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슬픔이 어떻게 웃음으로 번져 나오는가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슬픔이 어떻게 웃음으로 번져 나오는가
  • 이규식
  • 승인 2017.02.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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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어떻게 웃음으로 번져 나오는가

얼굴무늬 수막새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밥 먹으면서 풉풉 길 걸으며 낄낄
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
수업하다가 허허 차 타면서 헤헤
잠자다 깨어 웃고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죽여 웃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몸에 난 사만팔천 개의 구멍을 열고
비어져 나오는 웃음의 가래떡
찡그리면서 웃고 이죽거리며 웃는다
웃는 내가 바보 같아 웃고
웃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
이렇게 언제나 나는 가련한 놈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볼펜이 웃고
웃음의 인플루엔자에 전염된
꽃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애완견과 밤 고양이가 웃고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웃음의 장판무늬들
그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 이재무, ‘웃음의 배후’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배후’라는 용어는 ‘정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어떤 일이나 행동을 조종하는 사람’, ‘드러난 주장이나 사실이 아닌, 밑바탕에 있는 측면’ 그리고 ‘어떤 대상이나 집단의 뒤쪽’을 의미한다. 한국 현대사를 통하여 끊이지 않았던 어수선한 시국이나 현안과 맞물리면 ‘배후’의 뉘앙스는 이런 사전적인 범주를 훌쩍 이탈한다. 그래서 시인은 ‘배후’라는 어휘의 개념과 쓰임새를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2011년 간행된 이재무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경쾌한 유랑’에 수록된 이 작품은 그 몇해 전 시인이 경험한 깊은 슬픔과 충격, 허무감를 반어법과 열거, 짐짓 눙친 표현을 구사하면서 ‘웃음’이라는 구체적 행위와 ‘배후’라는 추상적 의미를 결합시켜 내면의 일단을 드러내 보인다. 이 시를 읽는 분들은 이내 이해하실 것이다. 시에 언급되는 갖가지 웃음의 상황이 결코 유쾌, 상쾌하며 통쾌한 웃음의 본질과는 먼 거리에 있음을. 자조랄까, 슬픔의 기운이 주체할 수 없이 배어나오는 그런 정서는 작품 마지막 행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라는 짧은 표현으로 정점을 찍는다. 눈에 보이는 웃음은 결국 슬픔의 가면, 형태를 달리한 비애의 표출이 되기도 한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웃음 바로 옆에서 번져가는 슬픔, 폐쇄, 중압감, 상처 같은 이질적인 삶의 요소를 시인은 어루만지고 있다.

볼펜이 웃고 애완견, 밤 고양이, 가로수, 도로, 육교, 지하철, 버스, 간판, 티브이, 컴퓨터,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 산 하늘이 모두 웃는다. 그 웃음을 한꺼풀만 벗겨내면 거대한 비탄와 슬픔의 파도가 와르륵 몰려나올 듯 하다. 언제나처럼 그냥 물색없이 웃으며 그 고통을 달래는 일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다보면 울음을 머금은 웃음의 더 큰 압력으로, 그 소리의 깊이와 파동의 넓이로 슬픔과 억압, 믿기 어려운 현실이 주는 고통, 좀처럼 털어지지 않는 궁핍한 일상의 풍진에서 훌쩍 벗어날 자정력(自淨力)이 생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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