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걸출한 시인-정치가의 감성과 현실인식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걸출한 시인-정치가의 감성과 현실인식
  • 이규식
  • 승인 2016.12.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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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명 문학관

걸출한 시인-정치가의 감성과 현실인식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김동명, ‘파초’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에 전념하면서도 뛰어난 정치가를 겸했던 경우가 있었던가. 특히 19세기 유럽 격변기에 문학이념의 현실대입이라는 신념으로 적지않은 시인, 소설가들이 정치계에 투신하여 더러는 일정부분 성공하여 자신의 포부며 이상을 현실정치에 반영시키기도 하였고 많은 이들이 참담한 실패와 좌절로 만년의 삶을 궁핍속에서 보낸 사례가 적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상원의원을 역임했던 빅토르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공화국을 전복하여 제2제정을 수립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것에 반발하여 18년간의 자발적인 망명의 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낭만주의 시인 라마르틴은 바로 이 루이 나폴레옹에 맞서 1848년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어마어마한 표 차이로 패배하고 빚과 고독에 눌려 쓰라린 노후를 보냈다. 문학에서 이룩하거나 확인한 이상의 기치를 현실세계 특히 정치판에 도입하여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기는 그렇게 힘드는가 보다.

이 시를 쓴 김동명 (1900-1968) 시인 역시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어 평소 품은 정치적 포부를 채 펼쳐보기도 전에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불과 몇 달이라는 짧은 의정생활의 불운을 맛본 분이다. 정치가이기에 앞서 뛰어난 정치평론가, 대학강단에서 꼿꼿하고 기개있는 선비로 문학론과 현실인식을 설파하였고 시 창작에서도 ‘파초’, ‘내 마음은’, ‘수선화’ 등 가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기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이 기승을 부리자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체의 문필활동을 중단한 기개있는 애국지사이기도 했다.

‘파초’는 그 자체로 뛰어난 서정시이면서 과도하지 않은 이국취향과 수사학을 펼치는 가운데 나라 잃은 민족의 회한을 토로한 명작이다. 대학입시용으로 쓰이는 국어 참고서 대부분에서는 이 작품을 원형 그대로 감상, 음미하여 예술성에 접근하기는커녕 주제, 소재, 형식, 각 연을 해부식으로 분석하여 파헤치면서 “밑줄 쫙”을 강요하는 등 시의 맛과 멋을 찾기 어렵게 난도질 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교재와 교육으로 우리시를 접한 고등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시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불편한 선입견과 부정적인 거부감은 오늘 우리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한가지 원인이 될 수 있다.

1936년 ‘조광’지에 발표하고 2년 뒤 펴낸 시집의 표제시인 ‘파초’에서 암울한 식민통치하에서 울분과 회한을 토로하는 시인의 감성과 마주한다. 이육사, 심훈 시인의 웅혼하고 통절한 토로와는 외형상 달라보이지만 그 내부에 응축된 결기와 민족자존심은 서로 상통한다. 지금처럼 혼란한 사회, 문학과 정치가 진정한 가치와 권위를 함께 잃어가는 시대에 애국시인의 소중한 작품을 새삼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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