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극장은 사라지고 추억은 영화처럼 남아있다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극장은 사라지고 추억은 영화처럼 남아있다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의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51)그 시절 대전의 극장가에선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7.03.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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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대전극장

[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지난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요즘 극장가에 걸린 영화도 아카데미에서 거론된 영화들이 여러 편 있다. 영화를 고르는 취향은 제각각 다르긴 하겠지만 영화제에서 수상 후보로 다뤄진 작품들은 아무래도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아카데미 영화제 소식이 식기도 전에 한 작가의 글이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에 들어왔다. 대전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지금은 타지에서 지내고 있는 송성영 작가가 어릴 적 영화구경을 다녔던 추억담을 보내 온 것이다.아마도 아카데미 영화제를 보다가 옛 시절이 떠오른 지도 모른다.
송 작가는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를 비롯해 “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 등의 산문집을 펴내는 등 입심좋은 문체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가 쓴 대전의 추억담을 읽어보는 것으로 잠시나마 옛날의 극장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극장구경
1969년, 미국의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토끼 한 마리가 방아를 찧고 있는 달나라에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해서 전 세계가 들끓었다. 시골 ‘국민학교’에서까지 그 장면을 단체 관람했으니 한국에서도 난리법석을 떨었던 모양이다. 그 무렵 나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지 않은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아폴로 11호 달나라 여행 관람기’는 아마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갔던 단체관람 영화였을 것이다. 어리버리한 촌놈인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총천연색 활극 영화를 보러 가는 줄만 알고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런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아폴로 11호’라는 우주 발사체가 달나라로 날아가고 닐 암스트롱이라는 미국 사람이 달나라에 도착해 두 발이 달 표면에 닿자마자 둥둥 떠오르는 기록영화였던 것이다.

지금은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내딛었는지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지만 어쨌든 당시 그 기록영화는 ‘국민학교’ 3학년 촌놈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대전에 있는 ‘국민학생’들이 다 모인 듯한 영화관은 숨이 막힐 정도로 미어 터졌다. 자리에 앉는 것은 고사하고 겨우 까치발을 들고 봐야 했다. 그 영화는 총천연색도 아니었다. 흐릿한 흑백이었다. 도시에 사는 작은 아버지 집에서 흑백 텔레비전 화면만 접하다가 나보다 열두 살이나 더 많은 큰 형님 손잡고 어쩌다 보게 된 총천연색의 영화에 충격을 받았던 무렵이었기에 실망에 실망이었다. 영화 소감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에이씨, 저게 뭐여…”였다.

‘아폴로 11호 우주 발사’에는 정의로운 총잡이나 주먹을 잘 쓰는 이도 없었다. 주인공이 처절하게 당하다가 나중에 악인을 물리치는 복수극도 없었다. 카운터 다운과 함께 꽁무니에서 불을 뿜는 로켓이 발사되는 아무런 갈등도 내용도 없는 한마디로 ‘재미대가리 없는 영화’였다. 그냥 달나라에 사람이 갔다는 것이 전부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달나라에는 정말로 토끼가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단 한 장면도 없었다.

그 재미없는 ‘아폴로 11호 우주 발사’를 단체 관람했던 영화관이 바로 ‘대전 청소년 회관’이었다. 청소년 회관은 “이 연사 외칩니다!”로 시작해, 그야말로 목청이 찢어지게 외쳐댔던 반공웅변 대회장이기도 했다. 말주변머리 없는 내게 있어서 청소년 회관은 그런 증오심 불러일으키는 웅변대회장과는 상관없었다. 가장 좋아했던 영화관이었다. 당시 대전에서 영화 관람료가 가장 싼 곳이었기 때문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 갔었기에 청소년회관에서 평일에도 영화를 상영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72년 신도극장
자유극장(1972)

대전청소년회관의 추억
본래 청소년회관 건물은 대전의 행정구역 명칭이 시로 바뀌기 전 부(府)였을 때 대전부(大田府) 청사가 들어서 있었다. 훗날 그 건물에 대전상공회의소, 대전시청소년회관이 입주해 있었고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70년대 중 후반 쯤에 ‘대전시청소년회관’은 사라졌다. 청소년 회관과 함께 들어서 있던 대전 상공회의소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다가 서구 둔산동으로 이전했고 지금은 삼성화재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아폴로 11호를 발사 했다는 그 다음 해, ‘국민학교’ 4학년에 불과한 나는 총천연색 영화에 푹 빠져 그야 말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홀로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호주머니에 얼마간의 용돈이 모아지면 영화관으로 직행했다. 영화관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촌놈, 용돈 사정이 빤하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청소년 회관’이었다. 당시 개봉관의 영화 관람료가 보통 50원이었다면 청소년 회관은 5원~10원 정도에 불과했다.

시골 촌놈이 청소년 회관에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은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순전히 깡 촌놈이었다. 대전광역시 중구 옥계동. 지금은 6차선 도로가 빵빵 뚫려 있는 완전 도시화가 되었지만 당시 우리 동네 주소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옥계리’. 흔히들 ‘재마루’라 불렀다. ‘리’ 단위를 초월한 ‘재마루’라는 동네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깡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텔레비전이 단 한 대 밖에 없었다. 영화 한 편 보려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했다. 그렇다고 쉽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버스는 고사하고 삼륜차 한 대 들어올 수 없었다. 교통수단이라곤 우마차가 전부였다. 영화관에 가려면 산까지 넘진 않았지만, 물을 건너야 했다. 장마 때마다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리곤 했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냇가를 건넜다 하여 영화관으로 곧장 직행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스 정류소는 거기서 몇 백 미터도 채 안 됐지만 어린 내게 있어서 그 길은 십리 길보다도 더 멀게만 느껴졌다. 냇가를 건너기 전에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관문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소풍 가는 날이나 생일날, 혹은 도시에 사는 친척들 오셨을 때나 집안 애경사 때 등 어른들에게 받는 용돈을 얼마나 인내심 있게 꼬불쳐 둘 수 있는가 였다. 그것이 영화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했다.

용돈 모으는 일은 그야말로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였다. 구멍가게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얼음 동동 띄워 흑설탕 팍팍 넣고 만든 '냉차'에서부터 '아이스께끼'에 '소프트크림', 설탕 가루에 파우다 넣고 부풀려 만든 온갖 동물 모양의 '띠기'에 이르기까지 학교 앞 점방을 지날 때마다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렇게 꾹꾹 눌러 참아가며 한두 달 정도 용돈을 모으면 약 30원 정도가 모여졌다. 버스 요금이 5원 정도 했으니, 왕복 요금 10원. 거기에 영화 관람료가 10원~20원 정도였으니, 30원이면 어쩌다 건빵까지 오그작 오그작 씹어가며 총천연색 영화를 신나게 즐길 수 있었다.

중도극장(1950년대)
중도극장(1972)

극장가는 험난한 길
청소년 회관과 함께 이용했던 극장은 대전 시내 외곽 목동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중도극장’. 당시 중도극장은 개봉관이 아니었다. 중도극장은 청소년 회관에서 영화를 상영하지 않을 때 즐겨 찾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관람료도 청소년 회관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청소년회관에서 5원을 받았다면 중도극장 관람료는 10원~20원쯤 했을 것이다. 관람료가 50원 정도 했던 시민관(지금의 NC 백화점 자리)이나 대전극장, 중앙극장, 신도극장과 같은 개봉관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었다.

영화 볼 돈이 모아졌다고 영화관으로 곧장 직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7남매를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손바닥만한 구멍가게를 꾸려나가면서 농사까지 지으셨던 부모님 눈치부터 살펴야 했다. 영화관으로 출발하는 시점을 부모님의 일손이 가장 바쁜 날로 정해놓았다.

내게는 위로 형 둘, 누나 하나에 아래로는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 있다. 7남매 중에 딱 가운데 자식이다. 형 누나, 여동생, 남동생, 다 있으니 형제 복으로 치자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었다. 그 '행복'은 영화 보러 가는데도 적용이 됐던 것이다.

가운데 자식이다 보니, 놀러 나갔다가 집에 늦게 들어와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꾸지람 받는 일이 많지 않았다. 큰아들은 집안을 이끌 장남이라 챙기게 되고 어린 막내 놈은 기본으로 챙기다 보니 늘 바쁘게 생활하셨던 부모님 레이더에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영화관에 갈 때 나는 그 틈새를 충분히 이용했다.

그렇게 나는 어렵사리 돈이 모아지게 되면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집을 빠져 나왔다. 당시 집 앞에는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지금은 6차선 도로가 뻥뻥 뚫려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2백년도 넘었다는 커다란 당산나무 한 그루가 듬직하게 서 있었다. 어린 나는 집 쪽을 힐끔거리며 영화 속 같이 삼삼하게 펼쳐진 그 들판을 불안스럽게 가로질러 냇가로 나왔다.

그리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대성리(대성동). 대성리 둑방 바로 아래 큰 늪지가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자연 늪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우리는 그 늪지를 '큰 둠벙'이라고 불렀다. 주변이 수풀로 뒤덮인 2백 평 남짓한 늪이었지만 늪 한가운데는 푸른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곳은 키 큰 어른들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바싹 들어 올려도 발이 닿지 않을 만큼 아주 깊다는 소문도 있었다.

우리 조무래기들에게는 그 늪은 공포의 대상이었기도 했다. 한 밤중에는 어른들조차 가까이 가길 꺼려했다. 어느 해인가 이 늪에서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빠져 죽었는데 그때부터 밤만 되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한낮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여자의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보름달이 뜨던 날, 머리를 풀어헤치고 늪 주변을 배회하는 여자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늪을 지날 때마다 등골이 오싹거렸다. 그 늪을 만나면 100미터 달리기하듯 전력 질주를 해야만 했다. 영화를 보고 어쩌다 늦은 저녁 무렵에 그 곳을 지날 때는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혼자서 이 늪지를 지나 올 때는 영화를 보러 간 것에 대해 후회를 하곤 했다. 하지만 늪지의 공포는 영화관으로 향하는 내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영화관에 들어가 총천연색 영화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그 마지막 관문은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애들은 가라’ 인지, ‘애들도 와서 봐라’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청소년(미성년자) 입장불가 ‘애들은 가라’ 뭐 이런 따위의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면, 남진의 노래<가슴 아프게> 가사에서처럼 ‘저 바다’ 때문이 아닌 ‘저 청소년 관람불가’ 때문에 정말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미리 알고 갔더라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0원짜리 영화를 보던 그 시절에 그 깡촌까지 영화 포스터를 붙였겠는가?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가는 영화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때 구정물 줄줄 흐르는 촌놈이 폼 잡고 영화 한 편 보겠다고 온갖 관문 다 통과하고 천신만고 끝에 영화관에 왔는데 청소년 입장불가라니, 이럴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게 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영화관 앞을 뱅뱅 돌면서 영화 포스터를 보고 또 보다가 아까운 버스 요금을 셈하며 또다시 그 험난한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옛 향수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보면 더러 낯선 아줌마 치맛자락 붙들고 은근슬쩍 입장하는 간 큰 놈들도 있지만, 그게 어디 영화 속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그것도 촌놈이. 사실 촌놈이 혼자서 영화 보러 다녔으니 촌놈치고는 되바라진 편이지만 생판 모르는 아줌마들 옷자락 잡고 영화 볼만큼 ‘까진 놈’은 아니었다.

그 험한 길을 왕복하면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보았던 영화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오래토록 남는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사실 어떤 영화를 보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촌놈이 대전 중심지로 당당하게 나서 영화관에 가서 간혹 만나게 되는 총천연색 영화를 보는 것, 그것으로 족했다.

총천연색 화면 속에서 검은 장갑을 낀 사나이들이 오락가락하며 한바탕 싸움을 벌여 악당들에게 당하고 훗날 멋지게 복수함으로써 결국 정의가 승리하는 짜릿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거기다가 영화보고 온 다음날, 동네 아이들에게 온갖 똥 폼 잡아가며 시시콜콜 얘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10원짜리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청소년 회관, 그리고 가끔씩 청소년 관람 불가로 발길을 돌리게 했던 중도극장, 지금은 그 추억의 영화관들이 다 사라졌다. 얼마 전에는 아카데미 극장마저 문을 닫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어릴 적부터 젊은 시절까지 추억이 배어있는 수많은 극장들이 멀티플렉스에 밀려 사라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면 단 몇 분 만에 영화 한 편을 받아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옛날의 극장이 그리운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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