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보리의 생명력, 보리는 밟혀도 일어선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보리의 생명력, 보리는 밟혀도 일어선다
  • 이규식
  • 승인 2016.05.28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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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규식

보리의 생명력, 보리는 밟혀도 일어선다 

밟혀라 푸른 심장아
밟혀라 시퍼런 청춘아

강물은 아직도 침묵하고
강변 넋 나간 억새는 칼 춤 추어도

시커먼 언 땅에서
일어서는 여린 보리야

가슴 펄펄 끓어 넘치고
보리떼 툭툭 터지는 날

네 심장의 푸른 피는
기억하리라 

누운 자리의 시린 추억을
- 이석,「보리」전부

 

▲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별다른 설명이나 첨언 없이도 읽는 분들은 이 정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싱싱한 보리의 모습을 유추할 것이다. 겨우내 추위 속 눈보라를 견디어 내고 결실을 향해 여물어가는 보리의 강인한 생명력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런 보리의 끈질긴 활력에서 삶이 나아갈 덕목을 떠올린다. 레드 우드라는 서양나무는 더러 100m를 훌쩍 넘기기도 하는 거목이지만 뿌리는 2∼3m  깊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땅속 깊이 뻗어 내려가는 대신에 옆으로 퍼지며 동료 나무 뿌리들과 단단히 얽혀 높은 거대한 나무크기와 중량을 지탱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이루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힘, 모진 환경에 맞서 성장과 번식을 쉬지 않는 그 힘에서 많은 것을 깨우친다. 그래서 청보리 밭에 가면 숙연해짐을 느낀다. 온통 황금빛인 수확기 보리밭의 강렬한 정취도 인상적이지만 청보리 싱싱한 초록 물결과 도도하면서도 유장한 출렁거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를 이룬다.
이 대목에서 프랑스 상징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감각’이라는 시를 떠올려 본다.
             
여름날 파아란 저녁 무렵, 나는 오솔길을 걸으리라
보리에 쿡쿡 찔리며 잔풀을 내리 밟으면:
몽상에 잠기던 나도 발밑에 그 신선함 느끼리라.
바람에 내 맨머리를 멱감기리니.

아무 말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래도 한없는 사랑이 내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리,
그리고 나는 이제 떠나가리라,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여인과 함께인듯 행복에 겨워 자연 속으로.

- 아르튀르 랭보,「감각」전부

십대 후반 조숙한 소년이 쓴 이 시는 랭보 사후 125년이 되는 지금까지 찬탄 속에서 읽힌다. 이석 시인의‘보리’에서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어서는 보리의 저항력과 생명력을 상찬하고 있고 랭보의 ‘감각’에서 보리는 시인의 자유분방한 감각체계를 넓히는데 원용되며 총체적인 일탈과 반항, 세상을 뒤엎으려는 야심만만한 도전의 한 단계에서 의미 있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랭보가 보았던 프랑스 서북부 지방의 보리밭이나 21세기 이석 시인이 시적 모티브로 원용한 보리나 시인이 추구하는 개별적 지향점에서는 다소 편차를 보일지언정 눈에 보이는 외계현상의 인식을 넘어 미지의 가능성, 억압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함과 역동성 그리고 초록색 진취적 기상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차원에서는 동심원을 그리는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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