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소리와 슬픈 웃음, 그 뒤 삼십 년
그 애의 목소리는 아직 앳되다
풍금 소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애네 아버지가 지게를 짊어지고 나서면 또래 친구들이 산토끼를 부르며 따라다니곤 했는데, 마침 한다리 짧은 걸음걸이에 두 박자의 동요가 딱 맞아떨어졌던 것
들은 체 만 체 그 애 아버지는 작대기 한번 휘두르는 법 없이 사람 좋은 웃음만 웃으며 가던 길 가고
미루나무 뒤에 숨어서 애꿎은 나무 등허리만 박박 문지르던 그 애
먼 길 돌아온 이는 때로
거짓을 조금 섞어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정직한 그 애는 무얼 물어도 그냥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마치 아버지처럼
그래야 사는 거다, 살 수 있는 거다
말없는 말을 하듯
삼십 년 만에 만난 그 애
회색 점퍼 위로 여전히 누긋한 남루가 기어 다니는데
다가가 그 애의 웃음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나는
그 애 낮은 어깨에서 슬픔 하나 떼어
주머니 속에 몰래 구겨 넣었다
- 이미숙, ‘웃음의 뒷모습’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시인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은 흥미롭다. 나름 다르겠지만 짧지 않은 세월 공들여 써온 작품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동안의 설레임과 불안, 뿌듯함과 자부심 같은 복합적이고 예민한 울림을 거기서 듣는다. 그런 가운데 첫 시집에서는 다소 산만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도 의욕에 충만한 시인의 속삭임과 외침, 메시지가 울려 나온다.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에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맥박이 뛰논다. 그래서 처녀시집을 읽는 일은 지금과 같은 시의 홍수, 시집의 파도 속에서도 여전히 괸심을 끈다.
이미숙 시인의 첫 시집 ‘피아니스트와 게와 나’에 수록된 위 인용 작품은 이런 여러 특질을 온전히 담고 있다. 한 여인이 겪은 삶의 굴곡을 아우르는 서사가 영상이 펼쳐지듯 흐른다. 풍금소리가 여기서 배경음으로 깔리는데 초등학교 교실에서 울려 퍼지는 풍금 소리는 그 자체로 여러 느낌을 포괄하면서 각자의 감성에 크고 작은 무늬를 새겨주고 있다. 나지막하면서도 길게 여운을 남기는 풍금소리를 배경으로 이 시에서는 짧지만 긴 드라마가 시작된다. 다리를 저는 친구의 아버지를 놀려대는 철없는 아이들의 행태에 그 친구는 미루나무 뒤에 숨어 애꿎은 나무 등허리만 박박 문지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단순한 동작, 안타까움에 겨워 반복되는 이 행동이 후일 그 친구의 삶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이야기는 지금으로 돌아온다. 시간의 흐름과 삶의 곡절 속에서도 그 친구는 여전히 그저 웃기만 한다. 행색이 남루한 것을 보니 그간의 풍파와 고단함이 짐작된다. 회색점퍼를 입었다. 나이가 꽤 든 여인의 차림이 회색점퍼라는 사실은 여러 함의를 갖는다. 옷가지로 삶의 이력과 현실을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어린 시절의 궁핍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 친구의 사람 좋은 웃음 속에 스며있는 슬픔과 절망을 알아챈 시인은 “그 애 낮은 어깨에서 슬픔 하나 떼어 주머니 속에 몰래 구겨 넣었다”. 그런다고 그 친구가 지닌 슬픔과 궁핍이 사라지거나 덜어질까마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의 복받침,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정서의 기복에 우리는 동감한다.
그다지 길지 않은 이 시를 읽으며 흡사 영화 한편을 본 듯 긴 서사를 체험한다. 첫 시집에 수록된 여러 시편에서 항용 내비치는 열정과 의욕의 용솟음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전개되는 유년의 흔적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성에서 우리는 시인과 유사한 또는 동일한 체험과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