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사라져버린 지폐의 사랑과 온기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사라져버린 지폐의 사랑과 온기
  • 이규식
  • 승인 2016.12.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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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지폐의 사랑과 온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식구들 몰래 내게만
이불 속에 칠백만원을 넣어두셨다 하셨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불 속에 꿰매두었다는 칠백만원이 생각났지
어머니는 돈을 늘 어딘가에 꿰매놓았지
대학 등록금도 속곳에 꿰매고
시골에서 올라왔지
수명이 다한 형광등 불빛이 깜박거리는 자취방에서
어머니는 꿰맨 속곳의 실을 풀면서
제대로 된 자식이 없다고 우셨지
어머니 기일에
이제 내가 이불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얘기를
식구들에게 하며 운다네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이불 속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내 사십 줄의 마지막에
장가 밑천으로 어머니가 숨겨놓은 내 칠백만원
시골집 장롱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불 속에서 슬프게 칙칙해져갈 만원짜리 칠백 장

- 박형준, ‘칠백만원’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 100명이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2015년 최고의 시’로 꼽힌 작품이다. ‘2016 오늘의 시’ (도서출판 작가)라는 책에는 이 시를 비롯하여 시 63편, 시조 20편 등 2015년 발표된 작품 가운데 주목할만한 시와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올해의 시’, ‘좋은 시’ 등의 이름아래 여러 출판사에서 비슷한 성격으로 책이 출간되지만 문학의 본질이 다양성에 있다면 좋은 시를 고르고 알리는 이런 노력이 많을수록 시를 일상과 좁히고 우리 현대시 저변을 튼튼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작품의 서사는 단순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장가밑천으로 만원 짜리 칠백장을 이불에 넣어 잘 꿰매두셨지만 시인은 그 돈을 찾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랑과 추억만을 절실하게 확인할 따름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당시 대학입학 등록금 12만 5천원을 종이에 꽁꽁 싸주며 잃어버리지 말고 은행에 잘 납부하라던 아버지 생각이 떠오른다. 온 라인 무통장 입금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모든 금융거래가 직접 창구를 통한 수기(手記)로 이루어지던 시절, 1000원짜리 지폐 뭉치를 들고 은행으로 향하던 나는 가벼운 긴장과 전의마저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만해도 가장 큰 고액권이었던 1000원 지폐 다발을 재빠르게 세고 난 은행원으로부터 도장을 쾅쾅 찍은 영수증을 받아들고 무사히 등록절차를 마쳤음을 공중전화로 아버지에게 보고하였다. 스무살, 철이 들지 않았지만 지폐 125장의 볼륨을 느끼며 무언가 찡했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박형준 시인의 어머니가 갈무리하신 7백만원이 주는 함의는 훨씬 깊고 넓다. 행적을 찾을 길 없는 그 돈의 온기는 오래도록 이불속에, 시인의 가슴에 새겨져서 삶에 온기를 전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징표로 남아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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