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넉 점 반, 멈추어 버린 아름다운 시간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넉 점 반, 멈추어 버린 아름다운 시간
  • 이규식
  • 승인 2017.05.13 05: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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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영경 (우리시 그림책 ‘넉 점 반’ 수록, (주) 창비 발행)

넉 점 반, 멈추어 버린 아름다운 시간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윤석중, ‘넉 점 반’ 전부 ((주)창비 발행)
 

#. 아기, 넉 점 반에 대장정을 떠나다
짧은 동시 한 편이 한 권의 그림책이 되었다. 1940년 윤석중 선생이 쓴 작품으로 천진하면서도 능청맞은 아기의 행동을 따라 우리는 잠시 아련한 시절, 추억의 공간으로 산책을 떠난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엄마는 아기에게 가겟집에 가서 몇시인가 물어보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오후 4시반, ‘넉 점 반’을 귀담아 들은 아가는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길 위에 펼쳐진 여러 자연, 동 식물의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긴다. 물먹는 닭을 구경하고 개미떼의 움직임에 넋을 잃는가 하면 잠자리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변변한 장난감이나 놀이 시설과 기구가 없던 시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기에게는 신천지며 흥미로운 놀이터였으므로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자연스러웠으리라. 분꽃 하나 따서 입에 물고 니나니 나니나 흥겨워 하는 사이 해는 그만 꼴딱 져 버리고 아기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독자들은 아기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온갖 구경을 하는 사이 가게 영감님께 물어봤던 시간 넉 점 반을 잊어버렸으리라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아기는 “넉 점 반”을 반듯하게 엄마에서 보고한다. 이미 해는 저물고 가족들이 두레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을 즈음 ‘넉 점 반’이라는 낭랑한 목소리는 반전의 백미를 이룬다.

#. 원작의 저력, 그림의 마법
천진스러운 동심과 눈을 돌려 바라보면 모든 것이 놀잇감, 놀이터며 신기한 현장이 된다. 향수를 자아내는 우리 삶의 원형질로 말미암아 이 얇은 책 한 권을 읽는 짧은 시간의 행복은 커져 간다.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 윤석중 선생이 29세에 쓴 이 작품은 이영경 작가의 섬세하고 천연덕스러운 일러스트레이션에 힘입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특히 아기의 눈매와 옷차림, 가게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 만나는 갖가지 동, 식물과 행인들의 표정이며 분위기는 빛바랜 사진처럼 우리를 아스라한 동심과 추억의 세계로 이끌어 들인다.

동시를 읽으며 언어를 통하여 나름 머릿속에 그려보는 상상의 범주와 윤곽이 그림을 통하여 무한대로 확산된다. 윤석중 선생이 이 작품을 쓴 시기는 일제강점기였지만 이영경 화가의 그림 무대는 대략 1960년대로 옮겨졌다. 절제된 시어에 반복과 대구(對句)로 감칠 맛을 살렸다면 그림에서는 아주 미세한 디테일로부터 핵심인 아기의 표정변화에 이르기까지 천의무봉 자유자재한 필치로 날개를 달아준다. 동시읽기에서 출발하여 그림이 제공하는 상상과 환상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일련의 과정이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어린이용 그림책이겠지만 어른들에게 더 깊은 여운을 주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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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경 2018-10-11 20:50:39
이 글을 넉점반 원화전에 덧붙이고 싶습니다. 연락처나 이멜주소가 없어서 글 남깁니다.
감사합니다.