자위한다”고 털어놨다.

그런 마음의 무거운 짐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었을까. 그는 한참의 망설임 뒤 자신의 노래가 담긴 CD를 소녀상 의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였다. 무려 4개월 만에, 지켜보는 사람이라곤 기자와 매니저 단 둘 뿐이었지만 정말 무겁고 고귀하게 이루어진 헌정행사였다.

10년 전 만든 앨범을 차마 내놓을 수 없었던 이유
사실 ‘봉선화’와 함께 ‘금강산, 아리랑, 함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 5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은 이미 1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글을 쓰다가 우연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접하게 된 뒤 노래를 만들었지만 당시만 해도 내 노래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분들을 위해 아무것도 안한 상태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스스로 창피했고, 묵묵히 노력해온 사람들에게도 미안했죠. 그 일은 하던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발표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후 묵혀놨던 노래를 다시 끄집어내기로 한 것은 2년 전 한 다큐멘터리를 접하고 나서. 배경에 깔린 음악이 할머니들의 아픔과는 너무나 괴리돼 있어 갑갑함이 밀려왔다. 역사적으로 고생한 것을 천분의 일도 헤아릴 수 없고, 간접경험은 더더욱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지만 어디선가 기타 하나로라도 위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특별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으로 10년을 지내고 나니 비로소 노래를 발표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아마도 서정주 시인의 시구처럼 인생의 모진 굴곡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게 된 듯하다.

“19살에 데뷔해 1981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1982년 ‘꿈을 먹는 젊은이’, 1983년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등 히트곡을 쏟아내며 신인가수상, 10대 가수상, 가요대상 등을 휩쓸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동안 저는 앵무새에 불과했을 뿐 내 의지로 내가 작사해 곡을 만든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한순간의 인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가수로서 가장 밑바닥 절망까지 느껴야 했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는 나에게 가장 독이 된 출세작이었던 겁니다.”

“이제서야 내 목소리로 나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 깨달음 후에 만든 것이 이번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다.

“이 순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지 제 삶에 대한 재발견이라 할까요? 밀린 숙제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무한한 기쁨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의 평가보다 내가 만족하는 일, 나 스스로를 칭찬해 줄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내 의지대로 내 노래를 부른 이번 앨범 역시 남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제게는 제2의 인생을 여는 출발점이나 마찬가지죠.”

그래서일까? 여전히 생계형 가수로 하루에도 수백㎞를 달려가며 노래를 부른다는 그의 얼굴엔 삶의 고단함이 아닌 행복으로 가득 찼고, 그의 말은 은은한 향기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늦게나마 깨달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항상 감사했다.

“이제는 돈을 위해 살아가는 나이도 아니고 명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가 됐든 나를 필요로 하는 곳, 가치 있는 곳이라면 기꺼이 나를 던져 노래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가수로서 내가 해야 될 역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만든 앨범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것이라면 어디라도 기꺼이 기부하고, 노래도 언제든 무료로 쓰도록 할 생각입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광복절을 코앞에 두고 ‘평화의 소녀상’을 마주했지만 그 잠깐 동안 남궁옥분 씨는 처음 만난 기자에게 가슴 속에 숨겨놨던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놨다. ‘삶’을 이야기 했고, ‘사랑과 평화’에 대한 생각도 꺼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소녀상의 뜯겨진 머리카락과 맨발, 어깨에 앉은 작은 새와 가슴에 품은 나비가 가슴 아프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날 진심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광수 2015-08-13 09:03:11
좋은 노래
참 고맙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큰 위로가 되리라 믿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