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한밭복싱체육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한밭복싱체육관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의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36)
  •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
  • 승인 2016.06.24 14: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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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도심에 숨어있는 도장
현재 대전 원도심의 가장 번화한 곳은 중앙로이다.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을 잇는 중앙로에는 곳곳에 금융기관이 입주해 있는 대형 건물과 백화점, 수많은 상점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도로를 꽉 채운 차들, 최신 유행과 온갖 소음이 뒤섞여 현대라는 시간이 어떤 것인지 잘 살필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런 상업지구의 특징 중 하나는 가장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빠른 변화야말로 생명력이라 불리는 상업지구의 한복판에서 시간이 멈춰선 곳을 만날 수 있다.  

한밭권투체육관. 공식적인 주소는 대전광역시 중구 중앙로 156번길 10이다. 그러나 찾기는 쉽지 않다. 중앙로역 1번 출구로 올라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치안센터와 삼성생명 건물 사이 자그마한 골목을 찾을 수 있다.

낮에도 관심 없이 보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작은 골목,  그 골목은 1m도 되지 않는 폭으로 5m 정도 이어진다. 용기를 내어 들어서보라. 그러면 왼쪽으로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 집을 하나 만날 수 있다.

볕도 잘 찾아들지 못하는 체육관 앞 작은 마당에서 젖은 몸을 말리는 운동복들이 먼저 눈에 띈다. 지난 저녁 흠뻑 땀을 먹었을 운동복들은 이 오래되고 작은 공간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70~80년대를 건너온 사람이라면 귀에 익숙한 권투의 한 라운드를 알리는 공소리가 들린다.

저 날카롭게 들리는 금속성의 신호에 수많은 선수들이 의자를 박차고 상대를 향해 뛰어나갔으며 또 풀린 다리를 가누며 겨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으리라. 문 옆 ‘한밭복싱훈련도장’이라고 쓰여 있는 나무 간판 너머로 작은 링이 보이고 사무실로 쓰는 공간에서 이수남 관장이 걸어 나온다. 자동으로 울리는 공소리와 함께 오롯이 체육관을 지키고 있다.  
 
 

창고에서 시작한 역사
한밭권투체육관의 역사는 바로 관장 이수남 씨의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개관 4년 후인 1965년, 선수생활을 접으면서부터 체육관의 관장으로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일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기억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1년입니다. 처음 체육관이 문을 연 때가.”

자그마한 체구에 다부진 인상이지만 선하게 웃는 이수남 관장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동안이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한밭권투체육관의 역사를 풀어놓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무렵은 한국 땅에 사는 모든 이가 헐벗고 굶주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이었다. 거리는 몸 누일 곳, 먹을 것 없이 떠도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더욱이 아이들은 말도 못할 정도로 비참했다.

“길거리는 폐지 줍는 아이, 거지, 구두닦이, 껌 파는 아이, 뭐든 훔쳐서 파는 아이들로 말도 못할 지경이었어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군사정권이던 그 시절, 충남도지사는 대령 계급의 군인이었다. 한밭권투체육관의 초대 관장이었던 박찬규 씨와 도지사는 친분을 가진 사이었다고 한다. 그때 두 사람은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운동이라도 가르치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이들도 선도하고 거리도 정화해보자는 차원이었다.

지금 한밭권투체육관 자리는 당시 시청에 딸린 부속 창고였다. 도지사는 시와 협의해 급한 대로 창고로 쓰던 건물을 내어주었고 거기서 일단 아이들을 모아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링은 커녕 아무런 운동기구도 없었다. 코치도 체계적인 훈련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저 창고의 맨 바닥에서 뛰면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전부였다.

“물도 모두 길어다 먹었죠. 그걸로 씻고.”

지금은 대형 건물로 막힌 체육관의 한쪽 벽과 붙어 있는 쪽이 예전에는 보건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커다란 굴뚝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연신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상황을 따질 환경이 아니었다. 못 먹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뭐라도 조금 생기면 솥을 걸고 끓여 같이 나눠먹으며,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는 장소였다.
“돈요? 아이들 가르친다고 해서 보수? 이런 거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운동하면서 가르친 거죠.”

꿈이 자라는 마룻바닥
살아남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운동을 시작하면서 많은 이들이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챔피언!

“‘헝그리 복서’라는 말 아시죠? 그 말도 우리 체육관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모두가 배고픈 아이들이었잖아요. 이를 악물고 운동했죠. 그때부터 모두 오로지 권투를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어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이수남 관장의 인생도 그 꿈으로 버텨온 힘든 여정이었다. 마산에서 태어난 이 관장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혼자 두 아들을 키우던 어머니와 함께 마산의 사글세방은 안 다닌 곳이 없었다. 무려 80여 번이 넘게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대전으로 이사와 보문중학교를 다니면서 권투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한겨울에도 내복이 뭔지도 모르고 권투에 온 정열을 바쳤다.

“내복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고 살았어요. 결혼해서 부인이 사준 내복을 보고 겨울내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이렇게 권투로 성장한 이수남 관장은 1965년, 한밭권투체육관의 두 번째 관장 자리를 맡기 전까지 촉망받는 플라이급 선수였다. 동경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 세 차례에 걸친 선발전을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 4차 선발전에서 조동기 선수와 맞붙었다.

“선수면 누구나 그렇지만 나도 동경올림픽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죠. 꼭 나가고 싶었고 꼭 이기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는 아깝게 졌다. 그때 그가 받았을 낙담만큼이나 깊이 찢어진 눈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다.

“나는 굉장히 초라해졌어요.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러다가 이제 아이들을 한번 키워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가 1965년입니다. 이후 체육관이 조금씩 틀을 갖춰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있으니, 제 청춘, 아니 인생을 다 바친 거죠.”

문득 이수남 관장이 동경올림픽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면 지금의 한밭체육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일 오래되고 제일 많은
세월은 그렇게 조용히 흐른다. 권투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아이들이 워낙 많기도 했지만 권투를 향한 정열 또한 뜨거웠다.

이수남 관장이 한밭권투체육관을 맡은 후로 점점 좋은 선수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5년 정도 지나면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선수들이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수남 관장이 슬쩍 들어 보인 자부심은 이렇다.

“우리 체육관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체육관이자 제일 많은 선수들을 길러낸 체육관이기도 합니다. 기록이 다 있어요.”

그와 함께 운동했던 제자들만 해도 1만 5천여명에 이른다.
50회 전국체전에서의 일이다. 충남의 대표선수를 선발하는 대회에 많은 체육관이 참가했다.
모두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었지만 한밭권투체육관은 11명이 출전해 11명 모두가 충남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전국체전에서 권투부분 종합1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죠. 권투 종합1위를 우리가 일궈냈어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체육관으로 찾아온 자그마한 체구의 한 중학생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세계챔피언으로 성장한 염동균 선수였다. 이외에도 88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에 출전했던 수많은 선수들이 한밭권투체육관에서 성장했다.

권투가 인기종목으로 자리 잡고 많은 결과가 나오자 체육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커져갔다. 그러나 궂긴 일도 많았다. 운동하는 아이들이 워낙 많았고 대부분 울분을 가지고 살다보니까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파출소에서 전화 오면 쫓아가서 사정하고 아이를 다시 데려오는 일은 다반사였었죠. 그런 세월을 살았습니다.”
 

헌신의 비밀
이수남 관장은 단순히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려운 청소년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했던 대부의 삶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꾸려왔는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70년대, 권투가 인기 종목이었을 때에도 수입은 전혀 없었어요.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는 친구들에게는 몇 천 원 정도 받고 운동을 가르쳤죠. 수도세, 전기세는 내야하니까.”

이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체육관이 받고 있는 금액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유지비 이상은 아니었다.

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집사람이 21살에 나에게 시집와서부터 얼마 전까지 식당을 운영했어요.”

이수남 관장은 일 년에 여러 번 선수들을 데리고 전국을 누볐다. 선수들을 위해 시합을 찾아다닌 것이다.

“선수들은 시합을 많이 뛰어야 실력이 늘어요. 그래서 대한민국에 있는 시합은 모두 데리고 다녔죠.”
시합이 있다는 공문이 내려오면 이 관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말이 잘 통해 돈을 타기도 하고 부인 몰래 계산대에서 조금씩 돈을 훔치기도 했다는 고백이었다.

“체육관에서 먹고 자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렇게 내 청춘을 다 바친 곳이 이 체육관입니다.”

이수남 관장은 1971년에 중앙공인심판 자격증을 땄다. 아무래도 억울한 심판 판정이 많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심판에게 항의할 때 심판장이 알아볼 수 없는 채점표를 보여주면서 얘기하면 승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해 심판자격증을 땄고 그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자격증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 충남과 대전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심판을 배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수남 관장의 인생 전체가 운동을 통해 봉사와 헌신하는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대전소년원에서 8년 동안 재소자들을 지도했던 것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소년원은 지금의 엑스포 근처에 있었다. 대흥동에서 소년원까지 먼 거리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정말 힘겹게 지도했다고 한다.

“당시 소년원의 신태식 원장님이 나에게 미쳐있었어요. 지도를 시작하자 소년원 안에 링도 만들고 시합 나가면 같이 나와 세컨을 보고 그랬죠. 그 결과 41회 신인왕대회에서 우승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소년원에서 시합을 나가 우승을 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일로 법무부장관이 손을 잡고 한참동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또 많은 친구들이 출원하고는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가는 걸 보면 가슴이 많이 아팠다.

“고아인 한 아이가 운동을 잘해서 나오면 내 양아들로 삼아 계속 운동을 시키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나오자마자 연락이 끊겼죠. 안타까워요.”

또 이수남 관장은 대전체고가 처음 만들어질 때 찾아가 권투부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교육청에 매달려 겨우 승인을 받아내고는 3년 동안 무보수로 학생들을 지도해 권투부를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다. 어렵게 운동하던 아이들에게 진학의 길도 열어준 것이다.

지금도 체육관 안에 걸려있는 수많은 낡은 감사패들은 오랜 시간 이어졌던 그의 헌신을 말해주고 있다. 이 관장에게 체육관의 미래를 묻자 역시 권투였다. 아직도 진짜 권투를 하고 싶어하는 이수남 관장에게 권투는 끝이 없었다. 종은 끝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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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1 10:06:08
살아온 이야기가 영화같네요..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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