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조선시대 최고의 도망자 황진기, 가야산에 숨어든다
[시민기자의 눈] 조선시대 최고의 도망자 황진기, 가야산에 숨어든다
  • 이기웅
  • 승인 2016.08.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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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가야산의 100여 개가 넘는 암자 터들은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사명이나 연혁 내용도 전해오지 않는다.

강당골 깊은 골짜기에 있는 백암사의 창건과 폐사에 관한 구전은 옛 가야산 99개소의 암자가 있었는데 100개째 암자인 백암사를 건립한 후 가야산의 모든 암자가 불타 없어졌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 때 가야산은 3000 명의 스님이 가득했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블랙홀, 그곳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렇게 끝나버린 걸까?

필자는 가야산의 폐사지에 대해 1753년 이전 왜 절집이 사라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 수년간에 걸쳐 현장 답사를 시작했다. 가야산에 가득했던 절집들의 폐사를 역모에 가담하고 가야산으로 은둔한 황진기의 도피에서 그 이유를 찾아본다.

가야산의 황량한 폐사지는 한 때는 향화를 피우며 문화의 중심으로 민초들이 모여드는 그 시대의 중심이자 역사의 현장이다.

절집은 수행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기술을 전승하고, 지역을 수비하고, 준 공공기관으로서 복지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 각종 의식과 절기별 축제를 주관하는 문화공간이며, 때로는 권력 간의 다툼에 개입할 만큼의 무력도 확보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이다.

백제시대의 가람인 가야사는 9세기 법인국사를 모신 사찰이 됐고, 수덕사를 말사로 두며 지역 내의 중요 사찰의 지위를 유지 한다.

1177년 망이·망소이의 세력이 가야사를 점령, 스님 100여 명을 살해하며 개경 정부를 압박하는 등 정치의 중심에 있었으며 나옹선사(1320∼1376)에 의해 가야사 탑이 만들어지며 사역과 위세가 최고조에 이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수덕사를 말사로 두고 영향력을 유지하지만 억불과 폐불로 서서히 폐사의 기운이 감돌던 가야사는 1733년께부터 작은 암자 몇 개만이 남아 가야사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허망하게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1846년 흥선대원군은 남아 있던 남전과 보웅전을 불태우자 가야산의 절집은 사라지며 완전히 폐사되게 된다.

이후 조선 후기 불교계는 격심한 변동을 겪고 있었다.

승려들의 사회적 처지와 지위는 하락했으며 국가에 의한 사역이나 물품 징수가 빈번했다.
그러나 내포 지역에서는 개심사 등 불사가 이루어지고 필요해 사찰 자체의 부담, 세속인 도움, 다른 승려의 지원으로 재원을 충원한다.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세워진 보덕사의 경우 가야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에 자신이 부 남연군의 묘를 쓰고 뒤에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절을 세웠다.

실세·왕실이 배경이 되었기에 경제기반도 넉넉하였고 서울의 최고 기술자들이 동원되며 사세도 융성했다고 보인다.

현재 가야산 내암 중 유일한 사찰은 관음전과 보덕사로, 이는 왕실의 원찰이며 1865년 무렵에 조성돼 지장탱화와 산신탱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가야사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초반까지 이의숙과 송인 등 문인들이 남긴 글에 거대한 탑과 77개의 운제가 있어 절집이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억불과 폐불로 서서히 폐사의 기운이 감돌던 가야사는 1753년대 예헌 이철환의 글을 통해 1733년 이전에는 가야사가 폐사가 됐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철환은 가야사는 사라지고 주변에 큰 절 가야사로 모칭되는 묘암사 외 몇 개의 절들이 남아 있다고 기록하며 오층 석탑도 전화로 피해를 입어 가난한 스님들이 대충 회칠해서 수리했다고 기록한다.

또 주변에 있던 남전과 인암 등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탁발승 몇 명이 남이 있다고 기록한다.

조선시대 성종 이후에 많은 절집들이 폐사의 위기에 처하고 가야산의 절집들역시 1753년 이전에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본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도망자 황진기가 가야산에서의 25년 간 도주와 이에 따른 수배 기간에 가야산 절집들이 폐사되는 등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후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체제에 도전한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패하며 공모만 한 자도 조선을 등지고 산속으로 숨어들고 도망자가 돼 중국으로 몰래 넘어가거나 망명하는 자들 이 많았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고 조선시대 최고의 도망자 된 황진기는 1728년 영조 4년 역모에 실패하자 1733년 가야산에 도피하게 된다.

가야산의 백암사로 급하게 피신하게 되며 이 시기에 많은 절이 사라지게 되는 중심에 황진기의 가야산 도피와 연관이 깊은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황진기는 도피는 사찰에 닥친 큰 환란으로 조정의 추적과 검거 과정에서 가야사는 철저하게 파괘 되고 폐사하게 되며 사역의 중심이 묘암사와 주변에 있던 남전의 작은 암자 등으로 옮기게 된다.

황진기는 누구인가?

선전관에서 역모에 가담하고 역적으로 변한 전설적 인물로 백암사로 도피하고 이후 청나라로 망명했다고 전해진다.
역적임에도 지략, 검술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백암사로 도피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많은 의혹을 남기지만 결국 그의 행적을 찾지 못한다.
비변사등록,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서 역모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를 끊임없이 언급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진기의 도피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겨져 있는데, 영조에서 순조 때까지 배후로 지목 수배령을 내리며 조정과 사대부들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가야산 관련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조9년 1733년5월21일
“황진기가 금년 4월에 황칠곡의 집으로부터 신의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는데,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으며 이내 가야산으로 갔습니다. 보리밥과 무김치를 먹였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고기를 먹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2경(更)에 왔다가 4경에 돌아가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포 가야산의 백암사(白巖寺)로 향한다.’고 하였으며,금년 4월 21일 밤 2,3경(更)에 황진기가 충청도로부터 큰 나루를 건너 당진을 경유하여 왔다면서 삿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신의 집에 왔는데, 황진기가 덕산의 가야산 백암사에 살고 있는지라 장차 산골짜기를 거쳐 들어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조정에서는 청나라로 망명했다고 믿고 역모에 관련된 죄인을 압록강 부근으로 유배를 보내지 않는다.

황진기와 내통하여 다시 역모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웠던 것이다.
추격은 오리무중에 빠지자 청나라 망명했다고 추정하고 황진기를 압송하기 위해 청나라로 관군을 보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한다.

평안도에서 중이 됐다는 등의 소문만 무성했고, 망명한 지 20년이 넘도록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 지 24년이 돼가자 황진기를 체포를 포기하고 대신 후환을 우려해 이인좌의 난 직후부터 옥에 갇혀 있었던 아들을 황영을 1752년 전격 처형했다.

조선왕실을 100여 년간 두렵게 했던 황진기가 1733년 백암사에 운둔하며 대부분 이 시기에 폐사됐음을 알 수 있다.

가야산 절들은 1257년 몽고전란과 병자년과 임진왜란과 해안에 접해 있어 전란으로 소실됐다가 다시 세워졌다.

가야사를 비롯한 많은 절집들이 일시에 사라진 배경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황진기의 가야산 도피와 60여년간의 수배령, 조정의 검거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한 때 역사와 문화의 중심으로 법인국사와 나옹선사가 중창하며, 현욱, 수철, 편운 같은 큰 인물이 배출되는 백제시대의 천년 고찰 가야사는 썩어빠진 조선의 조정에 분노한 황진기가 가야산에 찾아들어 은둔과 도피에 연루되며 폐사의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이다.

가야사의 수많은 절집 흥망사와 비운의 도망자 황진기 이야기가 문화의 다양성과 지역문화 콘텐츠 확보를 위해 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며 관광산업에 활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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