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삶의 순결성 파괴와 진실은폐 시도에 맞선 시인 조태일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삶의 순결성 파괴와 진실은폐 시도에 맞선 시인 조태일
  • 이규식
  • 승인 2016.12.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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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순결성 파괴와 진실은폐 시도에 맞선 시인 조태일

내 가슴 속의 어린 어둠 앞에서도
한번 꼿꼿이 서더니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그 어린 어둠을 한칼에 비집고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어디고 누구나 보이게 운다.
자유가 끝나는 저쪽에도 능히 보이게
목소리가 못 닿는 저쪽에도 능히 보이게
목소리가 못 닿는 저쪽에도 능히 들리게
한 번 번뜩이고 한 번 울고
번개다! 빨리 여러 번  번뜩이고
천둥이다! 크게 한 번 울고
낮과 밤을 동시에 동등하게 울리고
과거와 현재와 까마득한 미래까지를
단 한 번에 울리고 칼끝이 뛴다.
만나지 않은 내 가슴과 너희들의
벼랑을 건너뛰는 이 무적의 칼빛은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단 한 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메마른 땅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국가 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놓고
더욱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

 - 조태일, ‘식칼론 4’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서울 을지로 좁은 골목 창제인쇄소로 조태일 시인을 찾아 간 것은 1975년 어느 더운 날이었다. 창비시선으로 발행된 시집 ‘국토’를 들고 나타낸 생면부지 대학생에게 조태일 시인은 친절했다. 시집에 나온 사진만 봐서는 우락부락하고 억센 성품으로 예상했는데 듬직한 거구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며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시집에 큼지막한 글씨로 서명을 해주고 무슨 차를 대접받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활판인쇄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 창제인쇄소에서는 창작과 비평사 발행 서적을 많이 인쇄하고 있었다. 납으로 만든 갖가지 크기의 활자를 선별, 조판하여 잉크를 묻혀 찍어낸 교정지로 오, 탈자를 잡아내던 그 시절 방식 그대로 조태일 시인이 세상을 떠난지 17년만에 최근 조태일 시선집 ‘그래도 봄이 오는가’가 발간되었다.

1960년대 이후 부당한 권력과 불의한 시대에 맞서 도저한 역사의식과 민중의 저항의지를 펼쳐 보인 조태일 시인, 선명한 이미지, 독특한 풍자와 비유로 끈질긴 제도적 폭력과 우리 사회의 비겁한 순응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 숨쉰다.

삶의 순결성을 깨뜨리고 진실은 은페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시인이 외친 민중의 연대의식은 1970년대에서 2010년대를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식칼론’ 연작시의 표제 ‘식칼’은 혼란스러운 시대, 저항과 투쟁의 은유적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본질에 있어 자아를 각성하고 자극하는 자기확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1970년대 정치권력의 전횡에 대항하는 서늘하지만 낭만적인 목소리가 식칼이라는 흔치않은 이미지에 실려 증폭될 수 있었다.

나아가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공유하는 삶의 수단으로 조태일 시인은 ‘식칼론’ 연작시를 1970년대 제도적 폭력에 맞서 성취한 참여시의 성과로 자리매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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