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잊혀진 남연군 제각 명덕사(明德祠) 항공사진 발굴
[시민기자의 눈] 잊혀진 남연군 제각 명덕사(明德祠) 항공사진 발굴
추가 발굴 통해 우리 역사로 기억돼야 ①
  • 이기웅
  • 승인 2016.09.0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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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본지(2014년)와 고종 실록의 고증을 통해 남연군 제각의 이름이 명덕사로 밝혀졌으나 관련 사진 등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옛날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항공사진을 찾았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묘를 연천에서 상가리로 면례하며 별반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상가리는 바로 백제시대의 사찰인 가야사가 있던 곳으로 1730년께 사라진 가야사에 속했던 남전 묘암사 보웅전 등 작은 사찰이 있던 곳이다.

그는 2대 천자 지지[二代天子之地]의 땅 가야사 터에 아버지의 묘를 쓰는 일에 운명을 걸며 절 집을 붙태우고 드디어 부친을 모시게 된다.

당시 가야산 일대는 판서 윤봉구의 토지로 그 손자 윤철보가 그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야산을 방문하면 윤봉구의 사랑채에서 기거하며 제각을 세우고 묘 주변을 단장하게 된다.

그 제각은 명덕사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왕권을 주장하며 중국식인 정(丁)자각이 아닌 일(一)자각의 제각을 세우게 된다.

당대 최고의 석공과 목수들을 동원해 왕궁의 건축물과 버금가게 세웠지만 영원할 것 같던 제각은 왕권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쇄락, 1954년 혼란기에 헐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

왕조실록 속의 명덕사 (1872년 10월 7일)
왕조실록에 대원군의 측근이었던 우의정 홍순목(1816-1884)이 상가리를(가동)방문해 왕에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이 명을 받들고 경기전의 일을 마친 후에 이어 덕산으로 가서 남연군의 묘소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고, 명덕사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습니다. 신이 평소 풍수에 어두우니 어찌 그 여하를 알겠습니까. 다만 하늘이 만들어 주고 땅이 설치해 준 지형으로 지세가 뛰어나고 매우 웅장하고 수려합니다”

또 제각 주변에 살던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더 전해들을 수 있었다. 건물 안쪽에 남연군의 영정과 근사한 현판도 있었으면 잘 다듬어진 돌담장과 동쪽에 높은 홍살문 있었다고 한다.

1954년 남연군묘 명덕사

운양 김윤식 면양행견일기의 명덕사
운양 선생은 병조판서로서 1887년(고종24년) 명성왕후의 친러정책에 반대해 대원군의 재집권을 모의하다 미움을 사서 면천으로 유배됐다. 당시 그는 가야산 일대를 수 없이 여행하며 충청지역의 동학과 가야산 일대의 기록을 운양일기 속에 남긴다.

당시 제각은 조선왕실 최고의 기술과 시설로 건축됐다고 기록한다.
동원된 석공과 목수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로 1893년 남연군묘를 방문한 운양김윤식은 서울왕릉에 버금가는 제각과 제실을 있다고 기록한다.

1893년5월 초5~6일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의 유적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예부터 이 산은 왕기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에 성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들이 풍수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을 짓고 비를 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보다 덜하지 않다. 보덕사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주민들 기억속의 명덕사
이 같은 고증은 상가리가 고향인 87세 주민이 남연군 제각의 이름이 명덕사라고 아는 지에 대해서부터 나왔다. 그는 어렵게 기억을 되살려서 정확히 한자까지 기억하며 어린 시절의 놀이 마당이었던 제각과 그 주변의 웅장한 제실은 높다란 담장이 온전히 있고 동쪽으로 정문이 있었으며 커다란 현판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또 자신이 어렸을 때 까지 남연군의 영정과 명덕사라는 커다란 현판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제각 문화재적인 가치
우리나라 제각 발굴사례는 남연군 제각이 유일하다. 일제에 의해 일부의 왕릉이 훼손되기는 하나 발굴된 경우가 없고 국내에 제각에 대한 특별한 연구도 부족하다.

일부 연구된 사례는 조선왕조 건축사적인 연구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 남연군묘 제각터의 발굴은 조선왕조 제각 연구에 매우 소중한 자료이며 향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한제국 이전 제각은 건축의 평면이 ‘丁(정)’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릉 입구인 홍살문과 봉분 사이에 위치한다. 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핵심 구조로 꼽힌다.

1897년 고종은 자주독립을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중국과 대등한 왕권을 주장하며 스스로 광무황제칭하며 조선황실의 제각도 이 시기부터 ‘一’자각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남연군묘 제각 명덕사는 정자각 대신 ‘一’자 의 제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제각 터 추가의 발굴 필요성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블랙홀이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제각은  60여전 전에 사라지고 옛 사진에서 흔적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곳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렇게 끝나버린 걸까?
기억 속에 희미하던 제각은 1954년 항공사진을 통해 발굴됐다.

옛 지형이 사진에 잘 드러나 있는 사진이며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학술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번에 발굴한 1954년 항공사진을 살펴보면 60년대 사라진 제각의 구조와 담장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제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지역의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며 옛 시간을 더듬는 인간의 이야기 인 것이다.

지역의 변화를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추억하는 차원을 넘어 역사로 끌어안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추가의 발굴과 조선왕실 제각 연구와 복원을 위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명덕사를 기억하는 어른들이 하나둘 떠나고 돌아가시고 유적은 잊혀지며 돌만 쓸쓸히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천 마디의 말보다 역사현장의 사진 한 장이 더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득 마주치는 기와 돌조각 하나도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으며 우리에게는 귀중한 유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번 가야산의  옛 사진은 일제강점기시대의 귀한 자료와 1950년대 남연군묘 주변과 제각을 삶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 나온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음주에 ②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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