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유리창을 마주하고 그리운 이름 불러본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유리창을 마주하고 그리운 이름 불러본다
  • 이규식
  • 승인 2017.04.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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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 = 창비

유리창을 마주하고 그리운 이름 불러본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전부

[굿모닝충청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 유리창
투명한 유리창, 안에서 밖이 보이고 외부에서도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그 맑은 물체는 많은 경우 소통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여기 앉아서 저 건너를 내다 보는가 하면 지나가는 행인들도 잠시 안쪽의 정경에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유리창과 유리문을 통하여 너와 나의 삶과 생각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유리의 실체, 실물감은 견고하고 차갑다. 출입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존재하면서 이쪽과 저쪽을 가르고 차단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투명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진출을 방해하여 안으로 가두는 그 부동의 존재, 유리창을 바라보며 이루어지는 감성의 흐름은 이렇듯 열림과 소통, 닫힘과 가둠이라는 이중의 속성으로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동, 서양 시인들의 시적 제재로 활용되고 있다. 

#. 물방을 같은 이름을 부르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는 단순한 행위에는 많은 함의를 포괄한다. 인간의 여러 고뇌를 집약하는 신체부위인 이마, 그러기에 죄의 탯줄, 막막한 벌판, 먼 不在 같은 추상적인 여러 정황과 관념이 이마를 통하여 표상된다. 유리창은 대비되는 여러 개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관문이기에 시인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잃어버린 사랑 그리고 순수와 정화의 극한을 추구하는 과정의 고뇌를 표현한다. 이별의 상실감과 그리움의 간절함을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별을 향한 지극한 그리움, 그 부재를 인지하는 동안 슬픔은 가중된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는 그리움은 더 애틋하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별을 바라보며,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를 불러보는 행위에서 순수하고 투명한 사랑과 영혼을 소망하는 시인의 염원을 읽는다. 지금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숱한 집착과 폭력, 비정상적인 언행, 의식의 오류와 과잉 속에서 이 한편의 수줍은 연가, 애틋한 순정의 멜로디는 오래도록 빛나고 있다.

#. 이가림 시인, 이계진 교수
이 시는 1981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의 시인 프로필에는 연구실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시인 모습<왼쪽 사진>이 실렸다. 아마도 30대 후반 무렵일 것이다. 시인이 수도권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기 전에 봉직했던 대학, 그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오른쪽 사진>. 4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 유리창 밖 나무들이 더 푸르고 울창해졌을 따름이다. 시인이 창문 밖으로 바라보았던 대전 시가지와 보문산 정상은 이제 빽빽하게 솟아오른 나무와 촘촘히 들어선 건물들에 가려서 조망할 수 없지만 여전히 밤하늘과 별들은 투명하게 빛날 것이다.

이가림이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한 이계진 교수가 한국불어불문학회장을 맡았을 때 필자는 학술이사로 이사회 모임이나 학술발표회 준비과정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다. 다정, 세심, 배려같은 몇가지 어휘로 집약하기에 부족한 이계진 교수의 감성과 성품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전편을 통하여 보다 상세하게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가 불의의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지 2년이 되어간다. 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되었을 시인처럼 독자들께서도 한번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나지막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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