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받아주는 바닥, 나를 일으켜 세우는 바닥
날마다 한치씩 가라앉는 때
주변의 모두가 의자째 나를 타고 앉으려고 한다고
나 외의 모든 사람에겐
웃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될 때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눈길 스치는 곳곳에서
없는 무서운 얼굴들이 얼핏얼핏 보일 때
발바닥 우묵한 곳의 신경이
하루 종일 하이힐 굽에 버티느라 늘어나고
가방 속의 책이 점점 늘어나
소용없는 내 잡식성의 지식의 무게로
등을 굽게 할 때
나는 내 방에 돌아와
바닥에 몸을 던지네
모든 짐을 풀고
모든 옷의 단추와 걸쇠들을 끄르고
한쪽 볼부터 발끝까지
캄캄한 속에서 천천히
바닥에 들러붙네
몸의 둥근 선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온몸을 써서 나는 바닥을 잡네
바닥에 매달리네
땅이 나를 받아 주네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녀가 나를 지그시 잡아주네.
- 양애경,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방 밖과 방 안,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공간. 방 밖이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세계, 경쟁과 배반의 각축장을 상징한다면 방 안은 나만의 안식과 자유로움을 허락하는 현장, 긴장해소와 위로가 가능한 영역으로 비쳐진다. 날마다 한 치씩 한 치씩 가라앉는다고 느끼면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의자째 나를 타고 앉으려고 한다고 생각된다면 지나친 신경과민, 피해의식 때문인가. 그리고 나 외의 모든 사람들에겐 웃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느껴지는 것도 과민함 탓일까.
그렇지만 방 밖에서 얻은 고단함과 피로, 떨쳐버리고 싶은 누항의 여진이 방 안에서도 그리 순조롭게 해소되지 못함을 우리는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늘 행복에 겨워 보이는 사람들, ‘웃을 이유가 있어 보이는’ 이들도 나름대로 슬픔과 고민, 번민과 갈등이 엉켜있을진대 그래서 시인은 “몸의 둥근 선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온몸을 써서 나는 바닥을 잡네/ 바닥에 매달리네”라며 바닥을 향해 접근한다. 개인신체에 따라 편차가 크겠지만 온 몸의 둥근 선을 최대한 바닥에 밀착하려는 시도, 조금의 틈이라도 허용치 않고 바닥에 내 몸을 온전히 붙이려는 애잔한 노력이 매일 밤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임계점, 일상의 고단함과 고통이 이끌어 내리는 최저극점 그리고 나의 기력과 정신이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지점인 바닥에서 교류와 소통 그리고 친화를 통해 시인은, 우리는 비로소 소생의 기미를 발견한다. 자신을 다시 추스르며 내일 아침 새로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바닥은 그래서 나의 위안자, 격려자, 동지, 나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말없이 받아주는 내밀한 소통경로가 될 수 있다.
지금부터 2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작품이 이즈음 새로운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이유도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여러 세태가 이 시를 통하여 데자뷔(기시감)를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바닥으로 이끄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데 있지 않을까. 바닥에서 얻는 힘, 바닥이 베풀어주는 넉넉한 포용력도 그에 비례하여 커지고 넓어지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