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하의 작은 옹달샘] 어릴 적 반성문, 지금도 간직하는 이유
[지요하의 작은 옹달샘] 어릴 적 반성문, 지금도 간직하는 이유
2-지극히 평범했던 아버지가 날 바꾼 결정적 사건
  • 지요하
  • 승인 2015.10.2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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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요하 소설가

[굿모닝충청 지요하 소설가] 1986년 66세라는 아까운 연세로 별세하신 선친은 1920년생이시니 살아계신다면 올해 95세가 되신다. 박정희 대통령보다 3년 연하지만, 비슷한 또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선친이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박 대통령의 이름이 귀에 들리면 덩달아 선친의 모습도 떠오른다.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별세하신 선친

박정희 대통령은 62세로 타계했고 선친은 66세로 별세했으니, 박 대통령과 선친이 비슷한 세월을 살고 일찍 타계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너무도 자심하여 그 효성 이야기가 세간에 자자하다보니, 나도 덩달아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이 너울거리곤 한다.

▲ 고 박정희 대통령 가족사진. 왼쪽부터 박근령씨,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현 대통령, 육영수씨, 박지만씨.

일국의 대통령이거나, 나 같은 필부이거나 타계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같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지상정이요, 당연지사이다.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지 않고 사는 자녀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이고, 어쩌면 그들은 더더욱 그리움이 사무칠지도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과 선친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비슷한 세월을 살고 이승을 떠났다는 공통점 말고는 둘 사이 비슷한 건 아무것도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북 구미 출신이고 선친은 충남 태안 출신이다. 서로의 출생 지역이 매우 멀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가 만주로 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이적해서 일본군 장교가 되고, 해방된 대한민국의 장교가 되어 군인의 길을 걷다가 대통령까지 되었다. 조실부모했던 선친은 초등학교 3년 중퇴 후 만난고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머리가 좋아 늘 전교 1등을 맡아 놓았던 선친은 초등학교 3년 중퇴 학력으로도 고시를 꿈꾸고 육법전서를 놓고 홀로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하지만 석유 닳는다며 형수가 밤마다 방에 들어와 등잔불을 꺼버리곤 해서 끝내는 공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선친은 사범학교 진학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만주로 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만주로 가서 독립군 대열에 참여하는 것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산을 탕진하고 멀리 이주를 한 장형(長兄)을 따라 객지 생활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해 나는 불만이 많았다.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도 많고, 독학으로 한문에 능통했던 아버지가 왜 그리도 너울가지가 없었는지, 왜 만주로 가서 광복군 대열에도 끼지 않았는지, 아버지의 너무도 평범하고 오종종한 삶이 답답하고 섭섭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내성적인 성격 탓일 터였다. 결혼 후 3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을 정도로 활동성이 없고 주변머리가 없으니, 내 모친의 고생은 필연곡절이었다. 아버지는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긴긴 세월 가난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야 했다.

일본으로 징용 가던 길에서 탈출한 내 선친

▲ 선친의 생전 모습. 평생을 촌부로 살았던 선친께서 이승을 떠나기 이태 전이던가, 아내와 함께 조부모 묘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모험심도 활동성도 없는 선친에게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신혼 시절 징용에 걸려들어 일본으로 끌려가던 도중 부산항에서 탈출을 했노라고 했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기 직전 야반도주를 했노라고 했다.

아버지 혼자 탈출을 한 건 아니었다. 친구 한 사람과 탈출을 했는데, 친구가 먼저 계획하여 감행을 했고, 아버지는 친구 뒤를 따랐노라고 했다. 그게 좀 아쉽긴 했지만, 나는 그 순간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워졌다. 친구와 함께 열흘 동안 걸어서 처가가 있는 전주로 가서 몸을 감출 수가 있었다는데, 아버지가 부산항의 징용 대열에서 탈출하여 야반도주를 했다는 사실은 내게 이상한 희열을 안겨 주었다.

단조롭고 평범한 아버지의 삶 안에 그런 극적인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내게 이상한 기쁨을 준다. 아버지가 징용 대열에서 탈출했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아버지가 광복투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징용 대열에서 탈출한 것은 어느 모로는 광복투쟁에 참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의미 부여를 하곤 한다. 청소년 시절부터의 생각이다.

아버지가 징용 대열에서 탈출한 후 곧바로 만주로 가서 광복군 대열에 투신했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징용 대열에서 탈출한 기백과 모험심으로 만주로 가시지 그랬느냐는 말을 청년 시절 언젠가 아버지께 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불만을 감지하신 눈치였다.

“비록 만주로 가서 광복투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을 미워하는 마음은 늘 내게 있었다. 창씨개명을 하게하고,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일본 놈들에게 적개심을 갖고 살았다. 비록 이케다 상으로 불리고, 관공서에 가면 일본말과 일본글을 사용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비록 일제 치하를 살았지만 나는 결코 친일파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그런 말을 떠올리면 아버지가 부산항의 징용 대열에서 탈출을 감행한 것은 분명코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시일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내게 각성의 문을 열어주신 아버지

나는 고등학교 1년 시절에 큰 사고를 쳤다. 12월 초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밤중에 술을 마시고, 어른 한 사람과 시비가 붙어 주먹질을 했다. 그 어른이 집단폭행으로 고소를 하는 바람에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줄행랑을 놓았다.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실컷 고생을 하고 돌아온 날,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방에 들어가 몽둥이 하나를 놓고 무릎 꿇고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두워서야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내 앞에 앉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고등학생이다. 고등학생이라면 어느 정도 지성인이니, 지성인에게는 매보다는 말이 더 적합할 거다. 그러니 이 몽둥이는 필요 없다.”

그리고 아버지는 몽둥이를 집어 마당으로 던지셨다. 그 순간 나는 고마움과 함께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이미 배웠을 거다만, 우리나라에는 고등학생들이 일으킨 위대한 사건들이 많다. 일제 때 일제에 저항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인 광주학생의거를 비롯해서 함흥학생의거와 신의주학생의거 등이 있고, 가까이로는 4.19의거가 있다.
이 모든 의거들은 고등학생들이 일으켰고, 고등학생들로부터 발단이 되었다. 이처럼 고등학생들은 위대한 힘을 지녔다. 이렇게 너의 선배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또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며 싸웠는데, 너는 고작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어른과 싸우고 비겁하게 도망을 갔다 왔으니, 그게 고등학생으로서 할 짓이냐? 숭고한 정신을 지녔던 선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가 진정으로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너를 깊이 반성해라."

어린 아들이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겪었을 고생을 깊이 헤아리신 나머지 아들을 일찍 쉬게 하시려는 뜻이 거기에는 포함되어 있었을 테지만, 아버지의 그 말은 내게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그 말을 수없이 떠올리며 되새겼다.

무기정학으로 인해 그해 12월은 물론이고, 겨울 방학이 끝난 다음해 2월에도 학교에 가지 못한 나는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 물론 담임선생님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나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반성문을 정성들여 썼다. 그리고 그 반성문 안에 아버지의 그 말씀을 기록했다. 아버지의 그 말 한 마디가 어떤 매보다도 더 큰 아픔과 깨달음을 안겨 준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50년 전의 그 반성문 초안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후 나는 모범생이 됐다. 무기정학까지 당했던 문제 학생이 모범생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시골 인문계 신설 고등학교의 제2기생으로서 늘 학교의 명예를 생각했다. 갖가지 운동선수로, 학생회 간부로 큰 활약을 했다. 그래서 3학년 때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고, 졸업 때에는 학교를 위해 가장 일을 많이 한 학생에게 주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가끔 모교의 초청으로 모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강연을 한다. 고향에 살고 있기로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강연을 할 때마다 예의 그 무기정학 사건을 들려주곤 한다. 문제 학생에서 모범생으로 변모했던 그 사실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가능성의 소중함을 학생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이 이야기에서 학생들은 대체로 감명을 받는 모습이었다. 내 아버지의 그 말씀이 오늘에도 내 입을 통해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충격과 감동을 주는 사실을 느끼고 확인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크게 덩두렷하지는 못할망정 내가 글쟁이 명색을 지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며, 지역 사회에서 이런 저런 활동으로 사회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도 청소년 시절에 접했던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크게 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효심 발동

▲ 박근혜 대통령의 첫 번째 담화 발표. 2013년 3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첫 번째 담화를 발표할 때의 표정이 너무도 단호하고 강경해서 ‘부르르 담화’라는 말을 낳았다.

요즘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효심이 너무도 지극하여 많은 말들을 낳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 그리움 때문에 이상한 착각에 빠져서 오늘의 시대를 40여 년 전 아버지 시대로 되돌리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것 같다. 아버지를 정치 모델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 발동이 세간의 화제가 된 탓에 나도 덩달아 내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대통령의 대통령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나, 필부의 촌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나 그 효심의 질은 같다. 누구도 그 효심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권력자의 권력자에 대한 효심 발동은 문제가 클 수밖에 없다. 효심 자체야 탓할 수가 없지만, 그 효심 발동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국가 대사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필부인 내가 촌부였던 내 아버지를 미화하는 것은 순수한 효심으로 끝나지만, 오늘의 권력자가 과거의 권력자였던 아버지를 미화하려는 것은 역사를 비틀어 흑역사를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노출시키지 말고 안으로 감추어야 한다. 효심을 노출하면 할수록, 또 그 효심으로 국가적 중대 사건을 만들어낼수록 아버지의 명예는 더욱 추락하고 만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일이 오히려 반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아버지를 잊고,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오로지 초연해야 한다. 아버지에게 집착하지 않고 ‘좋은 정치’만을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아버지의 명예에도 득이 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효심이다. 그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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