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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별 쏟아져 마을이 된 진잠 별밭마을과 고인돌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7.03.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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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동 고인돌

    [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별들이 우르르 쏟아져 마을을 이룬 곳이 있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종종 유성우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별들이 자주 찾는 마을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진잠별밭 마을을 찾아본다. 별 하나에 사랑이, 별 하나에 우정이, 이런 낭만을 함께 안고 찾아가면 더욱 좋을 일이다.

     
    별들이 쏟아져 별이 되어라
    진잠의 ‘잠(岑)’은 ‘작지만 높이 솟은 산’이란 뜻이다. 구봉산을 가리킨 것으로 바위 봉우리라 하여 진잠이라 불렀다. 그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지금의 학하동이고 이곳의 옛 이름이 성전(星田)리였다. ‘별밭’으로 불리는 이곳은 북극성이 떨어진 밭이라고 해서 추성낙지라고도 불렸다. 추성이란 중심이 되는 별로 북극성을 말한다.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이곳 별밭에 머물면서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이 떨어진 곳이라 확인하면서 추성낙지라 불렀다.

    이렇듯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진 이곳은 별봉을 중심으로 땅위에 하늘세계를 펼쳐 놓고 있는 모습인데 조선 초기에는 진잠현, 1895년에 진잠군 북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넉바위, 무덤마루, 별밭 등의 옛 마을과 달처럼 생긴 달봉 별봉 등의 야산이 있고 보광명사, 자광사, 등의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20년의 소나무 7그루가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그래서 신선이나 도인들이 머물렀다하며 별봉, 달봉 같은 이름난 산으로 둘러싸여 화가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학하동 멸왜뜰은 임진왜란 때에도 왜군이 침범하지 못한 곳이고 동학군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곳이기도 하니 귀하고 성스러운 천하명당이라는 말이 허명은 아니다.

    인조 26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금의 자광사 터에 머무르면서 이곳에 학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를 기르면 나라의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 하여 서당을 짓고 나무를 심었다. 우암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하늘과 별을 관측하며 성리학과 천문 역법을 연구하여 숙종 6년(1680) 경연석상에서 임금에게 일식의 이치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고, 효종에게 청나라에 대한 북벌정책 등을 밀봉하여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심은 300년 된 향나무는 그 세월의 숨은 비밀을 아직도 품고 있다.

    지금도 자광사 입구 마당 기둥의 받침돌에서 우암 선생이 강학했던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후에 그 자리에 조계종 승려인 탄허스님이 절을 세우고 전국의 유명한 도사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자광사

    학하리를 찾아온 학에게 묻다
    학하동의 또 다른 이름은 학하리(鶴下里)인데, 풍수지리학으로 살펴보면 지세가 학이 내려앉는 형상을 띠어 그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학부리에 하얀 돌이 박혀있다 하니 그래서 ‘백학이 밭에 내려앉은 곳(白鶴下田)’이라고 전해진다. 학하리 마을 서쪽에는 학무정(鶴舞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주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무성했고 여기에 많은 학이 날아들었다고 동네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학하동에 2002년 1월, 천연기념물인 학 열 마리가 찾아왔다. 산세와 지세가 학을 부르는 곳일 수도 있고 학이 내려앉은 자리라고 사람들이 믿다보니 학이 이곳을 찾게 되었을 수도 있다. 별들이 내려와 마을을 이룬 진잠 별밭마을 이야기를 마음으로 만난다면 그저 전설이 아니라 현대에도 살아있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산책길에서 쉬던 돌이 고인돌이라고?

    우리나라에는 남북한 합하여 무려 4만 개가 넘는 고인돌이 있다. 이는 전 세계의 40%가 모여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은 규모도 크고 특별해서 2000년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고 하니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지도 모를 일이다.
    고인돌 보면 ‘어 저거 우리 동네 산에서도 많이 봤는데’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산책길에 널찍한 돌에 앉아 쉬엄쉬엄 쉬어가던 그 돌의자가 오래된 조상들의 무덤인 고인돌이라는 사실을 알면 버릇없이 조상 묘를 깔고 앉았다고 지하에서 노하신 분의 목소리가 들릴 듯도 하다.
    유성의 계산동과 학하동의 경계를 이루는 암탉을 닮은 빈계산에는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하나인 신흔국이 있었다. 수많은 고인돌은 이미 그 이전부터 이 땅에 모여 살아온 조상들의 숨결과 이력을 들려주고 있다.

    칠성당 고인돌

    고인돌 이야기
    원내동을 비롯하여 대정동, 교촌동, 외삼동 일대의 낮은 언덕에 수많은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내동 고인돌, 교촌동 칠성당 고인돌, 대정동 한우물 고인돌, 원당 고인돌, 외삼동 고인돌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은 주로 청동기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원내동을 중심으로 발견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인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들을 올린 탁자식 고인돌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내동리 지석묘는 발굴 당시 바둑판식 고인돌은 2-3m간격으로 촘촘하게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탁자식 고인돌은 따로 15m가량 떨어져 있었다. 당시 ‘암소바위’라고 불리던 이 고인돌은 충남방적공장 부지에 고인돌이 들어가게 되자 1977년 원내동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무덤 아랫부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덮개돌이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발견된 민무늬토기나 삼각형 돌화살촉으로 보아 후기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 보고있다.

    교촌동 칠성당 고인돌은 주민들이 직접 풀을 베고 가꾸는 등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칠성댕이’는 구릉에 위치한 전원마을인데 오랜 세월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지켜온 7개의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아기를 못 낳는 여인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북두칠성의 모양의 7개의 바위에서 백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빌었고 이후 여인은 아들을 낳아 소원을 성취했다. 사람들은 바위가 영험하다하여 칠성바위라 불렀고 마을도 칠성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바위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졌으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매년 칠석날이면 당제를 지내고 있다. 칠성댕이 마을 뒷산에 있는 이 고인돌은 굄돌이 드러나 보이는 바둑판식 고인돌로 대전의 청동기시대 문화의 분포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대정동 한우물 마을에도 북방식 탁자형 고인돌이 있는데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의 성혈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 고인돌로 여겨지는 유적들이 있으며 그 중 외삼동 고인돌은 소나무 숲 속에 3개의 고인돌이 모여 있는데 46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성혈은 알바위, 알구멍이라고도 부르는데 단단한 무덤돌 위에 사람이 손으로 갈아 새긴 구멍이다.
    토속신앙을 상징하는 이 성혈은 아마도 부족의 풍요를 기원하거나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로 파놓은 구멍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별자리 모양이라거나 가족 구성원의 수라거나 묻힌 자의 서열로 보기도 하는데 조상들의 간절한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and33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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