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석의 新만인보] “김일성이 헤어질 때 권총과 40만 달러를 줬다”
[나정석의 新만인보] “김일성이 헤어질 때 권총과 40만 달러를 줬다”
北 김일성과 1박 2일 만난 유일한 민간인,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을 만나다
  • 나정석 대기자
  • 승인 2016.07.0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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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나정석 대기자] 6월은 호국영령의 달이다. 누가 이런 훌륭한 문구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단지 한사람 기억이 난다. 채명신 장군이다. 며칠 전 방송에서 한국전쟁의 최고의 영웅 1번으로 올라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3등이었다. 나는 그와의 만남을 기억한다. 그의 집은 후암동이었다. 그에게 남하한 배경. 김일성과의 인연. 육사를 들어간 배경. 북한 빨치산활동 등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는 국립 대전현충원 사병묘역에 묻혀있다.

동시에 언뜻 생각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1984년 학내조직에서 만났다. 1984년 10월 10일 서울대에서 데모가 있었다. 그날 밤 그의 손은 물집으로 범벅이 돼있었다. “야 인마, 손이 그게 뭐야?” 그랬더니 화염병으로 페퍼포그를 박살내려다 불발이 되서 이리 됐다고 했다. 이 사건이 학생운동사에서 화염병이 등장한 최초이다.

그는 1986년 강철서신이라는 팸플릿으로 학생운동 조직을 정리했다. 구국학년조직을 만들어 서울대를 접수하고 주요대학교를 정리하며 전대협이라는 대중조직을 건설하며 전국에 자신의 이론을 조직적으로 구축했다.

김일성주석과 만나 국가사를 논의한 고위공직자는 3공의 실세 이후락 정보부장과 5공실세 장세동 안기부장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작성한 6공 황태자 박철언 장관도 김일성과 1박 2일을 대담하지 않았다. 김영환은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언급한대로 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사회의 강력한 두 세력, 군부와 학생세력 중 학생운동을 평정한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1. 북한의 잠수정을 타고 김일성주석과 회동했다. 회동장소는? 누가 배석했는가? 무슨 일이 있었나?
평양에서의 숙소는 초대소였는데 초대소 이름은 모른다. 함께 북한을 방문한 친구는 서울대 83학번 정치학과 조유식이다. 인터넷 서적 알라딘의 대표이다.

김일성은 묘향산에서 만났다. 김일성 건물 바로 건너편에 있는 호텔이었는데 외국 정상들만 사용한다는 방이었다. 대화 내용에서 인상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

6시간이나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이 항일 빨치산 활동 할 때의 이야기가 많았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고 실망했다.
배석 인물은 처음 10분간은 사회문화부 부장이었고, 본격 회담에 들어가서는 사회문화부 과장이 서기 자격으로 배석했다.

회담 장소는 묘향산 특각의 대회의실이었으며 2시간 이야기한 다음에 식당으로 옮겨서 식사를 하면서 1시간 30~40분 정도 이야기했다. 그 다음날은 오전에 2시간~2시간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와 헤어질 때 권총 두 자루와 미화 40만 달러를 제공받으며 “동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자”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2. 주체사상파의 형성과 기본 배경은?
1980년대의 군부독재의 탄압이 매우 거셌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학생운동도 날이 갈수록 거세어졌다. 전 세계 각종 사상이론 중에서 투쟁의 이론을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유일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사회주의의 본질적 문제점이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학생운동권에 마르크스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 주의가 매우 빠른 속도로 퍼졌다. 마르크스주의가 퍼지는 동시에 학생운동권에서 조금씩 북한 혹은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필자가 쓴 글인 ‘강철서신’ 등의 글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1980년대에 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민족으로서 언젠가는 통일해야 할 대상으로서, 그리고 심각한 북한정보 통제 속에서 북한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에 관한 욕구도 강했다. 또 그 당시에 매우 강했던 민족주의적 경향은 강한 ‘민족주체성’을 외치는 북한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특히 북한이 독특한 사상으로 내세웠던 주체사상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강하게 충동질했다. 그리하여 많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주체사상이나 북한과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성적으로 토론했다. 당시에는 북한이 강한 민족주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였고,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론이 참신하고 진보적으로 판단되었으며, 연방제 통일정책을 비롯한 여러 정책들이 적절하고 진보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이나 주체사상에 관한 선입견 없는 고민은 일종의 ‘우상깨기 운동’이었다. 우리들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마지막 남은 우상인 ‘북한 콤플렉스’를 깨어 버리려는 노력이었다. 우상을 깨고 이성을 세우자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식인으로서 아주 당연하고 정당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우상을 깨려고 시작한 운동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스스로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친북적인 분위기나 주체사상을 널리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러한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 어떤 논리로도 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친북과 북한 추종주의는 다르다고 보았고 북한과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북한을 추종하기 시작하면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주체사상의 기본원리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북한 추종주의를 경계하는 식의 논리를 폈지만 내가 교도소에 가 있는 몇 년 동안 이미 운동권의 북한 추종적 경향은 너무나 강해져 있어서 주사파의 대부로 불렸던 나로서도 어떻게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있었다.

3. 북한의 인권실상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나?
나는 소련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조금씩 키우고 있었는데 1991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와서 북한의 폐쇄성과 낙후성, 지나치게 강압적인 사회분위기,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무책임한 태도 등을 보고 와서 결정적으로 이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탈북자들은 그야말로 정보의 보고였다.

탈북자들이 가져다 준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매우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데 기초하고 있다. 둘째, 탈북자들 증언의 대부분이 중국 등 한국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셋째, 식량난 때문에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성향이 거의 없는 단순 탈북자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정치색 때문에 증언이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매우 낮게 만들었다. 넷째, 탈북자들을 취재한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데도 취재 결과가 거의 비슷하다는 데 있다. 다섯째, 탈북자들의 증언이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북한 정보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가져다 준 정보에 기초해서 확실한 것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에선 기본적인 인권이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론자유가 전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들에 대한 구타와 폭언이 난무하고, 특별독재대상구역(정치범 수용소)이나 교화소에서는 재판 없는 총살이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관료주의가 극심하다는 것이다. 하급관료들뿐 아니라 방북자들이 주로 만나는 중·고급 관료들도 관료주의가 심하다는 것이 방북자들의 일관된 증언이다.

셋째, 부정과 부패가 극심하다는 것이다. 이를 제어할 수단이 없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이순옥이라는 탈북자는 군의 경찰(인민보안부) 책임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다가 억울하게 구속되었는데 어느 곳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더라고 했다.

넷째, 무능과 비능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한 경제난의 근본적 원인이다. 북한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중국시장에 육지로나 바다로나 바로 근접해 있고 또 중국이 북한을 국방정책상 사활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한 없이 수출하고 수입할 수 있으며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4. 수령절대주의 사기인가 아닌가?
북한은 주체사상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주체사상의 수령론조차 지키지 않는다. 북한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주체사상의 수령론이고, 바로 이 주체사상의 수령론이 북한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이해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수령론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수령-당-대중을 인간의 몸에 비유하여 수령을 뇌수로 보는 논리이고, 둘째는 수령과 대중이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맺어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북한의 신문이나 방송은 전혀 알리지 않았고, 잠수함 사건 때도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반대로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또 대중이 수령에게 정보나 의견을 제공하는 데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된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당 부부장 이명재의 부인이자 김일성대학 교수인 어떤 여성이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김정일 동지의 사생활에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으니 수령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라’라는 취지의 편지를 김일성에게 보냈다가 김정일과 남편, 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물론 그 편지는 김일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북한의 개천교화소에 있다가 출소한 후 한 탈북자는 “북한의 어떤 여인이 굶주리는 애들에게 주려고 밭에 가서 몰래 무를 몇 개 뽑아 오다가 걸려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부모 없이 남은 애들이 걱정되어 교화소에서 울다가 수령과 당을 믿지 못한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고 한다. 어떤 할머니는 재봉질 할 솜에 이물질이 끼어 재봉바늘을 부러뜨렸는데 국가에 재정적 손실을 끼쳤다고 죽도록 얻어맞았다. 이렇게 심하게 통제하는 것이 어떻게 의리이고 동지애인가.

주체사상 수령론은 허구이며 사기다. 그것은 3000만 북한 인민을 엄청난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거대한 사기극이다.

5. 북한 인권운동 과제는 무엇이고 전망은 있는가?
북한인권운동이 본격화 된지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국제사회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북한인권운동의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하였고 북한인권운동 역량 또한 질적, 양적으로 급성장하였다.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고 전문성이나 활동력도 강화되어 왔다. 그 결과 탈북자 문제나 납북자 문제 등 접근 가능한 영역에서의 북한인권 개선의 성과를 낳았다. 반면, 지난 10년 북한인권운동에는 일부 한계와 어려움도 있었다. 북한인권 개선에 대해 북한정권이 스스로의 개선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조건에서 북한인권운동은 새로운 접근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변화 요구에 대한 북한인권운동 주체들의 효과적인 해법 제시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북한인권운동은 정체상태에 직면해 있고 대안부재라는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 인권운동의 주체가 북한주민이고, 북한인권 개선의 해법도 북한주민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즉 북한주민의 인권의식 함양, 권리에 대한 자각을 일깨울 수 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북한주민들에게 외부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서 북한주민들의 권리에 대한 자각과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외부의 노력이 중요하다.

과제라고 하면 규모화, 전문화, 대중화에 있다. 북한 인권운동을 규모화 한다는 것은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이며, 전문화라 함은 내부역량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대중화라 함은 국민운동으로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문제제기 될 수 있다.

또 북한 인권운동의 규모화를 통한 역량결집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북한 인권단체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며 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 할 수 있는 민간차원의 ‘북한 인권재단’설립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북한 인권운동을 전문화하기 위해서는 북한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북한인권운동가들의 능력과 역량을 높이기 위한 교육과 훈련이 요구된다.

더불어 북한 인권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일반 국민들의 공감과 참여가 가능할 수 있는 대중적인 국민운동이 필요하다. 지대한 국민적 관심을 일으킨 ‘통영의 딸 캠페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국민들은 자기 이웃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우나 문화적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누구나가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는 인권이슈와 담론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더불어 국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 갈 수 있는 영화나 연극, 콘서트, 만화 등의 문화 콘텐츠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인권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대국민 홍보를 적극화 할 필요가 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정석 대기자.

서울대 독어독문과 졸업.
월간지 코리아뉴스매거진 발행인.
전문기업 이노프트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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