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민주주의,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힘
어느 날 창 밖으로 한 줌의 빛을 던졌니?
한 줌의 빛이 파라슈트처럼 地上을 향해 쏟아졌니?
가슴 속 파란 칼을 품었어도
한쪽에서 무너지는 견고한 쓰라림
氷瀑의 탄압을 견디다 견디다가
아! 소리치며 일어서는 것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신비로운 約束에 의해
일제히 궐기하는 意志 하나로, 너는 꽃이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가지 끝에서
기지개처럼 피어나는 꿈, 차별 없는 비약이여
하늘에 꽃, 들판에도 꽃, 꽃……
(……)
불을 지른다, 꽃은,
개나리 노란 꽃은 天地에 쏟아지는 햇살을 불 지르고
진달래 분홍꽃은 첫사랑 수줍은 가슴을 태우고
벚꽃, 목련꽃, 안개꽃들 창호지빛 하얀 窓을 밝힌다
파란 꽃은 파란 꿈꾸고 파란 춤추어라
빨간 꽃은 빨간 꿈꾸고 빨간 춤추어라
참는 자, 순종하는 꽃의 아름다운 보람은 무엇인가
꽃피는 4월, 民主主義, 슬기로와라!
- 송유하 (1944-1982), ‘꽃의 民主主義’ 부분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그간 잊혀졌던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송유하 시인. 고등학교 시절 학생기자로 활동했던 잡지 ‘학원’ 사무실에 대학생이 되어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편집실 한 켠에 크지 않은 체구에 과묵한 인상의 20대 청년기자가 막 등단한 대전 출신 송유하 시인이었다. 몇 차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었지만 송 시인이 오래지 않아 다른 잡지로 옮겨서 교류는 끊어졌다. 1983년 대전에 정착한 이후 바로 그 전 해 송유하 시인이 김포 들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유고시집‘꽃의 民主主義’가 출간되었고 이제 송유하 시인은 청년시인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꽃, 4월, 민주주의, 첫사랑, 칼, 탄압 같은 상반되는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개념이 섞여 격정적인 호흡으로 풀어간 이 작품은 지금의 안목으로 본다면 다소 과장되고 격앙에 싸인 노래로 읽힐 수 있지만 10년 남짓 짧았지만 굵었던 그의 문학관과 감정구조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1960∼70년대 암울했던 현실이 던지는 부정의 그림자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인은 불교사유를 원용하여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지적, 감성적 탐험에 나선 것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서 질서와 조화, 양보와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태생적 민주개념을 꿰뚫어 본 시인의 예지가 새삼 돋보인다. 꽃들은 고혹적인 자태와 향기, 풍성한 외양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공생정신과 순종의 미덕, 자신의 소임을 유심히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