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금강 라이딩] ①충청·호남 ‘삶과 시간의 경계’를 달리다
[임영호의 금강 라이딩] ①충청·호남 ‘삶과 시간의 경계’를 달리다
  •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 승인 2016.06.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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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한강, 낙동강에 이어 우리나라의 3대 강이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대청호를 거쳐 청주, 대전, 세종, 공주, 논산, 부여, 서천, 군산만을 경유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나는 지난 14일 1박2일 일정으로 금강을 여행하기 위해 완행열차를 타고 서대전역에서 군산 대하 역으로 가서, 금강하구에서 대청호까지 자전거로 라이딩을 했다.

첫째 날, 군산을 달리다.
서대전역~군산 대야역~경암동 철길마을~금강하구언~신성리 갈대밭~나바위성당~오천결사대 충혼탑~신동엽시비~백제문화단지에 이르는 총 100㎞.

올해 들어 처음 가는 자전거 여행길이다. 금강변 백제문화탐방까지는 족히 200Km는 되는 거리다. 긴 겨울동안 연습이 없었지만, 열정과 용기만은 그 누구보다 충만하다. 니체(1844~1900)가 말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좋았다. 성가시게 굴던 미세먼지도 보이지 않는다. 가을하늘 같은 코발트빛 하늘엔 어릴 적 창공에 호주기가 지나간 흔적처럼 가느다란 구름이 떠 있고, 담장 위 장미꽃은 서늘한 기온 탓인지 기가 살았다.

서대전역

서대전역은 집에서 자전거로 20분 거리다.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에 풍선을 달았는지 마냥 들떠 보인다. 여행은 그런 것인가 보다. 초등학교 아이들과 엄마들, 자전거 동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내내 깔깔거린다. 마음과 말은 언제나 한 통속이다.

7시 50분 드디어 열차가 출발하였다. 군산을 향해 간다. 들녘에는 논에 옮겨 심을 벼 모종이 자라고 있고, 써레질하는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다. 수로에 가득한 물이 아침 햇볕에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니, 벼를 심을 준비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상처와 결핍의 꽃, 하얀 찔레꽃이 저기 있다.
내 어린 시절 5월은 춘궁기였다. 그 때는 참 배가 고팠다. 보리가 아직 익기도 전에 먹을 것이 없어 파란 보리를 조금씩 훑어 먹는 집도 있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살았던 산모 한 분은 굶어서 돌아가시기도 했다.

찔레꽃

멀리 보이는 너른 둑에 찔레꽃이 보인다. 찔레꽃은 희다. 상처와 결핍의 꽃이다. 찔레꽃 너는 안다. 그 보릿고개의 무서움을. 사람의 아픔을 느껴 달처럼 희게 변한 찔레꽃. 꽃향기가 짙으면 가뭄이 더 심해진다고 했던가. 장사익이 부르는 ‘하얀 꽃 찔레 꽃’ 노래는 지금 들어도 슬프다.

대야역

9시 13분 정확히 대야역에 도착했다.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의 역이다. 총 6명이 3조 2교대로 근무한단다. 열차에 타는 손님을 세어보니 아이 한 명에 어른 셋이다. 이래서야 어디 인건비나 벌겠나 싶어 걱정이 앞선다. 나도 이제 철도인인가 보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우리 일행은 들판을 향해 달렸다. 말로만 듣던 호남평야다. 참으로 넓었다. 늦은 봄바람이 곁에서 살랑거려 주는데도 더위에는 역부족이다. 봄은 이 바람을 타고 멀리 가서 금년에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 같다.

호남평야 들판

써레질하는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에는 백로들이 모여들어 드러난 땅 속 벌레들을 잡아먹고 있다. 백로여 그대는 참 쉽게 사는구나. 너는 얼굴이 없어 좋겠다. 우리는 그놈의 체면 때문에 자중과 자애를 목에 달고 산다. 우리는 미움 받을 용기가 없다.

경암동 철길마을

경암동 철길마을에 하늘이 있다.
10시 20분이다. 30분을 달려 군산시내 외곽에 접어들었다. 사용하지 않는 철길이 보이고, 철길 옆으로는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있었다. ‘경암동 철길마을’.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된 지상욱 의원의 부인인 심은하 씨와 한석규 씨가 주연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촬영한 곳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한 장면

그곳은 70년대 풍경 그대로였다. 과거는 과거대로 아름답다.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이런 골목길을 거닐어 본지가 언제인가? 골목길에는 하늘이 있지만, 대형 아파트 단지에는 하늘이 없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하늘아래 사는 인간이라고 감히 말하기가 민망하다. 인간다운 삶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은의 시

골목 벽에는 고은의 시가 낙서처럼 쓰여 있다. 판잣집 천정에는 전깃줄 애자장식이 그대로 보였다. 어린 시절 판잣집 내 집에도 이런 애자 장식이 있었다.

그 시절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경쾌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아메리카노에 얼음 세 덩어리를 넣고, 이 골목의 아름다움을 커피에 섞어 마셔본다. 이집의 이층에는 골방이 있었다. 비 오는 날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꺼내보고 싶다.

철길마을 카페

철길 바로 옆으로 금강하구와 연결된 자전거 길이 있다. 멀리 큰 건물이 조밀하게 서 있는 군산시내와 초등시절 여름방학 책 뒷면에서 보았던 장항제련소가 보인다.

자전거 도로는 참 좋았다.

잘 뻗은 자전거도로

자전거로 15분 정도 가니 최무선의 진포대첩비(鎭浦大捷碑)가 보인다. 진포는 지금의 군산이다. 여기는 곡창지대라 고려 말에 특히 왜구의 노략질이 많았다. 국력이 약하면 국민이 골병든다.

고려 말 우왕 시절 최무선은 백성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어떻게든 왜구를 무찔러야겠다고 다짐한다. 당시 국내에는 화약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화약은 중국에서 수입하여 불꽃놀이에 사용하는 정도였다.

진포대첩비

그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을 붙들고 화약제조법을 묻고 또 물어, 마침내 제조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화포를 만들어, 이 곳 진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으로 평가 받는다.

당시 고려는 망해가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화통도감이란 기관을 만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고마운 것은 아들 최해선과 손자 최공손까지 화약 무기를 연구 발명하여 조선의 자주국방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역사에 빛나는 가족사이다.

금강하구언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바로 옆 금강 하구언의 길이는 1841미터로 1990년에 건설되었다. 장항선 열차를 타고 바다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긴 둑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주로 이 둑 때문에 생태계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해수가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해 토사가 쌓이고, 수질이 오염되어 다양한 생물이 살기가 어려워 졌다는 것이다. 이 둑을 건설하기 전에는 수십만 마리의 철새가 찾아왔었다. 지금은 기껏해야 수천 마리에 불과하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언뜻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도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 훼손되면 결국 그 손해는 우리에게 돌아온다. 하굿둑 끄트머리에 위치한 조류생태관은 휑했다. 생명의 사이클이 멈춰진 것 같다.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적은 수의 새라도 보려면 초겨울이 되어야만 가능한 가 보다.

금강 하구언 철새떼

장자의 ‘바닷새 이야기’가 생각난다. 바닷새를 너무나 사랑한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에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고, 누리고 싶었을 법한 모든 것들을 주었다. 하지만 새는 죽고 만다. 노나라 임금은 새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금강하류는 넓고 잔잔했다. 강도 우리네 삶의 궤적과 닮았다. 상류에서는 질풍노도처럼 욕심껏 성질대로 급하게 흘러내리더니, 하류에 다가갈수록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흐르는 물길에 순응하듯 조용히 흐른다.

신성리 갈대밭

신성리 갈대밭에 이념의 흔적은 없었다.
강가에는 여기저기 들꽃이 피어 있었다. 위로 올라 갈수록 꽃은 사라지고 삐죽한 갈대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하구 둑에서 다시 12km 정도 달려가니, 금강 8경의 하나인 신성리 갈대밭이 나왔다. 6만 평이나 되는 보기 드물게 너른 갈대천지다.

2000년 박찬욱 감독이 만든 ‘공동경비구역 JSA’가 촬영된 곳이다. 때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 간에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던 시절, 한 병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념은 대결적 요소가 강하다. 이념은 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는 이념은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 포스터

여기서 나오는 노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는 적막한 휴전선의 밤공기를 목 타도록 외롭게 만든다. 자정 넘어 밤하늘에 별들만이 빛나고, 가족 모두 잠든 고요한 밤에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하던 그 옛날에도 이런 기분이 들곤 했었다. 초여름의 갈대는 갈대라고 할 수 없다. 갈대는 적어도 누렇게 익어가는 만추의 저녁노을에 빛나야 제격이다. “그때 다시 오마” 약속하고 길을 떠났다.

그 곳에서 10Km를 더 달리니 웅포대교가 보인다. 12시가 넘었다. 요기할 식당을 찾았다. 멀리 긴 다리 넘어 식당 하나가 길옆으로 보인다. 웅포대교의 길이는 무려 1226m로 넓이는 왕복 2차선이다. 다리 위의 자전거 도로는 아주 좁고, 도로 위에 턱으로 되어 있었다. 오가는 차량 때문에 강 아래 멋진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자전거에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위험할 수 있어 바짝 긴장이 되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하루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넜다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가 있다. 연암은 거기서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귀와 눈이 마음의 누(累)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귀와 눈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는 익산시다. 부여와 익산은 이웃이다. 후백제의 도읍을 이곳으로 정한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식당주인은 충청도 아줌마였다. 오리고기를 듬뿍 주셨다. 라이딩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중간 중간 단백질을 섭취해 줘야만 한다.

성당포구

아름다운 포구가 눈앞에 펼쳐지다.
식당에서 나와 30분쯤 달리니, 익산시 웅포면에 위치한 아름다운 포구가 나왔다. 성당포구다. 자그마한 포구였다. 처음에는 천주교 성당이 있는 포구인 줄 알았는데, 지명이 ‘성당면 성당리’란다. 일대는 너른 들판과 갈대숲으로 이루어져 저녁노을이나 물안개가 피는 날이면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을 것 같다.

옛날 이곳은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미곡을 저장하는 세창(稅倉)이 있었던 곳이다. 오래된 마을이다.

500년 된 은행나무

마을입구에는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고 조운선(漕運船)의 무사항해를 빌었다고 한다. 인간의 한계를 알면 알수록 겸손해진다.

도로가에 서 있는 형형색색 바람개비가 우리를 환송한다. 10Km 정도 더 가니 나바위성당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나바위란 광장처럼 너른 바위란 뜻이다. 이름은 수 없이 들어왔지만, 실제 와 보기는 처음이다. 강가에서 동네 안으로 들어가려면 족히 2km는 더 가야 한다.

도로가 바람개비

나바위성당에 김대건 신부의 흔적이 깃들다.
이 성당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관계가 깊다. 신부는 1845년 8월 31일 마카오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던 도중 제주도 근해에서 폭풍우를 만난다. 그 무리에는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도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그 곳에서 몸을 추스른 후 다시 항해하여 지금 여기 강경 근처 로 들어온 것이다.

나바위성당

원래 목적지는 강경이었다고 한다. 강경은 그때만 해도 조선 3대 어시장으로 매우 번잡했다. 사람 눈에 뛸 것을 우려한 신부는 강경 바로 턱 밑인 인적 드문 나암포 화산(華山)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지금 그 화산은 나바위성당이 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동네 아이들이 여름에 멱을 감을 때 화산 위에서 강으로 다이빙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강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둑을 쌓아 강으로부터 약 500미터나 떨어져 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나바위성당 내부

성당건축은 유럽식과 조선 양식이 혼합되어 있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 신부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이 담당했다. 1906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7년에 완공했다. 특이한 것은 성당내부를 양 쪽으로 나눠 남녀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따로 앉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란 관습 때문이었을 게다.

미네다리

미네다리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강경은 익산과 어깨를 같이 한다. 익산시에서 강경까지 흐르는 하천은 강경천이다. 이 강경천에는 200년 가까이 된 돌다리가 있다. 영조 7년에 축조된 미네다리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바닷물이 왕래하는 큰 천이 있는데, 그 천은 미네천이고 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미네다리이다.

지금과 물 흐름이 전혀 달라 엉뚱한 곳에 위치해 있어 정말 다리였나 의심될 정도다. 이곳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이리저리 몇 번씩이나 숨바꼭질을 했다. 2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남아 있는 것이 이 정도밖에 없다니, 우리 국민들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네다리를 찾느라 한참을 헤매다 보니 목이 말랐다. 인근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물을 샀다. 슈퍼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앞을 바라보니 강경상고가 보인다.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 명문학교다. 전국 최고 상권을 차지하던 그 시절, 강경상고하면 누구나 알아주는 대단한 고등학교였었다.

강경포구

강경포구에 조그마한 배 한척 떠 있네.
바로 옆 고개를 넘으니 강경포구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조그마한 배 한 척이 전체 풍경을 압도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강폭은 넓었고 습지는 자연 그대로다. 세월이 더 흐르면 이 습지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내어 줄 것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4대강 개발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업보다 이것을 더 우선적으로 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를 생각해 보면, 이곳은 DMZ의 자연처럼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부여 나성 유적

아름다운 강 생태계를 감상하면서 산모퉁이에 다달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용케 작은 안내판 하나를 발견했다. 부여 나성(羅城)이다. 나성은 수도 사비를 지키는 외곽 성으로 538년에 흙과 돌로 쌓아 부소산성과 연결시켰다. 비록 흙으로 축성되었지만 당시는 성 위를 말을 타고 순찰할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석가탄신일에 수박보시를 받다.
강둑 옆 넓은 평야에 긴 하천이 보인다. 왕포천이다. 왕포천과 강 둑 사이로 수십만 평의 비닐하우스가 펼쳐져 있다. 마치 눈 덮인 벌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여기가 전국 생산의 10%정도를 차지하는 수박 생산지란다.

수박단지

바람이 불어 입안이 바짝 말랐다. 수박이 먹고 싶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는 사람만 보면 큰소리로 수박 파느냐고 물었다. 모두들 안 판다고 말한다. 아마 낱개로는 팔지 않는가 보다. 거의 포기하려 할 무렵, 한 농부가 손짓한다. “팔지는 않지만 그냥 줄 것은 있어요. 들어오세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음씨 좋은 50 중반의 부부 농부였다. 절에 갔다 방금 돌아왔는지 외출복 차림이다. 비닐하우스로 1년에 3개월씩 수박·메론·호박을 차례로 농사를 짓는데 지금은 수박 철이라고 한다. 금년은 출하가 한꺼번에 이루어져 제 값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오늘은 수박 출하를 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보시하려는 눈치다. 아! 오늘이 석가탄신일이구나. 이 부부는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말 한마디로 이미 보시를 했다. 이런 마음을 가지신 분이 부처고 이곳이 바로 극락일 것이다.

백제 오천결사대 충혼탑

충신 계백의 혼은 죽지 않았다.
30분쯤 더 가니 충혼탑이 나왔다. 백제 오천결사대 충혼탑(百濟五千決死隊忠魂塔)이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처자식을 죽이고 오천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결사항전에 나섰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위징은 당태종에게 충신(忠臣)보다는 양신(良臣)이 되게 해달라고 말한다. 충신은 자기 이름은 역사에 남기지만, 왕조는 망하고 가문은 폐족된다. 양신은 왕과 신하, 자기 가문 모두가 청사에 빛난다.

위징은 자기의 간언을 소홀히 하지 말기를 간곡히 진언한다. 계백장군, 성충과 흥수는 백제의 3충신으로 지금까지 그 위명이 전해오지만, 백제는 망하고 그들 가족은 온 데 간 데가 없다 .

궁남지

오천결사대 충혼탑에서 300m만 더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인 궁남지(宮南池)가 나온다. 궁의 남쪽에 위치한 연못이다. 634년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선다. 이 궁남지에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백제무왕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연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수양버들을 보았다. 초봄의 수양버들은 파스텔 톤의 여린 초록 빛깔이 일품인데, 여름 내음을 물씬 풍기는 짙은 녹음이 나를 아쉽게 했다.

신동엽 시비

신동엽의 고단한 시를 만나다.
궁남지에서 조금 더 가니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의 시비가 있었다. 신동엽 시인은 부여 태생으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질곡 같은 현실생활에서 민족적이며 저항적인 의미의 시를 생산했다.

그는 금강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1967년, 죽기 2년 전에 무려 4800여 행이나 되는 대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백제, 천 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가서 백제는
엊그제 그끄제 있다.”

아무래도 그의 대표작은 ‘껍데기는 가라’가 아닐까 싶다. 나에게 이 시는 아직도 낯설다. 그는 지금도 시 속에서처럼 연단에 서서 반봉건, 반독재, 반외세, 반폭력을 단호하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서슬 퍼런 1967년에 발표했으니, 당시에 형무소에 끌려가지 않은 것이 되레 이상하다.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이제는 신동엽의 저항시도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다고 한다. 시대 상황에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분별 있는 태도를 고고하게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낙화암

낙화암 3천 궁녀의 비명소리가 나는 듯하다.
우리 일행은 백제대교를 건넜다. 부소산 건너 자전거 길을 가 보고 싶었다. 7㎞ 쯤 가니 부소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아래로는 소위 백마강이 흐른다. 산 아래쪽으로 고란사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뒤편은 왕흥사(王興寺)지 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흥사는 30여 년 공사 끝에 무왕 634년에 완공되었다. 백제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백제가 패망하면서 주춧돌마저 없애버렸는지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낙화암을 보면 헛것이 보인다. 멀리 낭떠러지 위에서 치마로 눈을 가린 채 꽃잎처럼 강물에 떨어지는 3천 궁녀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옥이 따로 없다. 노래가사처럼 달빛 어린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의 혼을 달래주고 싶다. 문득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 혹은 그 무엇인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백제문화단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서산의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니 백마강 대교가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제문화단지다. 이 단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약 7000억 원을 투자해서 만들고 있지만 아직도 한참 미완성이다.

우리는 개방시간이 훌쩍 넘어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아쉬움만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7시다. 피곤하지만 꽤 즐거운 라이딩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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