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극동러시아 기행] ②항일운동의 현장에 서다
[임영호의 극동러시아 기행] ②항일운동의 현장에 서다
  •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 승인 2016.07.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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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각계 300명으로 구성된 ‘유라시아 횡단 친선열차 원정대’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7월 1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모스크바, 베를린까지 19박 20일의 대장정을 펼쳤다. 당시 박근혜정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 현실화 임무를 띤 원정대는 유라시아 각국의 주요 도시를 경유하며 세계 경제현장을 돌아보고, 대한민국 철도산업 발전을 미래를 구상했다.

당시 나는 아쉽게도 북경을 거쳐 몽골에서 본진에 합류했다. 그 뒤로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동단이자 우리 민족의 아픈 근현대사를 간직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내가 꼭 가봐야 할 곳이 됐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지난 6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향토박물관

두 번째 날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났다. 생각보다 훤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백야현상이 있었다. 밤은 늦게 오고 새벽이 일찍 찾아온다. 식사를 마치고 향토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연사와 역사, 민속이 다 포함된 종합박물관이다.

제일 먼저 호랑이 박제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르 호랑이는 한반도의 호랑이와 같다. 한국화 속에서 보았던 모습이라 눈에 익었다. 반달곰도 있었다. 지리산에 방생한 반달곰보다 컸다. 동식물을 보니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비슷하다.

향토박물관 전시물

간호사들의 근무복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박물관도 있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각 분야의 생활변천사다. 이 박물관은 어느 부호가 사재를 털어 박물관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과거 충남도청 자리에 이런 박물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주의 국가에는 의례히 광장이 있다. 광장은 공동체 이미지를 상징한다. 러시아의 각 도시마다 대표적인 광장에 레닌동상이 있다. 왜 그는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게 하지 말라고 했을까? 이성은 도구이고 감성이 없는 이성은 기계다. 레닌은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눈앞의 목표에 몰입하면 수단만 보인다. 레닌은 저 세상에서 개인의 소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블라디보스토크역

언덕 위 레닌광장에서 눈 아래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죽기 전에 보아야할 역사유적 중 하나라고 한다. 황실궁전처럼 상아색으로 아름다웠다. 일반대중이 이용하는 역이지만 화려하게 지었다. 일종의 기분 좋은 사치품이다.

이 역은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다. 오후 내내 안중근 의사의 환상에 시달렸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황해도 사람이다. 안 의사는 물론이고 백범선생도 부친 안태훈 진사로 부터 어린 시절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안 의사는 나라가 기울자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거주를 옮겼다. 그 곳에서 의병조직을 만들어 함경도로 진격, 일본군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의기를 꺾지 못했다. 아니 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

안 의사는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다.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인이 손가락을 잘라, ‘동의 단지회’를 만들었다. 한반도가 점차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원수들을 죽이기로 하늘에 맹세하게 된다.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 대상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떠나 하얼빈 역으로 갔다. 마침내 그의 뜻을 이루었다. 법정에서 최후 변론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곰곰이 씹어 보면 그는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안 의사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산 사람이다.

하얼빈 역 구내

역 구내에는 9288km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여기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국에서 1940년경 수입했다는 기차 한량도 전시되어 있었다. 옛 것은 묘하게도 낭만의 향기를 풍긴다.

역 바로 옆은 부둣가다. 배들이 들락거리는 여객터미널이 있다. 육상의 기차역과 함께 있으니 환승시스템치고는 최고다. 동해시에서 오는 여객선도 바로 이곳에서 정박한다고 한다. 그날은 조용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배우 율 브린너(1920~1985)의 생가를 스쳤다.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한 배우다. 율 브린너는 미국식 이름이고 러시아 본명은 ‘율리 보리소비치 브리네르’이다. 몽골인의 피가 섞였는지, 그는 혼혈의 독특한 외모가 돋보인다. 특히 그의 대머리는 강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율 브린너는 생전에 한국 등 극동아시아에 향수를 가졌다고 한다. 유년시절에 벌목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해마다 함경도 지방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썸머 코리안 보이’라고 불렀다. 극동아시아 문화를 체험을 통해 이해하는 사람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격동의 민족역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축구장 옆으로 버스가 지나자 가이드는 여기가 바로 초기 한인촌인 ‘개척리(開拓里)’라고 안내한다.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다.

우리 민족은 19세기 중엽부터 이곳에 하나 둘씩 이주하였다. 오죽하면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 왔을까? 이때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려 민생은 파탄났고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어느 누군가 무지렁이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고통이 그들의 영혼을 깨웠다. 함경도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킨 이가 홍경래다. 이 난이 평정된 후 많은 사람들이 새 땅에 희망을 걸고 조국을 등졌다.

당시 러시아 시베리아 총독은 탐험가이며 개척자인 아무르스키(1809~1881)였다. 그는 이곳에 사는 청국 인들을 추방하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이주시켰으며 다음으로 조선인을 받았다. 시베리아 철도를 처음 제안한 이도 아무르스키다. 조국의 미래를 위한 멈추지 않은 그의 행동은 존경을 받을만하다.

러시아는 우리 민족에게 땅의 개간을 허락하고 20년 간 면세혜택을 주었다. 가족단위로 이곳으로 본격 이주한 것은 1860년부터이다. 처음 조선농민 13가구가 추운 겨울밤에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 강 인근지역에 정착했다. 1902년에는 무려 3만여 명이 이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시인 김동환(金東換, 1901~?)의 ‘국경의 밤’이 떠오른다. 배경은 두만강변이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외투 쓴 거문 순사가
왔다____갔다____
오르명 내리명 분주하는 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건물은 유럽식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문화도 약육강식인가. 강한 유럽문화의 아시아 침략이다. 지구 반대편 먼 이 곳까지 이 지역과 색다른 문화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고려청자도 예술품이지만 건물도 예술품이다. 오히려 건축물이 더 많이 감성을 자극한다.

도로도 옛날 그대로였다. 자동차가 많아졌어도 도로를 확장하지 않고 일방통행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조선말 서울 정동에 구러시아 공사관이 있었다. 과거의 유산이 현재를 거쳐 미래로 연결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독수리 전망대

블라디보스토크의 지대 높은 곳에 시내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가 있었다. 2012년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의체 APEC이 이곳에서 열렸다.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변방인 이 지역에 많은 도시기반시설을 투자했다. 이 전망대도 그때 만든 것이다. 투자이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인지 시설물들도 고물로 변했다는 느낌이다.

전망 좋은 곳에 민속 옷을 입은 한 처녀가 밀가루로 만든 과자 목걸이를 걸고 서 있었다. 러시아 예절문화에 손님 환영하는 표시로 등장하는 ‘빵과 소금’과 같은 의미이다. 같이 사진 찍는데 우리 돈으로 5천원을 줬다. 멀리 배가 지나간다. 여기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4시간을 가면 북한 두만강과 접한다.

점심은 한국식당에서 했다. 주인의 성은 이 씨였다. 서울 상도동 사람이란다. 25년 간 이곳에서 살았다. 식당을 한지는 3년 정도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에 대하여 묻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북한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수입의 80%를 국가에 상납한다. 목표한대로 상납하지 못하면 빚도 진다. 휴일에도 일반시민들의 주문이 있으면 기꺼이 일을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절망은 없다.

우수리스크, 조국을 위해 희생한 선인들의 혼이 서리다.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끝내고 버스로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12km 떨어진 거리다. 가이드는 1시간 반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가는 길은 맨 자작나무 일색이다. 나무들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평원은 끝이 없고 넓었다. 어느 지역은 벼가 야생으로 자라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곳은 과거 고려인들이 농사를 짓던 곳이다. 개척리로부터 2km정도 떨어진 신한촌(新韓村)이다. 새로이 한국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러시아당국은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고려인들이 계속 늘어나자 1911년 페스트 창궐을 기화로 시에서 북쪽인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이곳에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안창호, 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같은 항일 민족 지사들과 헤이그 밀사인 이상설 등이 독립투쟁을 위한 둥지를 틀었다.

고려인문화센터

우수리스크는 항일 유적지가 많다.
3시가 다 되어서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우리는 먼저 고려인 문화센터로 갔다.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1918년 러시아에 내전이 일어났다. 제정 러시아를 몰락시킨 볼셰비키 중심의 적군과 왕정복고를 꾀하는 백군이 싸웠다. 일본군은 백군 편이었다. 일본이 시베리아에 군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쳐들어 왔다. 신한촌은 불태워지고 고려인들은 거기서 쫓겨서 여기 우수리스크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수리스크에 고려인들이 살게 된 것이다.

최재형 선생

우리는 독립운동하면 상해와 간도정도만 떠올린다. 실은 이름만 대면 아는 분들은 거의 연해주와 인연을 맺은 분들이다. 그동안 나는 너무 몰랐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다. 최재형(崔在亨,1858~1920) 선생님은 정말 몰랐다. 고등학교 때 배운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만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 초기에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 최고 지도자였다.

함경도 노비 출신으로 연해주로 건너와 사업이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부를 아낌 없이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쳤다. 동의회, 권업회를 조직하여 의병을 모으고 일본군과 싸웠다. 신문을 만들어 고려인들을 계몽하고 독립정신을 불어 넣었다. 더욱이 싹수 있는 교포자녀들을 자비로 유학까지 보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처음부터 지원했고, 나중에 안 의사의 가족을 보살피기도 했다.

1920년 우수리스크까지 쳐들어 온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했다. 막대한 돈으로 자기 한 몸 편하면 된다는 안온한 삶을 버리고 가시밭길인 무장 독립투쟁을 했다. 그에게 민족은 무엇이고 나라는 무슨 의미였을까? 조국이 자기에게 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바보 같은 위대한 사람이다.

허름한 최재형 의사의 집 건너편에는 당시 고려인 학교가 있었다.
100년 가까이 되어서도 그 장소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극장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리모델링 중이다.

그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최초의 임시정부 탄생지가 있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7년에 연해주 고려인 대표자들이 모여 대한독립의회를 탄생시켰다. 얼마못가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와 중단되고 결국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정의는 과연 이기는 것일까?

발해유적을 보여 주려고 안내원은 근처 우수리스크 시민공원으로 안내했다. 발해당시 여기는 솔빈부(率濱府)이었다. 큰 거북 상을 받침대로 비석을 세웠던 원래의 모습은 없고, 거북 상만이 생각없이 있었다.

큰 음악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춤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얼굴들이 하나같이 무표정하다. 급할 것도 크게 원하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러시아인들은 미신적인 습성이 강하다. 봄에 보는 첫 파리는 반가운 손님으로 보고 입술이 간지러우면 곧 키스할 일이 생긴다고 여긴다.

10여 분 버스를 타고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의 유허비가 있는 솔빈강변으로 갔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실패하자 귀국하지 않고 여기에 머물러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우고 학교도 세우고 광복군도 양성하였다.

1917년 이국땅에서 죽으면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했으니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우수리스크의 젖줄인 솔빈 강에 뿌려졌다. 2001년이 되어서야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그를 기리게 되었다. 조국을 위해 일하면서 강대국의 힘을 경험했고 무력감으로 괴로워했다. 오죽했으면 영세중립국을 꿈꾸었을까. 아직도 이 고통은 그치지 않았다.

발해토성

선생의 유허비가 있는 곳에서 평평한 야산이 보인다. 가이드는 그 곳이 발해토성이라고 한다. 버스로 이동하여 내려서 걸어갔다. 1000년이 지난 세월이 길긴 긴 것 같다. 평지에서 보면 하나의 둔덕이다. 들꽃만이 간간히 피어 여행객의 눈길을 끈다. 원추리 꽃은 어디나 같구나.

시베리아는 역시 기차 여행을 떠나는 곳이다.
밤기차를 타고 하바롭스크로 가려고 우수리스크 역으로 이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스쳐가는 역사가 있다. 우수리스크 시에 오기 전에 있는 라즈돌리예역이 있다.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이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가는 열차를 탔다.

우수리스크역

러시아는 1937년 여기 살던 고려인들 모두를 60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열차에 실어 끌고 갔다. 고려인들은 얼마나 절망과 두려움으로 떨었을까. 살기 위해서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건너왔고,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로, 다시 신한촌으로 또 다시 우수리스크로 옮겨가며 살아온 고려인이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시에서 “풀은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했다. 고려인들은 한결같고 끈질겼다.

홍범도 장군

제정 러시아를 멸망시킬 때 적군과 함께 싸웠고 러시아의 적인 일본군과도 싸웠는데 러시아의 이런 처사에 얼마나 분했을까?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는 일본과 전쟁을 앞두고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고려인들이 일본밀정을 할 수 있다는 우려로 추진한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이 이런 것이다. 시베리아 삭풍이 불기 시작할 때 17만 2천명이 가슴 속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 열차를 탔고, 그중 2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이 열차를 탔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저녁 7시 20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하바롭스크에 가는데 10시간 이상을 타야했다. 우리가 탄 열차는 4인 실이다. 두 남자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여자들이다.

풍경은 한 시간이면 족하다. 계속 같은 풍경이 반복되어서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다. 눈 덮인 평원을 그리면서 창 밖에 눈을 고정했다. 벌판이었고 산은 없었다. 수평선이 저 멀리 보인다. 가끔 10여 가구 정도 모여 사는 마을이 보였다 사라질 뿐이었다.

일찍 눈을 붙이려고 열차에 오르기 전에 슈퍼에서 맥주와 보드카를 샀다. 섞어서 몇 잔을 마셨다. 코를 골며 골아 떨어져 새벽에 깨어났다. 가끔 깊은 정적 속에서 기차가 헐떡이며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역인가 기차는 힘이 드는지 길게 숨을 토했다가 들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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