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희망은 두려움 속에서 건져내는 것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희망은 두려움 속에서 건져내는 것
  • 이규식
  • 승인 2016.09.1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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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고광률

희망은 두려움 속에서 건져내는 것

노인은 우리 가족 전부의 무관심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노인의 이 말을 수긍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내가 무얼 받았다는 말인가? 꽁치찌개와 인절미와 수제비를 말하는 것인가. 갑자기 기분이 상했고, 그 상한 기분을 고함이라도 내질러 풀어내고 싶었다. 차라리 노인의 말보다 무당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아들과 조카를 분별하지 못하는 귀신의 잘못을 내가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이게 어디 귀신을 상대로 잘잘못을 따질 일인가. 고모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내가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으며, 무슨 할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죄인임이 틀림없었다.
노인의 말은 옳았다. 이제 외롭고 억울한 영혼을 상대로 더 이상 버팅길 힘이 없었다. 이것은 영혼의 문제도 귀신의 문제도 아닌 나의 문제이고,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외면한다고,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용케 버팅겨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노인과 무당의 말 속에 내가 못골을 찾아 온 진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 때문에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와 그 동안 어찌어찌 걸어왔던 길마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갑식 씨의 이산가족상봉을 경축한다는 플래카드를 등지고, 그 이갑식 노인이 숙박을 하고 있다며 일러준 곳으로 향했다.

- 고광률, ‘형에게 가는 길’
‘조광조, 너 그럴 줄 알았지’ 229-301쪽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고광률 작가를 안 지 햇수로 30년이다. 1980년대 중반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단체인 ‘호서문학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문학청년이던 고광률이 나이 든 동인들 사이에 끼어 말없이 귀를 기울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말이 없으면서도 말이 많다. 말 없는 곳에 말을 두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도 말의 존재 방식을 닮았는데, 꾸미고 돌리지 않으면서 전해주는 메시지가 많다. 천상 이야기꾼이다.

‘‘사회 속의 개인’을 탐구하는 정통적인 리얼리즘 정신에 바탕을 두고’(문학평론가 김이구) 소설을 쓰는 그는, 역사적 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해 현실을 바로 알 수 있고, 올바른 미래가 열린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고원정은 ‘형에게 가는 길’을 이렇게 평했다. “‘형에게 가는 길’에서 작가는 외곽을 때리는 노련함을 한껏 보여준다. 고모의 이야기에서 고모부의 이야기로, 그 고모부의 월북한 형에게로 에둘러 풀어나가는 이야기 솜씨는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결말 부분에 가서야 우리는 비로소 분단이라는 익숙한 주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테크닉을 ‘정보량의 조절’이라고 부르고 싶다. (중략) 노련한 이야기꾼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기교를 구사한다. 그 기교에 이끌려서 독자들은 이상한 암시가 떠도는 여행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끝내는 분단이 남긴 아프고 누추한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형에게 가는 길’에서 고광률 작가는 과거의 문제가 현실의 문제이고, 현실의 문제가 곧 미래임을 말한다. 주인공 ‘나(임창식)’가 ‘이갑식(고모부)’을 잊은 채 ( 어쩌면 외면내지는 부정일 수도 있다) 수십 년을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결국 깨달은 것은, 개인이 역사를 떠나서, 사회를 떠나서는 현실을 제대로 살 수 없으며, 미래 또한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고광률은 소설을 통해, 빛만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둠도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어둠과 빛의 호환성, 이 역설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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