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하의 작은옹달샘] “노래 한 곡 수용 못하는 정부가 무슨…”
[지요하의 작은옹달샘] “노래 한 곡 수용 못하는 정부가 무슨…”
5월이면 떠오르는 광주의 추억…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며 걷기운동 하련다
  • 지요하
  • 승인 2016.05.18 14:5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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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소설가

[굿모닝충청 지요하 소설가] 1970년대 후반 마산화력발전소(지금은 없음)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발전소 직원은 아니었고, 발전소에서 나오는 석탄재를 수거해 판매하는 작은 회사의 직원이었다.

마산화력발전소는 벙커C유와 석탄을 3대7 비율로 섞어서 태웠는데, 석탄재는 보텀애쉬와 플라이애쉬로 분리돼 나왔다. 보텀애쉬는 모래와 자갈이 섞인 재였고, 플라이애쉬는 미세한 분말이었다.

마산화력발전소 굴뚝청소부 생활

두 가지 다 건축 재료로 쓰이는데, 특히 플라이애쉬는 상품 가치가 있었다. 시멘트 입자보다 1/6 정도로 작아서, 플라시애쉬를 시멘트와 섞으면 방수 효과도 탁월하고 강도가 더 좋으며 표면이 미려해진다는 강점이 있었다.

그래서 플라이애쉬는 널리 팔려나갔다. 겨울철 비수기에는 적당한 장소에 비축해놓고 공해문제 때문에 관리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봄·여름·가을 성수기에는 심심찮게 팔렸다. 대구와 광주 등지에서 대형 트럭이 와서 실어가곤 했다.

나는 한국전력과 계약을 맺은 작은 회사의 현장 과장이었는데, 이름만 과장이지 발전소 굴뚝청소부나 다름없었다. 보일러와 연결된 대형 싸이로 밑에서 플라이애쉬를 빼내는 일을 담당한 직원이 결근이라도 하면 내가 그 일을 해야 했다. 물을 적당히 섞어서 기술적으로 재를 빼내야 하는데, 자칫 실수라도 하면 뽀얀 재를 뒤집어쓰기 일쑤였고, 예기치 않은 공해 문제로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발전소 직원에게 불려가 ‘갑질’을 당해야 했다.

▲유경근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공원묘지(5.18 구묘역)를 방문해 추모사를 하고 있다.

비축해놓은 플라이애쉬를 단단히 덮어 잘 관리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다른 직원이 플라이애쉬를 슬쩍 옆으로 빼돌리는 일을 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켜야 했고, 플라이애쉬를 공짜로 얻으려는 동네 건달들과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상하이 박’이라고 불리는 노인과는 격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발전소에서는 쉬지 않고 불을 때므로 보일러와 연결된 싸이로에는 금세 재가 차곤 했다. 재를 제대로 빼줘야 보일러 가동이 원활해지기 때문에 외상으로라도 재를 빨리빨리 파는 것이 상책이었다. 수거와 판매가 동시에 이뤄지곤 했다. 대형트럭을 가지고 와서 외상으로라도 재를 받아가는 사장님들이 일단은 고마울 정도였다.

가장 큰 고역은 밀린 외상 금액을 받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현장을 비워두고 장거리 출장을 갈 때는 늘 불안했다. 플라이애쉬를 외상으로 가져간 사장들은 플라이애쉬를 빨리빨리 수거해야 하는 회사를 자신들이 도와줬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았다. 외상값 갚는 일에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상값을 받아내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현장에서 플라이애쉬를 지키는 일에는 소매를 걷어붙였고, 동네 건달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겁먹지 않았고, 젊은 시절 중국 상해에서 한 가락 했다는 샹하이 박 노인과는 격투 직전까지 갈 정도로 담대했지만, 외상 대금을 받는 일에는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어려운 사정 얘기를 듣고, 식사 대접 받고, 여관방 신세를 지고는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회사의 경영진으로부터 '무능하다'는 말을 들은 것을 당연지사였다.

1979년 5월의 광주행과 1980년 5월의 광주행 포기

1979년 5월경 플라이애쉬 외상 대금을 받으러 광주를 간 일이 있었다. 외상 대금이 많이 밀려 있는 박아무개 사장은 내게 칙사 대접을 해주었다. 무등산 기슭의 한 음식점에서 백숙을 대접했고, 개울물소리가 들리는 여관방에서 하룻밤 안락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구구절절 설파했다.

나는 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박 사장에게서 들었던 어려운 사정을 회사 운영진에게 잘 전달하는 일에는 최대한 소질을 발휘했다. 그러자 회사 운영진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도대체 누구 편이냐?”는 질문이었다.

▲지난해 5월 18일. 당시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국무총리 직무대행으로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제창을 하진 않았다.

나는 1979년 가을 그 회사를 그만두고 마산을 떠나왔다. 그리고 경기도 남양만의 간척공사장에서 생활하는데, 회사 운영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마산에 있을 때 플라이애쉬를 외상으로 많이 가져간 광주 박 사장이 내 얘기를 많이 한다며, 한 번 더 광주를 가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제 회사 직원은 아니지만, 한때 한 배를 탔던 인연과 정리로 외상 대금 받는 일에 협조를 해달라는 얘기였다.

나는 광주를 한 번 더 가기로 약속했다. 소득이야 있건 없건 광주를 한 번 더 가고 싶었다. 그런데 차일피일하다 보니, 광주에 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1980년 5월이었다. 나는 광주에 가기 직전 광주행을 포기했다.

나는 차일피일하다가 5월 호시절에 광주를 갔더라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어찌 됐을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죄스러움도 함께 우러나는 현상도 겪게 됐다.

나는 1980년 5월 광주에 갔 뻔했다는,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모순과 비극성 때문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한 죄스러움을 감내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연적으로 해마다 5월이면 광주를 생각하게 됐다. 나만의 ‘그 기억’은 광주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어떤 그리움으로 발전했다. 나는 광주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광주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수시로 드러내곤 했다. ‘민주화의 성지’ 광주는 내 ‘제2의 고향’이라는 말도 공공연히 하곤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 2층의 이 모 씨가 광주 출신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몇 년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도 며칠 전 그의 고향을 비로소 아는 순간 나는 극진히 반가움을 표했다. 광주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표현했고, 내 ‘정신적 고향’라는 말도 했다. 고마워하는 40대의 그 친구가 더욱 정답게 느껴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 하나 수용하지 못하는 무능 정부

나는 해마다 5월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곤 한다. 바닷가에서 혼자 걷기운동을 하면서도 부른다. 광주의 시인 양성우가 노랫말을 지은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도 부르고, 김지하가 노랫말을 지은 <타는 목마름으로>도 부른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를 때는 김지하의 타락이 너무 가슴 아파 더럭 목이 메기도 한다.

예전에 어떤 모임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적이 있었다. 동조하는 사람들 사이에 곱지 않은 눈매도 있었다. 그 곱지 않은 눈매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 나 또한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셈이었다. 술김에 한마디 했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가슴의 온혈 작용으로 일단은 어떤 애절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애절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애절함을 굳이 타매하거나 불온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합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진정한 보수가 될 수 있습니다.

머리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더라도 마음은 더욱 넓고 따뜻해야 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도 하나 수용하지 못하고 불온시 하는 것과 보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를 불온시하고 타매하는 것은 옹졸하고 융통성 없는 소치로, 광주 학살자들의 만행을 옹호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즘 또다시 예전의 그 발언을 목청껏 쏟아내고 싶은 ‘의분’을 느낀다. 지금은 건강문제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데, 술 한잔 하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국가 최고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노래 하나도 수용하지 못하는 허약성, 여론 분열을 핑계 대는 분열주의자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강요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춘천 출신 국회의원 김진태의 궤변 속에 도사린 인권 무시, 이해심도 융통성도 따뜻함도 전혀 없는 보수를 사칭하는 자들 앞에서 더욱 큰 소리로 절절하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싶다.

또 한 해 5월을 살고 있다. 터널 같은 5․16군사쿠데타와 5․17군사쿠데타를 지나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는다. 올해도 아내와 함께 광주 망월동을 찾는 일을 실행하지 못해 아내에게 면목 없지만, 망월동을 찾는 마음가짐으로 18일부터 5월의 마지막 날까지 옷깃을 여미며 살 것이다. 그리고 ‘장명수’ 해변 걷기운동을 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여러 번 불러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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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맨 2016-05-22 00:17:58
누군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과 공공의 입장을 잘 살펴서 의견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주장이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정부는 우리가 다음 세대가 또 그 다음 세대가 믿고 따라가 주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주체 입니다. 이미 장단점이 다 나와있습니다.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사랑 2016-05-19 09:05:06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도 수용해야하나?
제창은 애국가 하나면 된는것이 아닌가?
본인이 부르고 싶으면 불러야지~

지나가다가~ 2016-05-18 15:49:11
제창이고 합창이고 쓸데없는 것 가지고 분열을 부추키는 족속들이
더 큰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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