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모국어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다듬어 확인하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모국어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다듬어 확인하다
  • 이규식
  • 승인 2016.03.0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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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김기영

모국어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다듬어 확인하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 ‘저녁눈’ 전부
 

▲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1946년에 ‘향토시가회’와 ‘동백’ 동인 활동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1956년 ‘현대문학’ 추천을 받고 1969년 첫 시집을 내기까지 박용래는 과작의 시인이었다.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으로 자신의 근원적인 고독의식을 도저하게 때로는 수줍게 펼쳐 보이는 작품을 선보인다. 작고 사소한 것에 지극한 애정을 쏟으면서 소멸하는 것, 스러져 가는 것, 흘러가 버리는 것에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간결하게 축약해 놓았다.

대부분 10행 미만, 길어야 20행을 넘지 않는 그의 시 작품에는 우리 말의 맛과 멋이 온전히 살아나서 감칠맛 나는 가락을 극대화 시켰다. 이른바 언어의 연금술이라 부를 수 있는 능란한 어휘 구사력과 밀도 있는 표현력 그리고 수용자의 감성과 반응을 짐짓 꿰뚫어 보는 투시력에 힘입은 그의 시편들은 시 자체가 곧 박용래라는 인간 자체로 치환될 만큼 삶과 문학이 맞닿아 있는 드문 경우를 보여준다. 그의 미덕은 건조한 현대 사회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버려지는 토착적이고 전통성 짙은 유산과 감정의 끈에 생명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점에 있다.

한국적 전통 서정, 우리가 얼마 전까지 친근하게 대하였던 삶의 형상을 원형질 그대로 갈무리해 놓았다. 자연과 사물을 향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 이르면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를, 어쩌면 어느 사이 이미 잊혀져가고 있는 한국의 한과 의식을 아름답고 살가운 언어 마디로 가다듬어 냈다. 콩깍지, 삼베울, 무오라기, 솔개, 굴렁쇠, 상둣군, 밀잠자리 같은 고향과 유년의 아련한 어휘들이 그의 시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얻게 되었다.

탱자울에 스치는 새 떼
기왓골에 마른 풀
놋대야의 진눈깨비
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
이웃집 아이 불러 들이는 소리
해 지기전 불켠 울안.

- 박용래, ‘울안’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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