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포기하는 즐거움, 정갈하고 투명한 자유를 얻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포기하는 즐거움, 정갈하고 투명한 자유를 얻다
  • 이규식
  • 승인 2016.11.26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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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는 즐거움, 정갈하고 투명한 자유를 얻다

(......) 그래서 그 고달픈 노정은 충분히 인생길의 메타포가 될 만했다. 길은 인생의 우여곡절처럼 산굽이를 돌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우리를 녹초로 만들어놓곤 했다. 그 길 위에는 랄리구라스가 만발한 늦봄이 있었고, 만년설의 겨울도 있었다. 우리는 사계절을 모두 겪으면서 계속 걸어갔다. 오직 걷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할딱할딱 하는 앞사람의 신발 뒤축을 보면서 걷노라면, 저절로 유행가의 한 대목이 떠오르곤 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소.

부동의 조용한 풍경 속에서 문득 세 아이가 내달린다. 풍경을 흔드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다. 그 아이들이 타작마당에 뛰어들어 장난 삼아 닭들을 쫓는다. 햇빛 속에 자란 닭들이라 털빛이 눈부시게 곱다. 그중 한 여자아이가 우리를 향해 레삼삐리리를 부른다. ‘내 마음은 흰 비단처럼 바람에 나부끼네.’ 우리도 그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러본다. 그래, 그랬지. 나의 저 먼 과거에서 한 떼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조잘거리고 노래 부르며 인생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지. 길 위에 쏟아지는 눈과 비, 폭염의 시련을 견디며 우리는 자라나 장년을 누리고 그러고는 차츰 늙어갔지. 인생길, 그 길을 한참 가다가 낙오자들이 하나둘씩 생겨났지. 일찍 세상을 뜬 그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술을 좋아했던 그들, 느닷없이 들이닥친 죽음, 암의 급습. 처음엔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들은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그러다가 마침내 포기했을 때 그들의 얼굴은 또 얼마나 편안했던가. 힘들어서 더 이상 못 가겠으니 너희들만 갔다. 와, 하고 웃으면서 길가에 주저앉아버렸지. 인생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뻔한데, 뭐 그렇게 힘들게 갈 것 있나, 하면서 그들은 씩 웃었지.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면서 나는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그래, 그들은 죽은 게 아니라, 지금도 길가 어디에서 지금도 쉬고 있을 거야. 어느 주막에서 아직도 술 마시고 있을 거야.
 마침내 우리는 만년설의 비경 속으로 들어갔다. 계곡의 맞은 편 깎아지른 절벽에 걸린 빙하 폭포, 그 흰 물줄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 뒤로 멀리 신비로운 설산 마차푸차레가 푸른 하늘에 흰 눈보라를 수평으로 날리면서 우뚝 서 있었다. 빙하 폭포도, 설산 정상의 눈보라도 바람에 날리는 거대한 흰 색 비단 폭, 레삼삐리리였다. 과연 비상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그러한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띄엄띄엄 웅크리고 있는, 독거미처럼 털북숭이의 험상궂은 식물들을 끝으로 초목의 자취가 사라진 만년설 속 해발 4,13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우리가 걸어온 길은 거기에서 끝나고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언젠가 찾아올 우리 몫의 죽음을 보았다. 생명한계선, 그 이상은 생명을 거부하는 혹한의 고지대였다. 순백의 눈, 눈보라, 눈사태만이 있는 곳, 죽음, 무한, 영원이 거기에 있었다. 인생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뻔한데, 뭐 그렇게 힘들게 갈 것 있나, 하고 그들은 씨익 웃었지.

- 현기영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부분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현기영 소설가는 이 책 ‘작가의 말’에서 노경에 접어들어 누릴 수 있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포기하는 즐거움을 꼽았다. 실천방안으로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으며 흔쾌하게 포기하며 욕망의 크기를 대폭 줄이도록 권면한다. 포기하는 대신 자유를 얻어 그 자유가 몸과 마음을 정갈하고 투명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얼굴과 몸에는 주름이 잡혔지만 심장만은 주름살이 생기지 않는 자유로운 삶, 작가가 멀리 안나푸르나로 트래킹을 떠났던 기억을 담은 이 글에서 욕망의 온갖 번잡한 소음과 공해들이 멀리 비껴난 정적과 편안함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그려냈다. 이즈음 사회혼란과 갈등에 연루되어 부질없는 허명과 허세의 끈을 부여잡고, 옛 권력의 아스라한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숱한 노령인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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