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하의 작은옹달샘] 오랜만에 소설 하나 발표했습니다!
[지요하의 작은옹달샘] 오랜만에 소설 하나 발표했습니다!
‘고백 에세이’를 쓰는 이유
  • 지요하
  • 승인 2016.07.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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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소설가

[굿모닝충청 지요하 소설가] 참으로 오랜만에 소설 한 편을 발표했습니다. 492매에 이르는 중편소설입니다. 지면에 전체가 실린 것은 아니고, 절반이 활자화되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올 가을에 활자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직 온전히 발표를 한 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제목이 「바다 속 그리운 아빠」로 되어 있는 소설입니다.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화처럼 쓴 소설이이기도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활자화된 내 소설을 보니 코끝이 아릿해지는 느낌이 왔습니다. 소설을 발표한 때가 언제인가,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 스스로 정리해놓고 있는 ‘작품연보’를 찾아보았습니다.

2011년 <한국소설> 11월호에 중편소설 「우리 마음의 철책선」을 발표한 기록이 있군요. <한국소설> 12월호에서 정두영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았다는 기록도…. 이 소설은 그해 ‘한국소설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 마지막까지 수상작으로 거론이 되었다는 말을 김지연 선생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2년에는 <소설충청> 제20호에 「4대강 파괴공사 굴삭기 기사의 고백」을 재발표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건 신작 발표가 아니어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2011년 이후 무려 5년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못한 셈입니다. 내게 소설을 발표할 지면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아예 소설 집필을 하지 못하는 채로 5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버린 것입니다.

아참, 지난 연초에 써서 곧 발표될 소설이 하나 있군요. 아직 발표되지 않아, ‘작품연보’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서 깜빡 잊었습니다. 그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이 글의 후반부에 하겠습니다.

최근 발표 소설에 관한 이야기

충남 보령에서 발간되는 반 연간 종합문예지 <작가와 문학> 제9호(2016년 상반기호에 중편 소년소설 <바다 속 그리운 아빠>를 분재로 발표했다.

실로 5년 만에 절반이 활자화되어 나온 내 소설 「바다 속 그리운 아빠」는 신작이 아닙니다. 지면에 처음 오른 작품이기는 하지만 새로 지은 소설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원고 말미에는 ‘1995년 3월 25일 오후 4시에 마치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21년 전에 지은 소설인 거지요.

나는 이 소설을 내게 소설 청탁을 한 지면에 주면서 ‘작가의 말’을 함께 보냈습니다. 소설 앞머리에 배치된 그 ‘군소리’를 우선 여기에 소개해 보겠습니다.

지난해 말 <작가와 문학>으로부터 소설 청탁을 받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연초에 어렵사리 80매 단편을 하나 지었는데, 40만원 고료를 제시하는 지면에다 선뜻 주고 말았다. 새로 또 한 편을 지으려고 작심했으나,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세월만 바람같이 지나갔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어 끙끙거리던 중 20여 년 전(1995년 3월)에 지은 이 소설이 불현듯 생각났다. 내 컴퓨터 파일더미 속에서 이 소설을 찾아내어 실로 20여 년 만에 읽어보았다. 20여 년 전에 지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설이라, 전개되는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가운데 읽다보니 중간 중간 눈물이 났다. 두세 번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읽었다.

이 소설을 지었을 당시 천주교의 한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을 밝혀 잔뜩 기대를 했다. 그런데 결정 단계에서 보류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안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저어된다는 것….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의 편집 라인에서 그런 시각을 앞세운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어처구니없었다. 죽음 때문에 종교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어린이들이라고 죽음과 전혀 관계없이 살 수가 있는가.

섭섭했지만 군소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거의 잊고 살았다. 그 사이에 20여 년 세월이 바람같이 흘렀고, <작가와 문학>의 청탁 때문에 비로소 이 소설을 찾아 읽게 되었다. 500매 가까운 이 소설을 <작가와 문학>이 통째로 실을지, 나누어 실을지는 묻지 않고 일임하기로 했다. 다만 고마울 뿐이다. <작가와 문학>의 청탁 덕분에 내가 20여 년 만에(또는 내 명이 다하기 전에) 이 소설을 찾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작가와 문학>은 충남 보령에서 발간되는 반년간지입니다. 봄․여름과 가을․겨울로 나누어 일 년에 두 번 발간되는 문학전문지인데, 올해 상반기에 제9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책은 제법 빵빵합니다. 내용이 알차고 짜임새도 좋은 것 같습니다. 종합문예지라 백화점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묵직함이 실팍해서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책을 만들려면 비용도 많이 들 텐데,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5월 21일(토) 오후 보령시 웅천읍 무창포 해변에서 열린 ‘보령문학제 -<작가와 문학> 제9호 출판기념회’에 아내와 함께 참석해서 고료 대신 주는 홍삼 정액 한 병과 책 몇 권을 받아왔습니다. 고료 대신 홍삼 정액을 받기는 내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박용서 편집주간과 통화를 할 때는 내 소설을 나누어 실으면 소설의 맥이 끊어지는 느낌이 있겠기에 원고 전체를 싣기로 했다는 말을 들어서 참 고맙게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보니 내 소설은 절반이 실렸더군요. 실망과 섭섭함이 무거웠습니다. 김나인 발행인에게서 “소설에 대한 ‘욕심’이 발동해서 절반을 다음 호로 넘겼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내 소설을 읽어본 아내는 오자가 무려 다섯 개나 된다며 혀를 찼습니다. 자기에게 원고를 먼저 보여주지 않고 보낸 탓이라며 내게 타박을 했습니다. 오자들을 확인하자니 편집자가 교정을 본 건지 안 본 건지 적이 화가 났습니다. <작가와 문학>의 한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책의 표지에는 여러 작가들의 이름과 글 제목들이 크고 작은 활자로 노출되어 있는데, 내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것도 아내 눈에는 거슬리는 것 같았습니다.

60대 중진급 작가의 무려 500매나 되는 소설을 받아 실으면서 표지에도 노출하지 않고 전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으니 예의도 없는 것 같다는 말이 아내 입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내가 생면부지의 <작가와 문학>에 500매나 되는 소설을 준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소설을 지었던 1995년 가을이던가, 천주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서울의 한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던 일을 상기했습니다. 소설을 단행본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말이 와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속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 최종 결정 단계에서 취소되었다는 이야기…. 그 뒤로 나는 이 소설을 발표하려는 의지를 전혀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도 투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500매나 되는 소설을 실어줄 지면을 얻는다는 건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어디에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드는 지면들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들거나 관여하는 지면은 3개(<소설충청>, <흙빛문학>, <태안문학>)나 되었지만, 500매나 되는 소설을 한꺼번에 실을 수는 없었습니다. 연간지나 반년간지에 소설을 나누어 실을 수도 없고….

나는 곧 이 소설을 잊었습니다. 잊고 사는 가운데 20여 년이 바람같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작가와 문학> 청탁 덕분에 실로 20여 년 만에 이 소설을 내 기억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에도 500매 소설 원고를 받아줄 유명 지면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지면이든 내가 원고를 주기만 하면 감지덕지할 정도의 비중 있는 문인인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일방적으로 원고를 보내놓고 발표를 조를만한 나이도 아닙니다. 구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죽는 날까지 소설 원고를 ‘재고’로 남겨두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작가가 생전에 발표를 하지 못하고 ‘유고’를 남기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겠지만, 비중 있는 문인이 아니라면 ‘유고’는 그대로 자식들이나 후손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한 유고를 남기지 않는 것도 현명한 일일 것 같습니다.

나는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몸입니다. 위태롭게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즘에는 내가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올해 연세 93세이신 노모를 앞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내가 노모를 앞지르는 불효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곤 하는데, 그런 불효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노모를 잘 보내드리고, 두 아이 중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한 녀석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내가 건강치 못한 몸이어서 언제 생을 마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떤 지면이건 지면을 가리지 말고 ‘재고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명확해지더군요.

그래서 나는 <작가와 문학>에 500매 소설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작가와 문학>이 고료가 없는 지면임을 알았지만, 그것은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도 고료 없는 지면을 3개나 만들어온 처지임으로, 고료 없다는 이유로 지면을 홀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지상정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도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작가와 문학>의 편집 태도에 섭섭함을 표하는 아내의 태도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그런 태도는 나로 하여금 오늘 이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울 뿐입니다.

최근 집필 소설에 관한 이야기

충남 태안에서 발간되는 <태안문학> 제36집(2016년 상반기호) 지면에 고백 에세이 <오랜만에 소설 하나 발표했습니다>를 올렸다.

지난 연초에 80매 단편소설을 지었습니다. 「불변의 굴레」라는 소설입니다. 그 소설은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한국문학인> 여름 호에 발표됩니다. 아마 이 글이 실리는 <태안문학> 제36집이 발간될 때 <한국문학인> 여름 호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한국문학인>의 원래 이름은 <계절문학>이었습니다. 계간지이기 때문에 <계절문학>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한국문학인>으로 제호를 바꾸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소설 청탁을 받았을 때는 <계절문학>이었습니다. 청탁을 받고도 소설을 빨리 쓰지 못하고 무려 2년이나 질질 끌었습니다. 80매 소설을 무려 2년이나 걸려 쓰는 사이 <계절문학>의 제호가 <한국문학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청년 시절 100매 소설을 하룻밤에 쓴 적도 있습니다. 1985년 월간 <마당> 6월호에 발표한 단편「그날의 패배」는 정확히 100매인데, 육필 원고를 하룻밤에 써버려서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내가 오늘 무려 2년이나 걸려 80매 소설을 지었습니다. 「불변의 굴레」가 안고 있는 어떤 ‘굴레’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상한 굴레가 자꾸만 벌불 지듯 작용해서 진전을 방해한 탓이었을까? 아무튼 단편소설 한 편을 2년이나 걸려서 지었다는 것은 내 평생 처음이고, 다시는 없을 일입니다.

아무튼 소설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굴레’는 개인만의 굴레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굴레이고 시대적 굴레이기도 할 터인데, 그 굴레의 극복은 내 문학의 영원한 명제일 것도 같습니다.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을 터인데, 그 소설을 실어준 <한국문학인> 편집진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큽니다.

위기의식의 만성화 속에서

한국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 <한국문학인> 2016년 여름호에 단편소설 <불변의 굴레>를 발표했다.

그저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소설 집필에만 몰두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여전히 소설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설 집필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 세월은 또 바람같이 흘러서 어언 7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체력이 달리는 것을 체감하는 것 같습니다. 또 몸이 건강치 못하다 보니 절망감이 앞을 막아서는 느낌입니다.

늙고 건강치 못한 몸으로도, 요즘도 거의 매주 월요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곤 합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이 봉헌하는 ‘신유신독재 타파’를 위한 시국기도회에 참례하는 것이 요즘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충남 태안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는 일은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광화문에 갈 때는 활기를 느낍니다.

아내를 직장에 내보내며 연세 아흔이 넘으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일,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딸아이와 사회 초년생이 된 아들 녀석 쪽으로 신경 쓰는 일, 시절이 어수선하고 난분분하여 이리저리 시간 쓰고 몸 쓰는 일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쪽으로도 얼마간 바쁜 편입니다. 3년째 끌고 있는 태안성당 50년사 편찬 사업도 아직 끝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설 작업에 전력투구하지 못하다 보니 자연 소설 아닌 글을 쓰는 일에 매달리게 됩니다. 고정 지면들에 현재 매주 한 번 꼴로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쓴 글이 천 개가 넘었다고 지난해 상도 받았습니다. 좋은 글을 썼다고 상을 받은 게 아니라 글을 많이 썼다고 상을 받았으니 쑥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바둑기사가 바둑은 두지 않고 오목만 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 말을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는 “오목이라도 열심히 두라”고 하더군요. “오목마저 두지 않으면 죽은 목숨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돌이켜보면 ‘작가로서의 위기의식’을 오래 전에 체감했지 싶습니다. 오래 전에 위기의식을 체감했기 때문에 그것이 만성화되어 이제는 절박감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위기위식의 만성화를 느낀다는 것은, 내게 아직은 ‘자각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모로는 불꽃처럼 행동하며 살고 있는데, 그 불꽃을 작품 쪽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지은 중편소설 「바다 속 그리운 아빠」를 찾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재고 처리’ 쪽으로도 계속 의지를 발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연초에 단편소설 「불변의 굴레」를 써서 <한국문학인>에게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신작소설 작업에도 최대한 신경을 써서 모종의 ‘굴레’를 극복하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고백에세이’,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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