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삶의 성숙을 향하여, 지금은 어느 역에 머무르나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삶의 성숙을 향하여, 지금은 어느 역에 머무르나
  • 이규식
  • 승인 2016.07.01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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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기 시인 시비

삶의 성숙을 향하여, 지금은 어느 역에 머무르나

푸른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한성기, ‘역’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해방 공간 대전충청 문단형성에 큰 업적을 남긴 정훈시인이 제시한 자연, 향토의식과 토착성이라는 화두는 그 이후 많은 시인들에게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충청지역 시단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었다. 이 맥락은 한성기(1923~1984) 시인에게도 이어진다. 한성기의 시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관조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마주하고 느끼는 경이감을 흥분이나 격앙을 배제한 채 차분하고 개성적인 이미지로 구체화시키려 하였다. 자연 친화와 자연 관조, 자연을 노래할 때 늘 수반되는 토속어 사용이나 율격 등은 한성기 시인의 작품에서는 객관화의 차원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정직하고 소박하면서 단순한 시선아래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거기서 우러나는 감동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가 찾은 것은 삶의 성숙이 아니었을까. 그의 삶이 보여준 궁핍과 외로움, 그 속에서 끝없이 성숙해지려는 치열한 내면이 시 행간에서 관조와 명상의 리듬을 타고 내비친다. 그러므로 한성기 시의 주제는 자연친화, 투병, 연모, 고독, 허무 같은 일견 진부해 보이는 상투성에 머무르는듯 하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역량의 미덕으로 상쇄되면서 오히려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설득력을 확보하였다.

추풍령 고개, 조치원 복숭아밭, 예산 신문지국, 유성 로타리 빵집, 진잠 들길 등 한성기 시인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흰 고무신을 신고 걸었던 수많은 길의 여로에서 그는 자연 속에 때로 도시문명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성숙한 삶을 염원하였다.

근대 이후 서양 문학에서 자연은 더 이상 인간사회의 단순한 배경이나 휴식 공간 기능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추억을 간직해 주는 공모자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자연의 이런 영역확산은 새로운 감수성 도입, 느끼는 방법의 쇄신 같은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감정의 과잉 노출, 즉흥적 감상성 같은 상투성을 낳으면서 다양한 반동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성기 시인에 있어서의 자연은 가까이 밀착되어 속내 이야기를 나누는 동반자일 수 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연의 삼라만상 속에서 상징의 기호를 유추하여 그 신비를 풀어내는 암호 해독자의 역할을 맡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거기서 드러나는 경이감을 애써 담담하게 객관화시킴으로써 그것의 위력을 증폭시키기에 성공한 예를 보여 주었다. 설명투의 시어 전개가 갖는 단조로움도 이 객관화 과정을 통하여 경감될 수 있었고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던 것이다. 대전시 문화동 옛 시민회관 앞에 조성되었던 한성기 시비<사진>가 ‘대전예술가의 집’이 들어서면서 약간 옆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삶의 성숙과 자연 친화, 자연 관조를 갈망했던 그의 꿈은 지금은 어느 선로를 따라 어느 역에 머물고 있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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