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나두야 간다’, 정박할 항구는 어디일까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나두야 간다’, 정박할 항구는 어디일까
  • 이규식
  • 승인 2016.06.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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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철 시비 사진=광주광역시 광산구청

‘나두야 간다’, 정박할 항구는 어디일까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 박용철, ‘떠나가는 배’ 전부

 

▲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이곳저곳 닻을 내리다가 또다시 떠나가는 배의 숙명을 닮았을까. 용아 박용철 시인(1904-1938)은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배재학당으로 전학했다. 졸업 몇 달을  남기고 자퇴하고 귀향하였는데 그 후 일본 동경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를 거쳐 동경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수개월 후 자퇴하고 문학에 전념하였다. 이렇듯 기복이 심한 그의 수학이력은 줄곧 떠나가야 하는 운명의 배 이미지와 우연찮게 겹쳐진다. 

박용철 시인이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아오야마 학원 시절 김영랑 시인과의 친교에서 비롯되었다.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 ‘문예월간’ 4권, 그리고 ‘문학’ 3권 등 총 10권을 간행하였다. 정지용, 김영랑 등의 시집과 문예지를 펴내는 등 시와 평론창작 활동, 번역과 출판업무에 전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펴내지 못하였다.

‘떠나가는 배’는 박용철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로 애송된다.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 삶을 비유한 작품은 흔하지만 이 시에서는 인정과 고향을 되돌아보는 현실, 각박한 삶의 도정 속에서 또 다른 기항지를 찾아 떠나려는 이상과의 내적 갈등이 드러난다. 왜 떠나가는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떠나지 않으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절박한 현실이 비쳐진다. 떠나가서 닿을 곳도, 의지가 될 ‘앞 대일 언덕’도 마뜩치 않은 상황이다. 미지의 장소를 향하여, 그 어떤 보장이나 희망도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착잡한 심회를 ‘나 두 야 간다’라고 굳이 한 글자 한 글자 의도적으로 띄어 쓴 대목에서 읽어본다. 이즈음 겹겹의 곤경에 처한 청년세대의 현실과 심회가 이 시에 겹쳐지면서 척박한 상황 속에서 불퇴전의 의지로 삶의 항로를 개척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성원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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