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절제와 비움을 깨우칠까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절제와 비움을 깨우칠까
  • 이규식
  • 승인 2016.07.16 09: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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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학명란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절제와 비움을 깨우칠까

묵은 저수지에서
우렁이가 이끼로 덮인 제 무게를 이겨내느라
한낮 내내 자맥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산미나리가 제 키만큼 향기를 채우는 동안
감나무 옆구리에서 뻐꾸기를 따라 온 바람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빠져나가며 빈 소리를 낸다

은사시나무 잎사귀가 작은 바람과 연애하느라
재갈재갈 배를 뒤집으며 웃는 소리로
배가 햇볕에 달게 속을 채우는 소리로
말벌 한 마리가 과수원 위 벌떼들을 평정하며 내지르는
사자후로 감꽃이 부끄러운 열망을 견디지 못하고
지글자글 떨어지는 소리로 온 동네가 소란스럽다

그 곳에 그저, 앉아 있기만 하면
백만 년은 됨직한 가슴 밑바닥의 퇴적층에
천천히 바람구멍 뚫리는 소리가 들린다

- 학명란, ‘쉬는 법, 은기리’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은기리는 어디일까. 경북 김천시 어모면에 있는 아름다운 풍광의 골짜기 마을이라는데 이런 세부지명 설명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시인의 긍정적 정서, 세상과 사랑을 향하여 열려있는 공감의 의식을 집약하여 형상화하는 공간이 된다. 은기리에서 시인은 즐겁다. 가벼운 흥분상태에 있다. 시창작에 있어 절제와 압축의 미덕을 잠시 내려 놓게 된다. 설명적 묘사가 꽤 길어지면서 할 이야기가 많아지는 모양이다. 아름다운 곳을 보았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물색없는 이야기 한 보따리, 그런 이야기의 실타래가 여기서 펼쳐진다.

은기리는 일견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거나 다다를 수 없는 황홀한 장소로 비쳐진다. 샹그릴라인가, 무릉도원일까 아니면 바로 지금 발 딛고 사는 삶의 현장일 수도 있겠다.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낸다면 며칠간 우렁이, 산미나리, 감나무, 뻐꾸기, 은사시나무, 벌떼, 감나무 등과 함께 세상의 번민을 잊을 수 있을 터이다.

현실의 잡답함과 비속을 벗어나 은기리에 이르면 생애 처음 만나는 풍광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예민한 관찰력과 감수성은 은기리의 네 계절 모두 골고루 펼쳐진다. 은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과 하루 스물 네 시간 예민하게 서정의 물꼬를 트고 있다. 말하자면 서정의 힘, 바라고 염원하던 이상적인 공간으로서의 은기리는 이렇듯 현실과 상상의 간극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인연의 현장, 관계망의 전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보이는 모든 것을 따낼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미 내 몫이 아니다
진중한 산수유 꽃빛의 꾀꼬리 한 쌍이 그림처럼
배롱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난 아침 숲에서

상처입지 않고 단 맛을 즐길 수 있는
산딸기 몇 개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본다.

-학명란, ‘은기리·6’ 부분

화려하고 풍요로운 은기리의 자연에서 정작 시인이 마주한 것은 소박한 산딸기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은기리에서 다만 내면의 충만, 함께 나누고 싶은 자연의 축복을 만끽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미 내 몫이 아니라는 절제와 비움의 미덕을 깨우쳤던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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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힘 2016-08-17 14:27:37
이런 좋은 공간이 있었네요.
좋은 작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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