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이규식
  • 승인 2016.10.0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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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 40년간 닫힌 금단의 정원이 열렸다. 정지용, 김기림, 백석, 오장환, 이용악을 비롯한 숱한 문인들의 작품과 삶이 빛을 보면서 우리 현대문학사의 지평은 넓어졌다. 그 중 시인으로는 특히 정지용과 백석의 문학이 이 그룹을 이끌고 있는데 특히 백석의 경우 개성적인 작품은 물론 극적인 생애와 준수한 용모, 활발한 연구진척 등으로 대중성에서도 앞서 간다.

백석은 음식을 소재로 한 시작품을 많이 썼다. 일제 강점기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궁핍한 시대, 토속 식자재, 전통적 조리법과 음식 모양새와 정취를 맛깔난 언어로 구사하면서 식민시기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수호의지를 보여주었다.

지금처럼 이른바 먹방 쿡방이 과열되는 시기, 의미 없이 펼쳐지는 화려한 영상과 수다스러운 내레이션 속에 국민 감성을 단순한 식욕, 욕망의 세계로 몰아간다. 특정 음식 특정 식당 특정 요리사에 대한 맹목적인 경도에서 벗어나 음식 자체에 대한 조용한 찬가를 들어본다. 가난하지만 인정 있고 소박하게 살았던 우리 민족의 원형질을 이 시에서 확인한다. 생소한 평안도 방언과 특수한 조리과정 표현 그리고 백석 특유의 감각적 언어가 감칠맛 나게 어우러졌다.

비만의 주범이 지방이 아니라 탄수화물이라는 연구보고가 관심을 끄는 이즈음 탄수화물의 삼총사 밥, 빵, 면 가운데 하나인 국수의 장래가 위태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아울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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