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향으로 원도심을 쓰는 사람
먹향으로 원도심을 쓰는 사람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의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31) 서예가 바우솔 김진호
  •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
  • 승인 2016.03.1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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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 대흥동 골목을 한가로이 헤맬 수 있는 봄날을 가진 사람에게는 또 하나 우연을 기대해도 좋다. 힘 빼고 춤을 추는 붓 한 자루를 만나는 일이다.

그 붓의 주인은 서예가인 바우솔 김진호 씨이다. 그러나 대흥동 어디에서 백발의 그를 만났다고 해서 순전히 우연만은 아니다. ‘글 무늬 붓 사위’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작업실이 대흥동의 골목에 숨어있어서이기도 하고 대흥동을 주된 무대로 그의 서예 작업이 펼쳐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서예가 바우솔이 대흥동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업하는 예술가 중 하나이기에 그를 만날 확률은 조금씩 높아지는 것이다. 바로 지난주에도 그는 줄을 서서 빵을 사는 주말의 성심당 앞에서 서예 퍼포먼스를 열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실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참 골목 사이를 떠돌았지만 건물의 바깥 어디에도 먹향 가득한 공간의 위치와 임자를 알려주는 표시는 없었다. 겨우 찾아내 계단을 오르다가 만나는 ‘선물 같은 하루 봄 봄’이라는 글씨가 담긴 작은 액자가 전부였다.

“좋은 이름을 가진 작업실인데 밖에는 알아볼만한 표시가 하나도 없네요?”
“내가 다른 사람이 써달라는 글씨는 주저하지 않고 아주 잘 써줘.”
하얀 백발, 장난기 가득한 아이의 얼굴, 그리고 뜨거운 에너지, 이 셋이 어울려 어떻게 예술을 만드는지 묻기 전에 나이가 먼저 궁금했다.

“지금 학교에 몸담고 있는데 내년이면 은퇴해.”
작업실의 구석구석에서 언젠가 남았던 술들을 모아놓은 술병들이 하나씩 나온다. 낮술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종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이 병, 마저 다 비울까?”

먼저 자신의 물컵에 술을 가득 따르고 그 잔으로 다른 사람의 잔을 채우면서 처음 서예와 인연을 따져보면 다섯 살 때라고 한다. 따로 묻지 않아도 이야기는 술술 풀린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목수 일을 하셨는데 좋은 글씨를 가지고 계셨어.”

아버지는 집을 지으면 그 집의 대들보에 직접 글씨를 썼다. 어린 서예가는 그렇게 아버지의 글씨를 보고 미적인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난했던 집 안에 혼자 남겨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일밖에 없었다. 다섯 살에 한글을 배우고 바로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던 일이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했던 시간의 덕이었다. 그리고 가난은 또 한 번의 어려운 선택을 대신해준다. 초등학교 3학년에 그림을 포기하게 도와준 것이다.

“글씨는 크레용 같이 많은 도구가 필요 없잖아. 그냥 검은 먹만 있으면 쓸 수 있었으니까.”

동네사람 모두에게 추앙받던 서예 신동은 성장기 중 한동안 글씨를 멀리하고 지냈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3개월 동안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왕희지의 ‘집자성교서’ 만 썼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 대흥동에 자리 잡으셨나요?”
그러나 건너뛸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남아있었다. 그는 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또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 그러나 모두에게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는 해직된다. 그 4년 동안 먹고살기 위해 한남대학교 앞에서 복사집을 열었다. 그 와중에 학생들이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써주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다시 붓을 잡은 거지. 글씨의 이모저모를 따지기 이전에 내가 제일 빠르잖아. 이한열이 죽었을 때에는 검은 천에 은분으로 하룻밤에 50장을 쓰기도 했어.”

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젊은 날 바우솔의 글씨를 보고 문익환 목사께서 누구의 글씨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씨에 ‘민중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쭈욱 대전에 있었지. 어, 대흥동? 그게 언제더라? 하여간 여기 대흥동에 서예뿐 아니라 예술가들이 많잖아. 지금 같이 서예 하는 ‘묵지회’ 사람들도 거의 여기에 적을 두고 있어.”

서예가 바우솔과 대흥동의 인연은 단순히 그의 예술활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큰아들은 대흥동에 새롭게 둥지를 튼 극단 ‘우금치’의 단원이고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둘째아들도 이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대흥동은 한 가족, 세 분야의 예술적 텃밭인 셈이다.

“소통이지. 글씨 쓰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지.”
이야기는 서예로 이어졌다. 글씨는 잘 쓰고 못쓰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서 글씨를 쓴다. 사람을 직접 만나고 거기에서 글씨를 쓰며 서예로 퍼포먼스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퍼포먼스만도 벌써 400회가 넘었다.

“길바닥에서 글씨를 쓰는 일은 사람의 눈을 보고 마음을 읽고 그 사람에게 감동을 받는 일이야. 소통이지. 그리고 재미있어.”

   
   
 

그에게 글씨는 혼자 디자인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글씨는 생각이기에 생각에 따라 글씨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을 만날 때 글씨가 달라진다. 그래서 글씨는 생물이라고 힘을 주었다. 그것도 아주 예쁜 생물.

바우솔의 글씨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정식 교육과정을 거친 적이 없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서예는 보통 도제식 교육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의 글씨가 가진 유일한 전범은 아버지의 글씨였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글씨의 풍모와 시간과 공간까지도 글씨 안에 포함하는 역동성은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지금 보면 예전 글씨에 부끄러운 것도 많아. 지금은 많이 늘었다고 생각해. 그게 뭐냐하면 말이야.”
예전에는 붓에게 30%를 내주고 쓰는 이의 의지가 70%로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랬기에 붓을 뭉개기도 하면서 자신을 이루는 근본적인 뼈대를 지키려 힘을 더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힘을 빼고 살살 붓이 가는대로 쓰면서 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씨체가 ‘아버지 바짓가랑이’ 체이다.

“나이 들어 힘없는 아버지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살 걸어가는 모습에서 따왔지. 붓에게 더 마음을 준거야.”

붓을 바로 세우기만 하지 않고 붓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먹이 충분히 스며들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자유는 아마도 배웠기에 지켜야하는 글씨의 틀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왜 한글로만 글씨를 쓰는지 묻는 일을 빼먹었다.

“한자 공부도 하기는 했지. 그런데 머릿속에서 디자인이 잘 안 돼.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쓰고 알아보지 못하는 글은 소통이 아닌 거야. 아이들이 못 알아보는 어려운 글을 구태여 나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한글만을 고집하는 한글 서예가는 한글이 가진 단순한 틀과 자음과 모음의 어울림으로 만들어지는 무궁한 변화를 이야기했고 단순한 외형에서 나오는 조형적인 유연성을 강조했다. 다른 말로 하면 한글이야말로 글씨를 쓰는 이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그지없다는 것이다. 

글씨는 먹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자나 깨나 사람을 생각하고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서예가는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의 화두는 바로 사랑이었다.

“내 슬로건은 ‘붓 한 자루로 세상을 바꾸자’야. 바로 사랑이지.”

오는 7월 30일부터 8일 동안 대전 갤러리, 그러니까 대전여중 강당에서 큰 서예 퍼포먼스를 예정하고 있다. 대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이번 퍼포먼스는 규모가 아주 커졌다. 서예뿐 아니라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종합예술로의 기획이다.

“테마는 ‘마음을 뿌리고 쓸고 스며들다’로 생각하고 있어. 어울려서 서로 스며드는 거지.” 
그의 글씨는 조용한 곳에서 다듬어져 액자 안에 자리 잡은 정적인 예술이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현장에서 직접 주고받는 호흡으로 완성되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포함하는 동적인 덩어리로 완성되는 예술이다. 다가오는 여름에는 그의 새로운 스며듦을 확인하러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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